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임한 직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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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국 제63대 우정대신 | |
일본국 제37-43대 중의원 의원
지미 쇼자부로 自見庄三郎 | Jimi Shōzabur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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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808080> 출생 | 1945년 11월 5일([age(1945-11-05)]세) |
후쿠오카현 코쿠라시(현 키타큐슈시 코쿠라키타구) | |
학력 | 규슈대학 의학부 졸업 |
배우자 | 지미 레이코 |
자녀 | 차녀 지미 하나코 |
인척 |
사위
하시모토 가쿠 사돈 하시모토 류타로 |
의원 선수 |
8 (중) 1 (참) |
의원 대수 |
37, 38, 39, 40, 41, 42, 43 (중) 21-22 (참) |
당적 |
[[무소속(정치)| 무소속 ]]
|
약력 |
하버드 대학교 공중 위생학부 주임 연구원 규슈대학 의학부 강사 제63대 우정대신 국민신당 부대표 국민신당 간사장 국민신당 정책심의회장 내각부 특명담당대신(금융담당) 우정개혁 담당 장관 우정민영화 담당대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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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일본의 전 정치인이다.2. 생애
1945년 일본 후쿠오카현 코쿠라시 (현 코쿠라키타구 지역)에서 태어났다. 코쿠라 시립 소학교 - 후쿠오카 학예대학 부속 중학교 - 후쿠오카 현립 코쿠라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큐슈대학 의학부에 입학했고, 재학 중인 1970년 6월 의사 국가 시험에 합격해 의사 자격증을 취득했다.[1]이후 규슈대학 의학부 제1내과에 들어가 유전학연구실 연구원으로 일했다. 1977년 동 대학 대학원에서 의학 박사 과정을 수료했고, 1980년 하버드 대학교에서 공중위생 학부의 주임연구원이 되었다. 1982년 일본으로 귀국한뒤 규슈대학 의학부의 강사로 취임했다.
1983년 제37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구 후쿠오카 4구에 자민당 공인 후보로 입후보해 첫 당선을 완수한다. 이후 1987년과 1992년 중의원 의사진행계[2]를 두차례 맡았고, 1997년 제2차 하시모토 개조내각에서 제63대 우정대신에 임명되며 첫 입각에 성공한다.
2005년 제44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의 우정민영화 정책에 반발해 무소속 후보로 후쿠오카 10구에 출마했으나 자민당이 공천한 여성 자객 후보인 니시카와 쿄코에 밀려 낙선, 이후 지미는 이당권고 처분을 받고 자민당을 떠났다.
2006년 10월 다음해 열린 참의원 선거에서 국정 복귀를 위해 가메이 시즈카, 와타누키 다미스케 등이 창당한 국민신당에 입당하였다. 그리고 2007년 제21회 일본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에서 비례대표 후보에 입후보한뒤 당선되었다. 이후 국민신당 부대표, 총무회장을 맡다가 2009년 가메이 히사오키[3]의 중의원 선거 낙선으로 국민신당 간사장에 취임했다.
2010년 간 내각에서 가메이 시즈카의 후임으로 내각부 특명담당대신(금융담당)직에 임명되었다. 그리고 우정개혁 담당대신직도 함께 담당하게 되었다. 간 제1차 개조내각과 간 제2차 개조내각에서도 유임되었다.
2011년 간 나오토 총리가 사임하자 그 직후 발족한 노다 내각에서 금융담당대신직에 재임되었다. 2012년 소비세 증세 정책 법안 통과 여부를 두고 가메이 시즈카 등의 인사가 반발하며 연정 탈퇴를 요구했으나, 지미는 국민신당 부대표 명의로 소비세 증세 법안 찬성안에 서명했다. 그러자 가메이 시즈카, 가메이 아키코를 포함한 연정 반대파가 국민신당을 탈당했고, 지미 쇼자부로가 국민신당 대표에 오르게 되었다.
2012년 내각 개조에 따라 금융담당대신직에서 물러났고, 그해 연말 제46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민주당과 국민신당이 대참패 하면서 지미의 정치인생도 위태로운 운명에 처했고, 2013년 자민당 가와무라 다케오 선거대책위원장과 회동을 가지며 자민당-국민신당 합당안을 내놓으며 자신도 자민당으로 복당하고 싶다는 뜻을 표명했다. 하지만 자민당 간사장인 이시바 시게루가 국민신당의 흡수합당과 지미의 복당에 거부의사를 표하며 합당 계획은 좌절되었다.
2013년 3월 21일 지미를 중심으로 한 의원총회에서 국민신당의 해당을 결정하면서 무소속 신분으로 남게 되었다. 같은해 제23회 일본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에서 불출마를 선언하며 공식적으로 정계에서 은퇴했다.
3. 소속 정당
소속 | 기간 | 비고 |
|
1983 - 2005 | 정계입문 |
[[무소속(정치)| 무소속 ]]
|
2005 - 2006 | 당내 의견 차이로 인한 탈당 |
|
2006 - 2013 | 입당 |
[[무소속(정치)| 무소속 ]]
|
2013 - |
정당해산 정계은퇴 |
4. 선거 이력
연도 | 선거 종류 | 지역구 | 소속 정당 | 득표수 (득표율) | 당선 여부 | 비고 |
1983 | 제37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구 후쿠오카 3구 |
|
85,242 (19.71%) | 당선 (4위) | 초선 |
1986 | 제38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100,591 (21.71%) | 당선 (1위) | 재선 | ||
1990 | 제39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83,183 (17.43%) | 당선 (2위) | 3선 | ||
1993 | 제40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85,652 (19.61%) | 4선[4] | |||
1996 | 제41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후쿠오카 10구 | 95,967 (43.90%) | 당선 (1위) | 5선 | |
2000 | 제42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88,446 (40.75%) | 6선 | |||
2003 | 제43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91,974 (45.20%) | 7선 | |||
2005 | 제44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무소속(정치)| 무소속 ]]
|
65,129 (25.55%) | 낙선 (2위) | ||
2007 | 제21회 일본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 | 비례대표 |
|
1,269,209 (2.15%) | 당선 (44위) | 초선 |
5. 여담
6. 둘러보기
하시모토·지미 가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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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시모토 가쿠 | 지미 하나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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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당시
전공투의 학원분쟁에 의해 졸업이 4개월 연기되어 1970년 7월에 대학을 졸업했다.
[2]
제출된 의사일정 관련 동의(動議)안을 본회의에서 읊어주는 역할. 설명 시작 전
ぎちょう~~!! 하며
크게 소리쳐 발언권을 얻는데, 이 모습이 워낙 인상적인지라 인지도를 높이기에도 유리해 거물 정치인으로 가는 지름길로 불린다.
모리 요시로,
기시다 후미오,
노다 세이코,
오부치 유코,
시모무라 하쿠분,
후쿠다 다쓰오와 같은 거물들이 이 의사진행계를 지냈다.
[3]
가메이 아키코의 부친.
[4]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의 마지막 중선거구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