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7-19 08:51:22

창해군(인물)



倉海君
생몰년도 미상


1. 개요2. 정체에 관한 추측3. 기타4. 매체에서 등장

1. 개요

장량은 일찍이 회양(淮陽)에서 예(禮)를 배웠는데, 동방으로 가서 창해군(倉海君)을 만나 역사(力士)를 얻고 120근 나가는 철퇴를 만들었다.
진나라 황제(진시황)가 동쪽으로 순시를 나왔을 때 장량과 자객은 진시황을 박랑사(博浪沙)에서 저격했으나 잘못하여 뒤따르는 수레를 맞추었다. 진시황은 크게 화가 나서 천하를 대대적으로 수색하며 자객을 아주 급하게 찾았는데 장량 때문이었다. 이에 장량은 이름과 성을 바꾸고 도망쳐 하비(下邳)에 숨었다.
사기 권55 유후세가

사마천의 사기 유후세가에 등장하는 인물로, 장량(전한)에게 창해 역사를 소개시켜주었다.

창해 역사에게 120근의 철퇴를 만든 장량은 진시황이 순시를 나왔을 때 박랑사에서 암살을 기도했으나 실패하고 하비로 도주했다.

2. 정체에 관한 추측

  • 육조시대 학자 배향은 사기집해(史記集解)에서 후일 이름이 비슷한 창해군이 한무제 때 설치되었던 점을 근거로 창해군이 동이의 군장이 아닌가 추정했다.
  • 당나라의 학자 사마정은 사기에 대한 주석 및 해설서인 사기색은(史記索隱)에서 창해군을 예맥의 군장이었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 진시황 암살시도에 가담한 점을 볼 때 장량처럼 진나라에 멸망한 육국 출신 협객이거나 유민일 가능성도 있다.[1]

3. 기타

  • 청나라 말기의 시인, 교육가인 구봉갑(1864~1912)의 호 중 하나가 창해군(倉海君)이다.

4. 매체에서 등장

  • 이문열 초한지에서는 중국 동해안에서 다수의 역사들을 거느린 협객으로 묘사된다.
  • 문정후 초한지에서는 창해 역사가 고조선 출신의 인물로 설정되었고, 순오지의 여씨 용사 전승을 반영했는지 여흥이라는 이름으로 나왔다. 단, 창해군이 창해 역사를 소개시켜주는 장면은 생략되었다.

[1] 초한쟁패기 때 활동하면서 파군(番君)이라 칭한 오예, 민군(閩君)으로 불린 동구왕 요(搖)처럼 일정 세력을 거느렸을 가능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