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7-23 14:25:03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주석



1. 개요2. 법적근거
2.1. 7차 당대회 규약2.2. 8차 당대회 규약2.3. 9차 당대회 규약2.4. 11차 당대회 규약
3. 연혁4. 역대 주석5. 같이보기6. 여담7. 참고문헌

1. 개요

1945년부터 1982년까지 존재했던 중국공산당의 최고 수위 자리. 국가직인 중화인민공화국 주석( 국가주석)과 구별하여 당 주석( 중공중앙주석)이라고 불리었다. 오늘날의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총서기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으나 당헌상 직권이 훨씬 더 강력하였다.

2. 법적근거

2.1. 7차 당대회 규약

1945년 7대 당장
제3장 당의 중앙조직
제34조 당중앙위원회 전원회의는 중앙정치국과 중앙서기처를 선거하며 아울러 중앙위원회 주석 1인을 선거한다.
중앙정치국은 중앙위원회 전원회의 기간 전후에 당의 중앙지도기구이며 당의 공작 일체를 지도한다.
중앙서기처는 중앙정치국 결의 하에 중앙일상공작을 처리한다.
중앙위원회 주석은 중앙정치국 주석과 중앙서기처 주석을 겸한다.
중앙위원회는 공작의 수요에 따라 조직, 선전 등 부와 군사, 당보(党报) 등 위원회 및 기타 공작기관을 중앙의 해당하는 공작을 각기 처리하기 위해 중앙정치국, 중앙서기처 및 중앙주석의 지도감찰을 받아 설치할 수 있다.

2.2. 8차 당대회 규약

1956년 8대 당장
제3장 당의 중앙조직
제37조 당중앙위원회 전원회의는 중앙정치국, 중앙정치국 상무위원회와 중앙서기처를 선거하며, 당중앙위원회 주석 1인과 수인의 부주석 및 총서기 1인을 선거한다.
중앙정치국과 그 상무위원회는 중앙위원회 전원회의 폐회기간에 중앙위원회의 직권(职权)을 행사한다.
중앙서기처 서기는 중앙정치국과 그 상무위원회의 영도 하에 중앙일상공작을 처리한다.
중앙위원회 주석과 부주석은 동시에 중앙정치국 주석과 부주석이다.
필요한 시후(时候)가 있으면 중앙위원회는 중앙위원회 명예주석을 둘 수 있다.

2.3. 9차 당대회 규약

1969년 9대 당장
제4장 당의 중앙조직
제9조 당중앙위원회 전원회의는 중앙정치국, 중앙정치국 상무위원회, 중앙위원회 주석, 부주석의 산생(产生)을 의논한다.
당중앙위원회 전원회의는 중앙정치국 소개(召开)를 의논한다.
중앙정치국과 그 상무위원회는 중앙위원회 전원회의 폐회기간에 중앙위원회의 직권을 행사한다.
주석, 부주석과 중앙정치국 상무위원회의의 영도 하에 수개의 필요하고 정간(精干)한 기구를 설립하며, 당·정·군의 일상공작을 통일처리한다.

※10차 당대회에서 당장 변동 없음.

2.4. 11차 당대회 규약

1977년 11대 당장
제3장 당의 중앙조직
제16조 당중앙위원회 전원회의는 중앙정치국, 중앙정치국 상무위원회, 중앙위원회 주석, 부주석의 산생(产生)을 의논한다.
당중앙위원회 전원회의는 중앙정치국 소개(召开)를 의논한다.
중앙정치국과 그 상무위원회는 중앙위원회 전원회의 폐회기간에 중앙위원회의 직권을 행사한다.

3. 연혁

대장정 중일전쟁에서의 생존, 연안정풍 등으로의 정적 숙청을 완료한 이후 당내에서 더 이상 범접할 수 없는 권위를 이룩한 마오쩌둥은 1943년 3월 20일 정치국 회의에서 <중앙기구 조정 및 축소 결정>을 통과시켜 서기처를 실질적인 최고 권력기구로 부상시켰으며 정치국 주석 겸 서기처 주석에 선출되어 당의 최후 정책 결정권을 가지는 등 막강한 권위를 자랑하였다.

1945년, 7차 당대회에서 마오쩌둥 사상을 당장에 삽입하는 한편, 중앙위원회 주석 직함을 신설, 정치국 주석과 서기처 주석을 겸임하는 막강한 권력을 가지게 되었다. 비록 1943년에 명시되었던 최후 정책 결정권은 없었으나 실질적으로 가지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던 중 1956년 2월, 소련공산당 20차 당대회에서 니키타 흐루쇼프 이오시프 스탈린을 격하하자 마오쩌둥은 충격을 받고 이를 상쇄하기 위해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부주석 직함을 신설하는 한편, 마오쩌둥 사상을 당장에서 삭제하고 정치국을 중심으로 하는 집단지도체제를 도입하였다. 그리고 서기처 주석을 총서기로 대체하여 덩샤오핑[1]이 맡게 하고 어느 정도 권력분산을 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것이 마오쩌둥의 권위 후퇴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으며 마오쩌둥은 다른 지도자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당상황제'의 지위를 만끽하였다. 마오쩌둥은 수도 베이징에 잘 머무르지도 않았으며, 정치국 회의에 참석하지 않고도 정치국 회의의 진행을 주무를 수 있었다. 마오쩌둥은 2선에서 물러나 영향력을 행사하고 1선에서 2선급 지도자들이 실무를 담당하는 이 체제를 1-2선 체제라고 부른다.

하지만 대약진 운동의 참혹한 실패 이후 당내에서 류사오치 등의 생각 외로 세게 자신에게 도전하자 마오쩌둥은 이를 처참하게 짓뭉개고 정치국을 무력화시킴으로 1-2선 체제는 붕괴된다. 이로써 1966년부터 중국을 10년간 뒤흔든 광풍 문화대혁명이 시작되었다. 1976년, 마오쩌둥이 죽은 후 주석 직함은 화궈펑이 차지하였으나 그도 덩샤오핑에게 밀려 실각하면서 후야오방이 최후의 주석이 된다. 그리고 1982년, 12차 당대회에서 중앙위원회 주석이 폐지되면서 중공중앙주석 직함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그러다가 1997년 15차 당대회에서 70세를 넘은 차오스, 류화칭 등 원로들을 은퇴시키려 했던 장쩌민은 만약에 원로들이 거세게 반발할 시에 당중앙위원회 주석 직함을 부활시켜 자신이 취임하고, 리펑을 부주석으로 삼는 방안을 고안했으나, 유일하게 생존한 원로 보이보의 조정으로 주석직을 부활하지 않는 것으로 끝났다. 시진핑 권력의 강화에 따라 2017년 19차 당대회에서 당주석 직함이 부활할 것이라는 관측도 있었으나 결국 현실화되진 않았다.

4. 역대 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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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공산당 당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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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대(제18-20차)
시진핑 }}}}}}}}}}}}}}}

대수 성명 임기 비고
임기시작 임기종료
1 마오쩌둥 1945년 6월 19일 1956년 9월 28일 7기 1중전회에서 선거
2 1956년 9월 28일 1969년 4월 28일 8기 1중전회에서 재선
3 1969년 4월 28일 1973년 8월 30일 9기 1중전회에서 재선
4 1973년 8월 30일 1976년 9월 9일 10기 1중전회에서 재선, 임기 중 사망.
5 화궈펑 1976년 10월 6일 1977년 8월 19일 긴급 정치국회의에서 선출, 10기 3중전회에서 비준.
6 1977년 8월 19일 1981년 6월 29일 11기 1중전회에서 재선, 부주석으로 강등.
7 후야오방 1981년 6월 29일 1982년 9월 11일 11기 6중전회에서 선거, 12차 당대회에서 직함 폐지.

5. 같이보기

6. 여담

  • 이름만 들어서는 사무총장, 간사장 정도에 해당하는 서기장/총서기에 비해서 당중앙위원회 주석은 당중앙위원회 수반이라는 것이 너무 명백한 권위적인 직함이기 때문에 역사적으로 사용례가 흔치 않다. 아시아에서는 북한이 1966년 10월, 2차 당대표자회에서 총비서 직함을 도입하기 이전까지 당중앙위원회 위원장 직함을 사용했고, 베트남에선 호치민이 유일하게 당중앙위원회 주석으로 재임하다가 그가 죽은 후에 후임자들은 총비서로만 남았다. 유럽에서는 폴란드 통일노동당 중앙위원회 주석 직함이 존재했으나 소련의 압력으로 곧 폐지되고 제1서기로 대체되었다.

7. 참고문헌

  • 김정계, 중국공산당 100년사 1921~2021(서울: 역락, 2021).
  • 조영남, 「중국 마오쩌둥 시대의 엘리트 정치: ‘일인지배’의 사례」 『중소연구』 43(2) (2019.8).
  • 张静如, 中国共产党历届代表大会:一大到十八大(中)(河北人民出版社, 2012).
  • 本书编委会编, 中国共产党历次党章汇编(1921 ~ 2012) (北京: 中国方正出版社, 2012)

[1] 당시 중국 지도자들 중에서 당-군-정 모두에서 덩샤오핑보다 더 강한 영향력을 가진 사람은 마오쩌둥 단 한 명이었다. 나머지 사람들은 특정 분야에서의 영향력만을 가졌을 뿐이었다. 상무위원단 내 서열과 명망에서 보다 앞서는 류사오치가 국가주석으로서 명목상 서열 2위로 마오쩌둥의 후계자로 간주됐고, 당 주석인 마오와 총서기인 덩샤오핑 사이에는 부주석인 류사오치, 저우언라이, 주더, 천윈 그리고 루산회의 이후로는 린뱌오 등 6인의 부주석이 존재했으나 당이 모든 분야를 지도하는 중국에서 마오쩌둥을 대리해 당을 총괄한 덩샤오핑의 실제 위상은 류사오치, 저우언라이와 대등했다고 간주해도 무방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