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0047a0> 출생 | 1878년- 1879년 |
사망 | 1957년 1월 28일(78세)[1] |
직업 | 변호사 |
상훈 | 건국훈장 독립장 추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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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주미외교위원부 법률고문과 한미협회 법률자문으로 미국 정부와 저명한 인사들을 대상으로 한국의 독립 지원, 대한민국 임시정부 승인을 위해 활동한 변호사. 1950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2. 생애
변호사였던 스태거즈는 1917년 약소민족대표회의에 한국대표로 참석한 이승만과 만나 교제하면서 한국의 독립을 지원하게 되었다. 1941년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대미 외교활동을 강화하기 위해 워싱턴에 주미외교위원부를 설치하였고 위원장으로 임명된 이승만은 스태거즈를 법률거문으로 위촉하였다. 1941년 12월 하순경부터는 제이 제롬 윌리엄스와 함께 미국 국무부 극동국의 솔즈베리를 면담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승인과 한국인의 전쟁 참여를 촉구하였다.[독립유공자공훈록]1942년 1월 9일 해리스, 윌리엄스 등과 함께 미국 국무장관에게 서한을 전달해 한국의 상황과 임시정부 승인을 적극적으로 검토해줄 것을 요청하였다. 1월 16일 이승만이 설립한 한미협회의 법률자문으로 부임하였고 2월 4일에는 해군부장관 프랭크 녹스에게도 한국의 독립과 항일무장투쟁의 필요성을 설파하는 편지를 보냈다. 이 시기 재미한족연합위원회의 상임 고문도 맡고 있었다. 그 해 3월 워싱턴 라파예트 호텔에서 한족연합위원회가 주최한 한인자유대회에서 한국의 독립운동을 지지하는 연설을 하였다.[독립유공자공훈록]
7월 1일 코델 헐 국무장관에게 임시정부에 대한 물질적 지원을 요구하기 위해 민간차원의 차관협상을 주미외교위원부가 할 수 있을지를 질의하였다. 7월 20일 답변 독촉 편지에서는 "“본인의 문의가 국무부에는 그다지 중요치 않게 보일지도 모르지만, 2,300만 한국인들에게는 매우 중요합니다. 한국인들은 작전지역에 있는 한국인들을 훈련시키고 조직화하기 위하여 물질적 지원을 찾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한국인들의 조직체는 일본을 패배시키기 위한 전쟁에서 미국정부를 위한 가장 유용한 단체가 될 것입니다”라고 코델 헐 장관에게 전하였다. 이러한 공로를 인정받아 9월 9일 임시정부 주석 김구와 한국독립당으로부터 감사 편지를 받았다.[독립유공자공훈록]
해방 후에도 존 스태거즈는 이승만과의 친교를 이어가며 그를 지원하고 미국 정부를 상대로 한 로비활동을 계속하였다. 스태거즈는 1946년 즈음에 아메리카 세계무역수출입상사를 설립해 사장으로 부임하였고 한국에 상품을 공급하는 미국 제조업체들과 수백 건의 독점계약을 맺고 한국의 많은 상품들을 미국과 다른 국가들에 수출하였다.[5] 주미한국대사관의 설치에도 기여했는데 자신이 소유하고 있던 컬럼비아 빌딩 3층에 임시공관을 내어주는 한편 주미한국대사관의 고문으로 활동하였다. 미국의 대한경제원조 법안의 처리 동향도 파악하고, 한국 공군의 훈련을 지도할 미국의 군사고문을 초빙하기 위해 로비를 하는 등 한국이 미국으로부터 지원을 받을 수 있도록 노력하였다.[6] 이승만의 지시에 따라서 한국이 미국에 진해 기지를 내주는 대가로 군사 원조를 요청하였고 이에 따라 대한민국 해군 최초의 전투함인 백두산함을 미국으로부터 지원받았다.[7] 독립운동 지원과 대미로비 활동의 기여를 인정받아 이승만에 의해 1953년에 한국으로 초대되기도 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려 1950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