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시대의 실패한 내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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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란 | 주도 세력 |
왕규의 난 | <colbgcolor=#ffffff,#670000> 왕규 | |
김훈 최질의 난 | 김훈, 최질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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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자겸, 척준경 암살 미수 사건 | 인종, 지녹연, 안보린 | |
이자겸의 난 | 이자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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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순부·김숭의 난 | 김순부, 김숭 | |
관성현·부성현 농민반란 | 관성현, 부성현 농민들 | |
관노비의 난 | 죽동 | |
조원정의 난 | 조원정 | |
동경민란 | 이의민 | |
김사미 효심의 난 | 김사미, 효심 | |
만적의 난 | 만적 | |
명주 민란 | 명주 농민들 | |
김준거·김준광의 난 | 김준거, 김준광 | |
금초의 난 | 금초 | |
진주민란 | 진주 노비들 | |
금주 잡족의 난 | 잡족인들 | |
밀성 관노들의 난 | 밀성 관노비들 | |
이비 패좌의 난 | 이비, 패좌 | |
경주 별초군의 난 | 경주지방 야별초군들 | |
신라부흥모의 | 동경 사람들 | |
수창궁 사변 | 희종 | |
최광수의 난 | 최광수 | |
제2차 개경승도의 난 | 개경 승도들 | |
이장대의 난 | 이장대 | |
한순·다지의 난 | 한순, 다지 | |
충주 노군의 난 | 충주 노군들 | |
이통의 난 | 이통 | |
홍복원 • 필현보의 난 | 홍복원, 필현보 | |
이연년 형제의 난 | 이연년 | |
안열의 난 | 안열 | |
애도·갈도 민란 | 애도, 갈도 백성들 | |
원진의 난 | 원진 | |
최탄의 난 | 최탄 | |
삼별초의 난 | 삼별초 | |
강윤명의 난 | 강윤명 | |
숭겸의 난 | 숭겸 | |
사용과 김성의 난 | 사용, 김성 | |
서울 관악산 농민 봉기 | 서울 관악산 농민들 | |
조일신의 난 | 조일신 | |
정세운 암살 사건 | 김용, 안우, 이방실 | |
흥왕사의 변 | 김용, 기황후 | |
합주 사노들의 난 | 합주 사노들 | |
김저의 난 | 김저 | |
참고: 고려시대의 정변 | }}}}}}}}} |
1. 개요
전주 관노비의 난 / 죽동의 난1182년 전주에서 군사들과 관노들이 일으킨 난이다.
괸노들이 일으켰으나 당시 지방관에 불만을 품고 있던 사람들도 참여 하며 규모가 커지기도 했다.
2. 상세
고려의 명종 12년, 전주의 지방관이었던 진대유(陳大有)는 자신은 강직하다고 백성들에게 가혹한 처벌을 내려 백성들을 고통스럽게 만들었다. 그러다가 나라에서 배를 만들어 보내달라 요청했을때 진대유는 상호장(上戶長) 이택민(李澤民)과 함께 백성들에게 일을 빨리 하라고 재촉하였다.그러자 주현군의 우두머리중 죽동 외 6명이 관노에 큰 불만을 가져 봉기를 일으켰다. 죽동은 진대유를 산에 있는 절로 쫒아냈고, 이택민 등 지방관들의 집에 불을 질렀고 판관 고효승(高孝升)을 협박하여 지방관을 바꾸었다.
일이 생긴것을 알아차린 안찰사는 박유보(朴惟甫) 파견시켰는데 박유보가 진주에 오자 관노들은 잠시 군세들 가담듬고 박유보에게 진대유의 만행을 말하였다.
박유보는 진대유를 개경으로 압송하고 반란군에게 멈추라고 하였으나 관도들은 듣지 않아 군대를 동원 했지만 40일째 제압을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관노들의 내부분열이 생겨 관노들끼리 서로를 죽여 알아서 제압된 것이다. 그 이후 남아있는 관노들도 모두 처형되어 이 봉기는 끝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