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쩐흥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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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Tran_Hung_Dao_statue.jpg
시호 인무(Nhân Vũ, 仁武)
작위 흥도왕(Hưng Đạo Vương, 興道王)
쩐(Trần, 陳,진)
꾸옥뚜언(Quốc Tuấn, 國峻,국준)
생몰 1228년 ~ 1300년
1. 소개2. 생애3. 사후 영향4. 대중매체에서5.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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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唐之郭子儀,陳之陳國峻有焉。
당나라에는 곽자의가, 쩐 왕조에는 쩐꾸옥뚜언이 있었다네.
후 레 왕조 초기 성종의 치세때 편찬된《 대월사기전서
대월 제국( 베트남) 쩐 왕조(陳朝)의 명장.

본명은 쩐꾸옥뚜언(陳國峻, 진국준)으로 쩐흥다오라는 호칭은 그의 작위인 흥다오브엉(흥도왕)에서 따온 것이다. 즉 한국식 한자 독음은 진흥도이다.

13세기 전세계를 호령하던 몽골 제국의 대규모 침공을 막아낸 구국의 영웅이었다. '쩐흥다오'라는 이름은 한국으로 치면 이순신 장군을 '이충무공'이라고 부르는 것과 비슷한 용법이다.[1]

2. 생애

대월 제국 쩐 왕조의 초대 황제 태종(太宗, 타이똥)의 조카였는데, 그 족보가 심히 막장스러웠다. 쩐 태종은 지난 왕조인 리 왕조의 마지막 여제였던 리 소황과 어린 시절에 혼인했으나 슬하에 자녀가 없어, 태종과 그 형 쩐리에우(陳柳, 진류)의 숙부이자 권신이었던 쩐투도는 이미 태종의 형과 혼인했던 리 소황의 언니인 순천공주 리씨를 강제로 이혼시킨 뒤, 태종과 재혼시켰다. 이미 쩐리에우와 순천공주 리씨 사이에는 여러 명의 자녀가 있었고, 쩐흥다오도 그들 중 한 명이었다. 쩐 왕조는 순천공주, 즉 순천황후 리씨와 태종 사이에 태어난 아들인 성종이 이어 나갔는데 이 사람은 쩐흥다오의 사촌이기도 하고, 이부형제이기도 한 심히 복잡한 족보였다.

여담으로 쩐리에우는 자신의 아내인 리씨를 다른 사람도 아닌 동생에게 강제로 빼앗기자 격노하여 태종에 대한 반란을 일으켰다. 태종은 형이 반란군을 이끌며 공격하자 수도를 떠나 안자산(安子山)에 잠시 머물렀다. 이후 쩐리에우의 반란이 진압되자 쩐투도가 태종을 호위하며 다시 황궁으로 돌아왔다. 결국 힘에 부친 쩐리에우가 어부로 가장한 뒤, 배를 타고 동생인 태종을 찾아 항복하자 형제가 서로 눈물을 흘렸고, 격노한 쩐투도가 칼을 빼 들어 형 쩐리에우를 죽이려 하자 태종이 쩐투도를 막고 형과 화해한 다음, 형에게 봉국을 하사하고, 그를 '안생왕'(安生王)으로 봉했다.

쩐리에우의 아들 쩐흥다오는 1257년 원나라의 제1차 침공 때 대월의 북방을 굳게 지켜 공을 세웠다. 우량카다이 휘하 몽골군의 진격에 맞서 대월군은 후퇴하면서 건물과 다리 그리고 도로를 파괴했고, 몽골군의 식량이 될 수 있는 모든 것들을 불태웠다.(청야작전) 그렇게 몽골군을 지치게 만든 다음 반격을 가해 몽골군을 퇴각시켰다.

이후 원나라의 초대 황제이자 몽골 제국의 제5대 대칸이었던 쿠빌라이 칸의 명령으로, 500,000명에 달하는 대군을 이끌며 대월에 재침공한( 1284년 ~ 1285년) 진남왕 토곤에 의해 수도 탕롱[2]이 함락되자 태상황인 성종[3]까지 항복을 고려했다. 상대가 상대인 데다가 이미 수도까지 털려버려 답이 보이지 않는 절망적인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그러자 쩐흥다오는 《격장사》(檄將士)라는 유명한 글을 써 장수와 병졸들에게 쩐 왕조의 위급을 호소했고, 항복할지 항전할지를 망설이는 성종에게는[4]
"우선 신의 목부터 베고, 항복하소서."
(先斷臣首然後降)
라고 간언하여 이에 감동한 성종이 항전을 결심했다고 한다. 존망의 순간 쩐흥다오는 무려 250,000명에 달하는 장정을 모집할 수 있었다.

다음은 《격장사》의 발췌문이다.
今余明告汝等. 當以措火積薪為危, 當以懲羹吹虀為戒. 訓練士卒習爾弓矢, 使人人逄蒙家家后羿. 購必烈之頭於闕下, 朽雲南之肉於杲街, 不唯余之采邑永為青氈, 而汝等之俸祿亦終身之受賜. 不唯余之家小安床褥, 而汝等之妻拏亦百年之佳老.
이제 나는 그대들에게 분명히 말한다. 마땅히 장작더미 밑에 불을 놓아둔 위기로 여겨야 하고, 뜨거운 국물에 데어본 사람이 찬 나물도 불면서 먹듯이 경계해야 한다. 사졸들을 훈련시키고, 활쏘기를 연습시켜서 모두가 봉몽(逢蒙)[5]이나 후예 같은 명사수가 되도록 해야 한다. 필렬(必烈)의 머리를 대궐 아래 매달고, 운남왕(雲南王)[6]의 살점을 고가(藁街)에서 썩게 해야 한다.[7] (그렇게 된다면) 나의 채읍(식읍)이 길이 전해질 뿐 아니라 그대들의 봉록 또한 종신토록 주어질 것이다. 나의 권속(眷屬)들이 편안한 잠자리를 얻게 될 뿐만 아니라 그대들의 처자식 또한 평생을 함께 할 것이다.
최귀묵, 《베트남 문학의 이해》, 2010 에서 재인용.
하지만 쩐흥다오는 현명하게도 이 병력만으로 전면전을 시도하기보다는 청야전술 게릴라 전술로 일관하며 원나라의 수십만 원정군을 괴롭혔다. 대월도 군마가 부족해서 고려 송나라처럼 보병 중심의 군대였고, 기병 중심의 원나라군과 정면 대결하면 불리했기 때문에 이런 전술이 가장 현명한 방법이었다. 밀림이 많아 보병 중심의 전술을 펼쳐야 했던 홈 그라운드의 이점을 제대로 살린 셈이었다. 이런 전술이 원나라군 입장에선 정말 지옥이었던 것이, 정글이라 덥고 습한 데다가[8] 각종 독충에, 맹수들이 우글거리며 병사들을 괴롭히는 것이 패시브로 들어가는데 거기에 대월군이 1~20,000명도 아니고 250,000명이나 되는 대규모 병력으로 게릴라전을 걸어오니, 사방팔방에서 찌르는 전술에 정신적으로 정말 극한까지 몰렸을 것이다. 결국 원나라군은 결국 풍토병의 유행과 식량 부족으로 철수했다. 현대의 프랑스군, 미군, 중국 인민해방군도 베트남의 지독한 기후와 풍토병, 독충, 맹수들 때문에 지옥을 맛보아야 했다.

당시 대월의 군인들은 팔꿈치에 살달[9]이라는 글까지 새겨 가면서 치열하게 저항했다고 한다. 참고로 고려에서도 당시 몽골을 얕잡아 부르는 이름으로 '달단'(韃靼)이라고 했으며 기록에는 '달적'(達賊)으로도 나온다.

그 뒤 원나라가 토곤을 총사령관으로 다시 삼은 후, 세 번째로 침공( 1287년 ~ 1288년)했다. 이에 쩐흥다오는 강폭은 매우 넓지만 도처에 얕은 여울이 있고, 조수간만의 차가 매우 크기 때문에 함선의 운행이 자유롭지 못한 지역인 바익당 강[10]을 최후의 전장으로 삼았다. 이곳은 938년 남한 침략을 격파하고, 981년 북송의 침략도 격파한 유서깊은 전장이었다. 쩐흥다오는 강바닥에 말뚝을 박은 후, 만조(滿潮) 때 원나라의 수군을 상류로 유인했다. 그리고는 간조(干潮) 때 말뚝에 걸려 움직임이 멈춰버린 원나라의 군선들을 사방에서 공격하여 전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히고, 패퇴시켰다.
파일:external/1.bp.blogspot.com/yuanship.jpg
당시 모습을 묘사한 오스프리 삽화. 오스프리치곤 고증이 좀 부족하다. 베트남 선박을 같은 책의 캄보디아 선박 형태로 고증했다. 중국 선박은 고증이 잘 된 편이다.
파일:external/freedomforvietnam.files.wordpress.com/1411952168_ba2b1a751e_o.jpg
바익당 강 전투를 묘사한 현대의 그림
참고로 원세조 쿠빌라이 칸이 단행한 대월 원정의 주축은 세간에 알려진 "몽골"이라는 이름과 달리 한족, 특히 남송의 항장 및 항군이 주력이었다. 애초 원나라에서 수군은 전부 한족들로 이루어진 부대가 운용했고, 이는 후대의 청나라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내몽골이나 만주의 황무지에서 뛰놀던 유목민족들보단 바다를 맞닿으며 살아 온 남방의 한족들이 바다를 더 잘 알아서였다. 두 차례에 걸친 일본 원정도 고려를 제외한 원나라군의 구성원이 거의 90%는 한족 부대였고, 거란족과 여진족의 혼성부대가 그 다음이었다. 고려 원정 역시 마찬가지였다. 애초에 몽골 제국에서 몽골인이라는 것은 하나의 큰 민족단위가 아니라 그냥 황족 및 귀족이라 이해해도 과언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몽골 자체가 소규모 부족에서 출발해 몽골계 및 튀르크계 부족들을 흡수하며 불어난 개념이었니까. 몽골 제국에서 몽골인은 곧 귀족이라는 말과 같았다.

제3차 침략까지 물리치기는 했으나 쩐 인종은 몽골이 포기하지 않을 경우, 장기적으로는 대월의 역량이 고갈될 수밖에 없다고 판단한 후, 화친을 위해서 원나라에게 조공을 바치고, 원나라군 포로들을 되돌려 보내면서 원나라를 상국으로 받들겠다고 제안했다. 하지만 완전한 대월의 정복을 집착에 가까울 정도로 원하던 쿠빌라이 칸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제4차 원정을 준비하게 했으나, 도중에 붕어하면서 원나라는 내부 사정이 좋지 못해 대월 정벌을 완전히 포기하게 되었다.

대월, 즉 베트남은 세계 역사상 몽골 제국을 구성한 나라의 원정군을 격퇴한 몇 안 되는 나라 중의 하나가 되었다. 물론 당시 베트남은 이미 오래 전부터 한족 왕조에 대항해 치열한 독립투쟁을 펼쳤고, 또한 남쪽의 참파(점성) 등 여러 동남아시아 국가들과 대결했기 때문에 군사력이 강력하긴 했다. 참파도 몽골이 공격했을 땐 같이 골머리를 앓았기에 참파의 왕 인드라바르만 5세는 감정을 접는 데 합의하고 쩐 왕조 대월과 손을 잡은 뒤 함께 몽골의 침공에 저항했다. 인드라바르만 5세는 몽골이 물러난 뒤에도 평화를 유지하려 했으나 얼마 못 가 급사했고, 그의 아들인 째먼(Chế Mân)이 참파의 왕위에 올라 베트남에게 통수를 갈겼다가 결국 자멸했다.

당시 몽골 제국은 베트남보다 더 강력했던 금나라 호라즘 제국 등을 이미 멸망시킨 당대 세계 최강의 군사력을 자랑했는데 베트남이 이 몽골을 세 차례나 물리친 것은 놀라운 업적이었다. 결국 베트남인들이 중국을 물리친 사례에 몽골 제국도 추가되어 버렸다. 당나라- 송나라- 원나라- 명나라- 청나라 순으로 중화제국의 대군을 한족, 몽골인, 만주족 불문 격파한 베트남의 전공은 1979년 중국-베트남 전쟁에서의 승리로 마무리되었고, 이후의 중국은 다시는 베트남을 쳐들어오지 못하고 있다.

쩐흥다오는 전쟁이 끝나자 그 공으로 흥도왕에 봉해졌으며, 성종 이후로 인종과 영종( 1276년~ 1320년)을 보좌하다가 1300년에 사망했다. 죽기 직전 영종에게 다음과 같은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군대는 가족처럼 단결시키고, 백성을 너그럽게 대하여 그 힘으로 대업을 이루십시오."

3. 사후 영향

시호를 인무(仁武)라고 했다. 또한 '대왕'으로 신격화되어 기일마다 대대적인 제사가 행해졌다. 저서에 《병서요략》(兵書要略), 《만겁종비전서》(萬劫宗秘傳書) 등이 있는데, 모두 병법가로서의 면모를 보여준다. 《병서요략》은 몽골의 제2차 침략을 막을 때, 베트남의 지리에 맞는 함정 설치법·유인책· 게릴라 전법을 정리한 것으로, 이를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어 베트남인 스스로 적과 싸울 수 있도록 했다. 또한 이 책은 훗날 베트남 전쟁에서 미군을 상대하는 베트민 베트콩의 기본 전략서로 활용되었다. 전투종족 베트남인의 근성은 중세부터 갈고 닦아 현대까지 내려온 것이다.

지금까지도 베트남에선 쩐흥다오를 기리는 제사가 행해지고 있으며, 베트남 전쟁 시기에는 남·북 가릴 것 없이 쩐흥다오를 자신들의 이미지로 삼으려 했다. 북베트남 입장에선 미군 원나라 청나라 같은 오랑캐로 규정해 쩐흥다오를 본받아 그들을 몽땅 까부수자는 목적이었고, 남베트남 입장에서도 베트민·베트콩을 오랑캐로 규정하는 식이었다.[11]

현재는 베트남 정부가 원나라의 제3차 침공을 물리친 하이퐁시의 바익당 강(Bạch Đằng Giang)에 전쟁승리유적공원을 만들어 수많은 하이퐁시를 대표하는 역사관광단지로 조성했으며, 이곳을 통해 여행후기를 볼 수 있다. 수도인 호찌민시에는 쩐흥다오 거리도 있다.

4. 대중매체에서

4.1. 게임

4.1.1. < 징기스칸 4>

코에이의 게임인 < 징기스칸 4>에서는 시나리오 2에서 등장한다. 이 게임에서 전체적으로 암울한 베트남 출신 무장들 중 최강의 사기 캐릭터이다. 구국의 영웅이라는 평가에 걸맞은 능력치와 특기를 자랑하는데, 정치 55, 전투 88 지모 74에 특기는 돌격·연사·복병이다. 특히 전투력은 시나리오2에서 전체 랭킹 6위다. 그런데 몽골하고 한 번도 싸운 적이 없는 완전 국내용 장수였던 미나모토노 요시츠네가 전투 95, 지모 75로 뻥튀기된 걸 생각하면 다소 불만스럽다. 쩐흥다오를 잘 이용하면 옆에 있는 위에 있는 남송도 거뜬히 집어삼키는 것이 가능하며, 미얀마의 파간 왕조 정도는 아예 혼자서 정리할 수 있다.

그런데 쩐흥다오가 왕족임에도 불구하고, 왕족이 아니라고 되어 있는 고증오류 겸 단점이 있다. 위에 나와 있지만 숙부인 태종이 베트남 쩐 왕조의 초대 황제였다. 후계 구도가 꼬였다면 엄연히 황제가 될 수도 있는 신분이었다.

이 게임에서 왕족은 병사 상한치가 부대 당 1,000[12]으로 되어 있다. 대신 사위로 만들면 상한치가 800[13]이 되니 그쪽을 이용해도 된다. 이 부분은 고증오류가 아니라 <징기스칸 4>의 시스템적인 특징이다. <징기스칸 4>의 '왕족'은 아무 장수에게나 임의로 붙이는 것이 아니라, 그 세력의 군주를 기준으로, 군주의 자식들이 '왕족', 군주의 형제들이 '친척'으로 분류되는 것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아버지 데이터를 비교해서 군주를 아버지로 둔 장수가 왕족, 군주와 같은 아버지를 둔 장수가 친척이 되고, 군주를 아버지로 둔 공주와 결혼한 장수는 사위가 되지만... 조카나 사촌은 친척으로 표시되지 않는 것이다. 애초에 할아버지 데이터가 없으면, 3촌 이상의 친척관계는 따질 수도 없다. 즉, 왕의 조카면 <징기스칸 4>의 시스템상, 왕족이나 친척이 아닌 것이 맞다.

4.1.2. < 도미네이션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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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3. < 푸른 늑대와 흰 사슴: 원조비사>

진흥도라는 이름으로 등장한다.

4.2. 소설

4.2.1. 전생검신

진국준이라는 무아이보란 무술의 고수로 등장한다.

5. 여담

한국 인터넷 커뮤니티에서는 쩐흥다오에 대한 설명을 하는 글이 게시될 경우, 개쩐다오, 개쩐흥다오 등의 드립이 나오곤 한다. 세계를 제패했던 몽골군을 3번이나 격퇴한 경이로운 업적과 엮어 드립으로 쓰기 너무 적절한 이름이기 때문이다. 보통은 한국의 성웅 이순신과 많이 비교된다.


[1] 이름 대신 호로 칭하는 것은 한석봉, 이율곡과 같이 조선에서도 흔했다. [2] 昇龍, 지금의 하노이. [3] 聖宗, 1240년~ 1290년, 재위 1258년~ 1278년 [4] 유인선 교수가 2002년에 편찬한 《새로 쓴 베트남의 역사》에서는 해당 인물이 당시 황제였던 인종으로 잘못 기술되어 있다. 2018년 개정판인 《베트남의 역사 (고대에서 현대까지)》에서는 해당 내용이 삭제되었다. [5] 중국 신화에 나오는 명사수. [6] 당시 베트남 원정군의 총대장이 쿠빌라이 칸의 9남 토곤(脫歡)이었기 때문에 그를 말한 것인데, 정작 토곤의 작위는 진남왕(鎭男王)이었다. 운남왕에 봉해진 것은 토곤의 동복 형인 우게치(忽哥赤)였다. 여담으로 토곤의 손자인 바이바이(佰伯)나 우게치의 현손자인 바자르오르미(把匝剌瓦爾密)는 명나라에 항복한 뒤 태조 홍무제 주원장에 의해 가족들 모두 고려 제주도로 옮겨졌다. [7] 고가는 한나라의 수도 장안의 남문에 있었던 거리인데 죄인의 목을 베어 효수하는 곳이었다. 즉 '토곤을 썰어죽이자'는 뜻이었다. [8] 몽골군의 주력 무기인 각궁류의 합성궁은 고온다습한 환경에 노출되면 아교가 녹아서 활을 쏠 수 없었다. 반대로 대월군은 현지의 흔한 재료인 대나무 활을 사용했을 것이다. [9] 殺韃, 달단을 죽이자. [10] 白藤江, 백등강. 현재의 송코이 혹은 홍하 [11] 박정희 시절 이순신을 내세운 것과 비슷하다고 보면 된다. 박정희 또한 이순신이나 유관순, 윤봉길, 김좌진, 김구 등의 인물을 내세우면서, 애국 및 반공의식을 고취시키고자 했다. 즉, 남베트남도 쩐흥다오나 레러이 같은 베트남 역사에서 외세를 무찌른 인물들을 내세우면서, 당시 치르고 있었던 전쟁에서 남베트남 정권에 정당성을 부여하고자 했던 것이다. [12] 장수 한 명이 이끄는 부대는 총 다섯 부대이므로, 전체 부대의 상한은 5,000이다. [13] 마찬가지로 전체 부대의 상한은 4,000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