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0-06 14:38:44

창해군

1. 개요2. 연혁3. 위치 논란4. 인구5. 사료에서의 등장6. 여담7. 둘러보기

1. 개요

滄海郡[1].
기원전 128년 가을(음력 7~9월)에 고조선 영향력 아래에 있던[2] 예군(穢君 / 濊君)[3] 남려가 한나라에 투항하여 전한 무제에 의해 설치되었다가 2년만인 기원전 126년 봄(음력 1~3월)에 폐지한 이다.

워낙 단명한 군이기 때문에 아예 실체가 없이 설립 구상만 되었다는 견해 페이퍼플랜?와 실제로 운영되었다는 견해가 갈린다. 다만 어느쪽이든 정상적인 운영은 불가능했을 것이라는데는 대부분 동의한다. 창해군을 설립할 당시 한나라는 흉노, 고조선 등과 대립 상태였고, 동북아시아의 불안정한 정세 때문에 한군현의 확립과 운영이 제대로 기능하지 못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짧은 역사에도 불구하고 한국 고대사에서 위만조선 멸망 후 설치된 한사군보다 20년 앞서 설치 된 중국의 첫 군현이라는 의의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존속기간이 워낙 짧기 때문에 문헌자료나 유물적 근거가 매우 빈약하고 문헌들도 사료마다 약간씩 차이를 보이고 있다. 학계에서도 창해군에 관한 논의는 얼마 안되는 근거들을 바탕으로 추론에 의지하고 있고 따라서 창해군의 성격, 위치 등을 두고 다양한 견해가 존재한다.

2. 연혁

예족의 지도자인 예군 남려(南黎) 우거를 배신하고 28만 명이나 되는 인구를 이끌고 요동군에 귀속하였고, 이에 팽오(彭吳)가 (濊)와 고조선을 조율한 뒤 한이 그곳에 창해군을 설치하였다.

당시 한나라는 지금의 청천강으로 비정되는 패수(浿水)[4]를 고조선과의 경계로 인식하고 있었으나, 요동의 만번한(滿番汗)부터 마자수( 압록강)를 건너 패수에 이르기까지의 공간에는 그곳에 살던 고조선 친화적인 중국계 망명인들로 인하여 한의 실질적인 지배력이 닿지 못하고 있었고, 무제는 이곳을 영토화하고 패수까지 진출하고자 창해군을 설치했던 것이라고 보는 주장이 있다.

이후 군현의 운영과 유지를 위한 물자 및 인력 징발로 인해 인접한 연(燕)과 제(齊) 지방[5]이 피폐해져 봉기까지 일어났다고 한다. 무제는 요동군에서 창해군에 이르는 길까지 교통로를 정비할 것[6]을 명하였지만, 당시 어사대부였던 공손홍(公孫弘)의 건의로[7] 무산되고 창해군은 폐지된다. 인력과 비용이 너무 많이 필요했기 때문에 정상적으로 작동하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 결국 고조선의 일부를 영토화하려 했던 무제의 시도는 불과 2년도 안 되어 무산되었다. 그러나 창해군이 폐지됐다고 그 땅을 한이 모조리 상실한 것은 아니고, 압록강 위쪽의 만주 땅에는 무차(武次)현, 서안평(西安平)현, 번한(番汗)현이 살아남아 요동군 동부도위로 편입되었다.

그리고 약 20년 뒤, 동부도위 섭하가 고조선의 기습을 받아 살해당하고, 이후 고조선은 멸망의 길을 걷게 되었다. 창해군이 있던 자리에는 한사군 중 하나인 임둔군이 설치된다.

3. 위치 논란

대체로 창해군이 예족 사회를 기반으로 설치되었다는 점에서 착안하여 압록강 중류 및 동가강 유역의 고구려 예맥 지역 또는 강릉을 중심으로한 함경도-강원도의 동해안 일대, 즉 동예 지역이 논의되고 있다.

조선 후기 실학자인 이익, 정약용, 유득공 등은 창해군의 위치를 동해안 일대로 보았다. 근거로는 창해라는 명칭이 동해에서 비롯되었을 것으로 보았고, 한서의 기록 중 주석 부분이다. 다만 이 주석 부분은 창해군이 설치된 한무제 당시가 아니라 후한 대에 추가 된 것으로 기원전 2세기에 언급된 예군 남려의 예맥집단과 동예를 혼동한 것이라는 비판이 있다. 현실적으로도 고조선이 멸망한 이후라면 모를까 요동과 강원도 사이에 아직 건재한 시점에서 동해안 강원도 지역에 한나라가 교통로를 직접 뚫고 군을 개설하는 것이 가능하냐는 의문이 제기되었다.

근대 이후에는 훗날 부여, 고구려의 발흥지가 되는 압록강 중류 및 동가강 유역의 예맥집단의 거주지역에 창해군이 설치되었을거라는 해석이 제기되었다. 강원도보다는 한나라의 요동군과 지리적으로 훨씬 인접해있다는 점에서 지지를 받고 있다. 압록강 중류 유역설은 다시 창해군 지역에는 고조선 멸망 이후 한사군 중 하나인 현도군이 들어섰다는 견해로 이어진다. 즉 설에 따르면 창해군은 고구려의 기원과 형성과 깊은 관계가 있다는 이야기가 된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보자면 고조선과 한나라 및 요동군 사이에 있던 이 지역은 연맹체제인 고조선과 한 양측이 대립하는 상황에서 고조선에서 이탈하며 한의 군현이 일시적으로 설치되었다가 곧 폐지되는 정치적 격동을 겪은 것이 된다. 이 같은 혼란을 겪으면서 고조선과 한 양측간의 힘의 공백 상태가 발생하면서 이 지역이 독자적인 세력, 즉 훗날 고구려의 전신이 되는 집단으로 발전하고 성장할 여건이 마련되었다는 설명이다.

창해라는 지명을 동해가 아닌 발해, 즉 발해해로 보아 요동 남단 해안가에 위치했을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남려가 이끄는 예맥인 집단이 요동과 인접한 지역에 위치해있다면 한에 귀순하여 일시적이나마 군이 설치되었다고 보면 개연성이 높다. 다만 중국 사서에서 발해를 본격적으로 창해라고 지칭하는 것은 삼국지 수나라, 당나라 때서부터 확인 가능한 부분이라 창해군이 설치될 당시와는 시대적 차이가 있다는 약점이 있다.

4. 인구

남려가 이끌고 귀순한 28만이라는 수치는 납득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다. 남려가 이끌었던 집단은 족장사회단계나 잘해야 종전에 고조선 통제 아래의 소국으로 짐작되는데 그러기에는 제시된 28만이라는 수치는 지나치게 규모가 커서 합리적이지 못하다.

비교해보자면 한서 지리지 및 후한서에 따르면 낙랑군의 인구가 약 6만호 25만~40만 정도로 추산된다. 3세기 경의 초기 고구려가 3만호, 동옥저는 5천호 정도의 인구가 있었다. 남려가 귀속한 요동군의 경우에는 한서 지리지에 따르면 인구가 272,539명이라고 제시되어 있다. 귀순한 유민들이 요동군 전체인구보다 많다?

물론 다른 지역에 대한 인구 기록도 문자 그대로 수용하기보다는 비판적으로 접근하는 것이 적절하다. 하지만 남려의 투항 이후 설립된 창해군은 고작 2년만에 단명한 반면 낙랑은 거의 4세기 가까이 유지되었고 그 기간 동안 인구 센서스는 일회성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이루어졌다. 한서나 후한서 외에도 1990년에는 북한 평양에서 낙랑군의 각 현별 호구수 및 증감 여부까지 수치를 제시한 낙랑군 호구부가 발굴되기도 했다. 남려에 대한 기록보다는 훨씬 신뢰성이 있다.

결론적으로 해당 기사를 문자대로 수용하면 귀순 당시 남려는 한반도의 웬만한 고대국가나 한나라의 일개 현도 아니고 군을 능가하는 규모의 집단의 지도자라는 말이 된다. 결국 남려가 직접 이끌었던 집단 외에도 당시 이들과 이해를 같이하여 투항에 동참한 다른 예족사회까지 포함되고, 28만이라는 인구가 한꺼번에 투항했다기보다는 창해군 설치 예정지에 살던 예족 계 인구수 전체를 추산한 것이라고 보아야 합당할 것이다. 아니면 규모에 관한 기사가 그냥 과장되거나 부정확한 오류인 걸 수도 있다.

5. 사료에서의 등장

다음은 창해군과 관련된 사료들이다. 작성된 순서대로 정렬하였다.
팽오(濊) 및 조선(朝鮮)과 장사하자, 창해군을 두었는데, 이에 연(燕)과 제(齊)의 사이에서는 봉기가 일어났다. (중략) 이때 한(漢)나라는 서남이(西南夷)로 통하는 길을 만들었는데, 인부[作者]들이 수만 명이었다. 1,000리에 걸쳐 식량을 운송해야[負擔] 했으므로, 대개 10여 종[8]을 보내면 1석만 도착했으니, 공(邛)과 북(僰)들과 거래하여 그것(식량)을 모아야 했다. 수년이 지나도 길은 완성되지 않았는데, 만이(蠻夷)가 이를 노려 수차례 침공하니, 관리들은 군대를 일으켜 그들을 무찔러야 했다. 모든 파촉(巴蜀) 지방의 세금으로 이 비용을 충당하는 데는 부족했으므로, 이에 호민(豪民)들을 모아 남이(南夷)에서 경작하게 하여, 곡식을 지방관[縣官]에게 내게 하고 그 비용은 도내(都內, 중앙)에서 받도록 했다. 동쪽으로는 창해군에 이르렀는데 인부들에게 들어가는 비용이 남이(南夷)와 비슷했다.
彭吳賈滅[9]朝鮮,置滄海之郡,則燕齊之閒靡然發動。 (중략) 當是時,漢通西南夷道,作者數萬人,千里負擔饋糧,率十餘鐘致一石,散幣於邛僰以集之。數歲道不通,蠻夷因以數攻,吏發兵誅之。悉巴蜀租賦不足以更之,乃募豪民田南夷,入粟縣官,而內受錢於都內。東至滄海之郡,人徒之費擬於南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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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기(史記)』 권30 평준서(平準書) 제8( 원문, 번역)}}}
원삭 3년(기원전 126년), 장구(張歐)가 면직되니 공손홍(公孫弘)을 어사대부(御史大夫)로 삼았다. 이때는 서남이(西南夷)와 통교하고 동쪽으로는 창해군을 설치했으며, 북쪽으로는 삭방군(朔方郡)을 축성했었다. 공손홍이 수차례 간언하여 쓸모가 없는 땅을 받드는 일로 중국(中國)을 파폐하게 하니 폐지를 청하였다. 이에 천자가 주매신(朱買臣) 등을 시켜 삭방군을 세워 얻는 편익을 들어 공손홍을 나무랐는데, (주매신 등은) 열 가지를 들었으나 공손홍은 한 가지도 반박하지 못했다. 공손홍이 즉시 사죄하며 "(제가) 산동(山東)의 비루한 사람이라 그러한 이점이 있는지는 몰랐는데, (그렇다면) 서남이와 창해는 폐지하고 삭방군에만 전념하시길 바랍니다."라고 말했다. 임금이 이내 이를 허락했다.
元朔三年,張歐免,以弘為御史大夫。是時通西南夷,東置滄海,北筑朔方之郡。弘數諫,以為罷敝中國以奉無用之地,願罷之。於是天子乃使朱買臣等難弘置朔方之便。發十策,弘不得一。弘乃謝曰:「山東鄙人,不知其便若是,願罷西南夷、滄海而專奉朔方。」上乃許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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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기(史記)』 권112 평준후 주부 열전(平津侯主父列傳) 제52, 공손홍( 원문, 번역)}}}
원삭 원년(BCE 128) 가을, 동이 예군(薉君) 남려(南閭) 등이[원주][11] 구 28만인을 이끌고 항복하므로, 창해군으로 삼았다. (중략) 원삭 3년(BCE 126) 봄에 창해군을 없앴다.
(元朔元年)秋, (중략) 東夷薉君南閭等口二十八萬人降, 為蒼海郡. (중략) 三年春,罷蒼海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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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서(漢書)』 권6 무제기 제6 ##}}}
팽오가 예와 조선을 뚫자 창해군을 두었는데, 이에 연(燕)과 제(齊)의 사이에서는 봉기가 일어났다. (중략) (흉노를 치고 삭방을 쌓던) 때에 또한 서남이(西南夷)로 통하는 길을 만들었는데, 인부[作者]들이 수만 명이었다. (이하 해석 상동)
彭吳穿穢貊、朝鮮,置滄海郡,則燕齊之間靡然發動。 (중략) 時又通西南夷道,作者數萬人,千里負擔餽饟,率十餘鍾致一石,散幣於邛僰以輯之。數歲而道不通,蠻夷因以數攻吏,吏發兵誅之。悉巴蜀租賦不足以更之,乃募豪民田南夷,入粟縣官,而內受錢於都內。東置滄海郡,人徒之費疑於南夷。
{{{#!wiki style="text-align:right"
『한서』 권24 식화지(食貨志) 제4 ##}}}
원삭(元朔) 원년(기원전 128년)에 예군(濊君) 남려(南閭) 등이 우거(右渠)를 배반하고 28만 구(口)를 이끌고 요동(遼東)에 귀속하였으므로, 무제(武帝)는 그 지역으로 창해군(蒼海郡)을 만들었으나, 수년 후에 곧 폐지하였다.
元朔元年武帝年也., 濊君南閭等【集解】 惠棟曰, 顏籀云, 南閭者, 薉君之名.畔右渠, 率二十八萬口詣遼東內屬, 武帝以其地爲蒼海郡, 數年乃罷.
{{{#!wiki style="text-align:right"
후한서(後漢書)』 권85 동이(東夷)열전 제75, 예(濊) ##}}}

6. 여담

창해라는 이름은 동해의 옛 이름이기도 한데, 창해군이라는 명칭은 여기에서 따온 것으로 보인다.

사기 유후세가에 나오는 인물 창해군, 창해 역사과 관련이 있지 않는가 하는 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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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滄은 蒼이라고도 쓴다. [2] 우거왕의 조부인 위만이 옥저를 점령했기 때문이다. [3] 남려의 칭호인데, 칭호의 정체는 불명이다. 예족의 족장이라는 설도 있고 위만조선에서 남려가 하사받은 칭호라는 설도 있다. [4] 패수가 정확히 어느 강인지는 논란이 있다. 청천강설, 압록강설, 혼하설 등 다양한 견해가 있으나 통설은 존재하지 않는다. [5] 이는 나라가 아니라 지금의 허베이 성, 랴오닝 성, 산둥성을 가리키는 지명이다. [6] 한무제가 서남이(西南夷) 정벌에서 그랬던 것처럼 실질적으로 군현을 설치하고 운영함에 있어 주변의 물자의 이동이 빈번하였고, 특히 명령이나 행정문서도 이러한 교통로의 정비가 이루어지고 나서야 본격적으로 운영될 수 있기에 교통로 정비는 변군 확장에서 필수적인 요소였다. [7] 『사기』 권112 평준후주부열전(平津侯主父列傳) 제52 공손홍(公孫弘) 조. 공손홍이 창해군뿐만 아니라 당시 한의 변군확장사업 전반에 대해 비판적인 의견을 낸 것인데, 유방은 공손홍의 건의를 듣고 반론을 제기하며 거절을 표했다. 그러나 공손홍이 삭방군을 남기되 창해군과 서남이 개척 사업을 폐기해달라고 청하자 무제가 이를 허락하였다. [8] 약 64석 [9] 문맥상 '멸하다'가 나올 자리가 결코 아니며, 보통 예(濊)의 오기로 본다( 참고). [원주] 복건이 말하길, "예맥은 진한의 북쪽, 고구려와 옥저의 남쪽에 있으며, 동쪽으로는 대해에 이른다."라고 했다. 진작이 말하길, "예(薉, 본문의 글자)는 예(穢)의 옛 글자이다."라고 했다. 안사고가 말하길, "남려는 예의 군주 이름이다."라고 했다.
服虔曰: 「穢貊在辰韓之北, 高句麗·沃沮之南, 東窮于大海.」 晉灼曰: 「薉, 古穢字.」 師古曰: 「南閭者, 薉君之名.」
[11] 주석을 작성한 인물 중 예맥의 위치를 제시한 복건은 후한 말기의 인물이다. 여기서 복건이 말한 예맥은 기원전 2세기에 남려가 귀순할때 이끈 집단이 아니라 후대에 확립 된 동예와 착각했다는 견해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