<colbgcolor=#E2E2B5><colcolor=#000000> 독일 제국의 황태자비 메클렌부르크슈베린의 체칠리에 여공작 Herzogin Cecilie zu Mecklenburg-Schweri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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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체칠리에 아우구스테 마리 (Cecilie Auguste Marie) |
출생 | 1886년 9월 20일 |
독일 제국 메클렌부르크슈베린 대공국 슈베린 | |
사망 | 1954년 5월 6일 (향년 67세) |
서독 바이에른 바트 키싱엔 | |
배우자 | 독일 제국의 황태자 빌헬름 (1905년 결혼 / 1951년 사망) |
자녀 | 빌헬름, 루이 페르디난트, 후베르투스, 프리드리히, 알렉산드리네, 체칠리에 |
아버지 | 메클렌부르크슈베린 대공 프리드리히 프란츠 3세 |
어머니 | 러시아의 아나스타샤 미하일로브나 여대공 |
형제 | 알렉산드리네, 프리드리히 프란츠 4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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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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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칠리에라는 이름은 외할머니인 바덴의 체칠리에한테서 따왔다. 언니 덴마크의 알렉산드리네 왕비의 이름은 첫째 이모할머니인 바덴의 알렉산드리네[1]에서 따왔다. 메클렌부르크슈베린 대공비 아나스타샤는 두 딸의 이름을 각각 자신의 이모와 어머니에게서 따와 지었다.
덴마크의 알렉산드리네 왕비의 여동생으로 덴마크 국왕 프레데리크 9세의 이모이자, 하노버 가문의 수장 에른스트 아우구스트 4세, 그리스 왕비 하노버의 프리데리케 공주의 큰외숙모이다.
또한 그리스와 덴마크의 니콜라오스 왕자비 옐레나 블라디미로브나[2]와 올덴부르크 대공가의 수장인 니콜라우스 폰 올덴부르크[3]의 사촌이다.
2. 생애
2.1. 어린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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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 아나스타샤 미하일로브나 여대공과 형제들과 함께 있는 체칠리에.[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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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6년 9월 20일, 메클렌부르크슈베린 대공 프리드리히 프란츠 3세와 러시아의 아나스타샤 미하일로브나 여대공의 막내딸로 태어났다. 그녀의 아버지 프리드리히 프란츠 3세가 건강 문제로 인해 프랑스 남부 칸에서 가족과 많은 시간을 보냈다.
어머니 아나스타샤는 러시아 제국의 미하일 니콜라예비치 대공과 바덴의 체칠리에의 고명딸이었고, 니콜라이 1세의 손녀였다.
2.2. 결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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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헬름 황태자 커플.[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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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헬름 황태자와의 결혼 당시 포스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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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5년 남편 빌헬름 황태자와 함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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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남 루이 페르디난트 왕자를 안고 있는 체칠리에 황태자비. 왼쪽은 장남 빌헬름 왕자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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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남 빌헬름, 차남 루이 페르디난트와 함께. |
2.3. 마지막 독일 황태자비
독일 황태자비로서 체칠리에는 빠르게 독일 황실에서 가장 사랑받는 구성원 중 한 명이 되었다. 키가 크고 조각상 같은 외모, 우아함과 패션 감각으로 유명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의 패션 스타일은 독일 제국 전역의 많은 여성들에게 모방되었다. 결혼식 축제가 끝난 후 독일 황태자 부부는 포츠담의 대리석 궁전 에 여름 별장을 마련했다 . 매년 1월 법정 시즌이 시작될 때 부부는 베를린의 왕세자 궁전으로 돌아왔다. 체칠리에의 첫 아이는 1906년 7월 4일에 태어났고, 장남의 이름은 빌헬름이라 지었다. 당시 독일 군주제는 매우 안전한 것처럼 보였다.체칠리에는 여성 교육을 포함한 여러 분야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미쳤는데, 여러 학교와 도로가 그녀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어린 시절부터 바다에 대한 열정이 컸던 체칠리에의 행동은 그녀에게 큰 기쁨과 영광을 가져다주었다. 1910년 말, 독일 황태자 부부는 실론[7], 인도, 이집트 순방을 떠났다. 베를린으로 돌아온 체칠리에의 삶은 군사 퍼레이드, 갈라 국가 연회, 공식 의식 및 오스트리아 제국 황제 프란츠 요제프 1세를 포함한 외국 법원에 대한 국빈 방문을 포함한 기타 법원의 기대에 참석하는 끊임없는 왕실 의무로 구성되었다. 1911년 5월 체칠리에는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있는 러시아 황실을 방문했는데,[8] 6월에 버킹엄 궁전 방문이 이어졌다. 런던의 삽화 잡지 '더 스피어(The Sphere)'는 이 방문을 "대관식을 위한 사랑하는 방문객"이라고 보도했다.[9] 1911년 런던 방문은 체칠리에 황태자비가 독일 제국을 대표하는 마지막 방문이었다.
하지만 남편 빌헬름 황태자는 바람둥이였고 결혼생활은 불행했다. 독일 군주제가 무너진 후,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체칠리에는 남편과 거의 떨어져 살았다.
2.4. 전간기 ~ 제2차 세계 대전
체칠리에와 두 아들. 왼쪽부터 장남 빌헬름, 체칠리에 본인, 차남 루이 페르디난트 폰 프로이센 왕자.
1918년 제1차 세계 대전에서 독일 제국이 패배하고 시아버지 빌헬름 2세가 퇴위하고, 가족들과 함께 네덜란드로 망명했지만 체칠리에는 자녀들과 함께 독일에 머물기를 원했다. 이후 체칠리엔호프로 다시 자녀들과 돌아갔고, 장남 빌헬름과 차남 루이 페르디난트가 근처 학교에서 통학생으로 다녔다.
한편 남편 빌헬름은 1923년에야 독일로 돌아갈 수 있었다. 그 전까지 체칠리에는 빌헬름을 방문하기가 어려웠다. 다행스럽게도 1920년 11월에 호엔촐레른 가문과 바이마르 공화국 간에 체결된 임시 협정으로 인해 전 독일 황가는 여전히 독일에서 상당한 사유 재산을 소유하고 있었다. 남편이 없을 때 체칠리에는 호엔촐레른 가문의 주요 인물로 활동했다.
하지만 체칠리에는 시아버지 빌헬름 2세와 달리 제국이 회복될 것이라는 환상에 사로잡혀 있지 않았다. 1923년 11월 13일 저녁, 오엘스 성에서 체칠리에는 남편을 만났다. 빌헬름의 불륜과 수년간의 별거로 인해 결혼은 이름뿐이었지만 체칠리에는 멀리 떨어져 있어도 모든 것을 함께 유지하기로 결심했다. 체칠리에는 계속해서 포츠담의 체칠리엔호프에서, 남편 빌헬름은 실레지아에 살았다. 부부는 가족 결혼식, 자녀 확인, 세례식, 장례 등 가족의 단결을 위해 필요할 때 함께 모였다. 1927년에 호엔촐레른 가문과 바이마르 공화국 간에 최종 재정 협정이 체결되었다.
체칠리에는 루이제 왕비 연맹, 조국 여성 연합회, 성 요한 기사단의 숙녀와 같은 여러 자선 단체에서 활동했다. 정치적 개입은 가급적 피했다. 1933년 군주제를 혐오하고 남성성을 강조하는 아돌프 히틀러와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의 집권으로 이 자선단체들은 모두 해산되었다.
1933년 장남 빌헬름이 도로테아 폰 살비아티와 귀천상혼으로 결혼했다. 체칠리에는 시아버지보다 아들을 이해해주었다. 1934년 빌헬름의 장녀 펠리치타스가 태어나면서 할머니가 되었다.
1935년 차남 루이 페르디난트는 경제학을 공부하고 한동안 루프트한자와 포드 모터 컴퍼니의 정비공으로 일했으며, 그녀의 셋째 아들 후베르투스는 한동안 농사를 지은 후 군과 공군에 입대하여 조종사가 되었다. 막내 아들 프리드리히는 사업을 했다.
1938년 차남 루이 페르디난트 폰 프로이센 왕자가 러시아 제국의 키라 키릴로브나 여대공과 결혼했다. 이 결혼은 제 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기 전의 마지막 경사였다.
그러나 제2차 세계 대전의 발발로 체칠리에의 가족들에겐 불행한 삶이 이어지기 시작했다. 1940년 장남 빌헬름 왕자가 프랑스 침공 당시 벨기에 니벨레스에서 전사했으며[10] 1941년 시아버지 빌헬름 2세가 사망하고, 1950년 삼남 후베르투스 왕자가 맹장염으로 사망한 것 모자라 1년 뒤 남편 빌헬름 황태자도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호엔촐레른 성에서 거행된 남편의 장례식 때 체칠리에는 차남 루이 페르디난트의 팔에 안긴 상태로 남편에게 마지막 작별을 고했다.
1952년 체칠리에의 회고록인 Remembrances가 출간되었다. 같은 해 사남 프리드리히 왕자의 장녀 빅토리아 마리나의 세례식에 참석하러 오랜만에 영국을 방문했고, 시당숙모인 영국의 테크의 메리를 오랜만에 만났다. 그러나 같은 해 12월 28일에 언니 덴마크의 알렉산드리네 왕대비가 사망했고 1953년 1월 3일 체칠리에는 언니의 장례식에 참석했다.
2.5. 사망
1954년 5월 6일 바트 키싱엔을 방문하던 중 뇌졸중으로 사망했다. 사별한 남편 빌헬름 황태자의 생일이었다. 1954년 5월 12일 그녀의 장례식이 거행되었고 그녀의 유해는 호엔촐레른 성의 부지에 있는 남편 옆에 묻혔다.3. 가족관계
자세한 내용은 호엔촐레른 가문 문서 참고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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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헬름 황태자와 체칠리에 황태자비의 가족 사진.[11] |
3.1. 조상
본인 | 부모 | 조부모 | 증조부모 |
메클렌부르크슈베린의 체칠리에 (Cecilie of Mecklenburg-Schweri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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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클린부르크슈베린 대공 프리드리히 프란츠 3세 (Friedrich Franz III, Grand Duke of Mecklenburg-Schweri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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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클린부르크슈베린 대공 프리드리히 프란츠 2세 (Friedrich Franz II, Grand Duke of Mecklenburg-Schweri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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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클린부르크슈베린 대공 파울 프리드리히[12] (Paul Friedrich, Grand Duke of Mecklenburg-Schweri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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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이센의 알렉산드리네 공주 (Princess Alexandrine of Prussi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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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이스쾨스트리츠의 아우구스타 (Princess Augusta Reuss of Köstritz)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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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이스쾨스트리츠의 하인리히 63세 (Heinrich LXIII, Prince Reuss of Köstritz)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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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톨베르크베르니게로데의 엘레오노레 여백작 (Countess Eleonore of Stolberg-Wernigerod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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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제국의 아나스타샤 미하일로브나 여대공 (Grand Duchess Anastasia Mikhailovna of Russi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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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제국의 미하일 니콜라예비치 대공 (Grand Duke Michael Nikolaevich of Russi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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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콜라이 1세 (Nicholas I)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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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이센의 샤를로테 공주 (Princess Charlotte of Prussi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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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덴의 공녀 체칠리에 (Princess Cecilie of Bade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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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덴 대공 레오폴트 (Leopold, Grand Duke of Bade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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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웨덴의 소피아 공주 (Princess Sophie of Sweden) |
4. 여담
- 아들들이 어머니의 큰 키의 영향으로 장신에 미남들이었는데, 특히 차남 루이 페르디난트가 체칠리에를 가장 많이 닮아서 제일 미남이었는데 눈매는 영락없이 체칠리에를 닮았다.
- 형제자매들 중에서 자녀를 가장 많이 낳은 만큼 후손 수도 가장 많다. 또한 언니[13], 오빠[14], 이부남동생[15]의 남계 후손이 단절된 것과 달리 이쪽은 현재도 남계후손들이 매우 많다.
[1]
외할머니
바덴의 체칠리에의 첫째 언니.
작센코부르크고타 공작
에른스트 2세의 아내이기도 하다.
[2]
고모
메클렌부르크슈베린의 마리의 딸. 참고로 옐레나의 오빠인 키릴 블라디미로비치 대공은 뒷날 체칠리에의 며느리가 되는
키라 여대공의 아버지이다.
[3]
고모 엘리자베트 알렉산드리네의 아들.
[4]
맨 왼쪽에 있는 여자아이가 체칠리에이다. 체칠리에 옆에 있는 여성은 언니
알렉산드리네이고, 알렉산드리네 옆에 있는 소년은 오빠
프리드리히 프란츠 4세이다. 프리드리히 프란츠 4세 옆에 있는 성인 여성은 어머니
아나스타샤 여대공이다.
[5]
옆에 있는 사람은
시누이다.
[6]
참고로 둘이 8촌 지간이다. 공통조상이 프로이센 국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로, 체칠리에의 외할아버지
미하일 니콜라예비치 대공이 빌헬름 황태자의 친할아버지
프리드리히 3세의 고종사촌이었다. 또한 형부인
크리스티안 10세와도 8촌이다. 크리스티안 10세의 외할머니인
네덜란드의 루이세 공주도 프리드리히 3세의 고종사촌이기 때문.
[7]
현재는
스리랑카. 그 당시에는 영국의 식민지이었다.
[8]
방문 시기에 러시아의 황제
니콜라이 2세의 생일과 일치했다.
[9]
메리 왕비도 체칠리에 황태자비와의 연락을 유지했다.
[10]
이후 아돌프 히틀러는 독일의 모든 왕족과 귀족들을 제대시켰다.
[11]
왼쪽부터 장남 빌헬름 왕자, 삼남 후베르투스 왕자, 체칠리에 황태자비 본인, 차녀 체칠리에 공주, 장녀 알렉산드리네 공주, 남편
빌헬름 황태자, 사남 프리드리히 왕자, 차남
루이 페르디난트 왕자.
[12]
파벨 1세의 외손자이다.
[13]
슬하 2남을 낳았는데 장남
프레데리크 9세가 슬하 3녀를 두었고, 차남 크누드가 2남 1녀를 낳았으나 크누드의 아들 둘 다 자녀가 없거나 딸만 낳아서
크리스티안 10세의 남계후손은 단절되었다.
[14]
슬하 2남 3녀를 낳았으나 장남에겐 자녀가 없고 차남에겐 두 딸밖에 없어서 메클렌부르크슈베린 가문은 단절되었다.
[15]
슬하 2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