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9-23 14:15:42

조세핀 베이커

<colbgcolor=#ddd,#000><colcolor=#000,#ddd> 조세핀 베이커
Josephine Baker
파일:Josephine Baker.jpg
본명 프리더 조세핀 먹다널드
Freda Josephine McDonald
출생 1906년 6월 3일
미국 미주리주 세인트루이스
사망 1975년 4월 12일 (향년 68세)
프랑스 파리
국적
[[미국|
파일:미국 국기.svg
미국
]][[틀:국기|
파일: 특별행정구기.svg
행정구
]][[틀:국기|
파일: 기.svg
속령
]](1906~1937)
파일:프랑스 국기(1794-1815, 1830-1958).svg 프랑스 제3공화국(1937~1940)
파일:나치 독일 국기.svg 프랑스 군정청(1940~1944)
파일:프랑스 국기(1794-1815, 1830-1958).svg 프랑스 공화국 임시정부(1944~1946)
파일:프랑스 국기(1794-1815, 1830-1958).svg 프랑스 제4공화국(1946~1958)

[[프랑스|
파일:프랑스 국기.svg
프랑스
]][[틀:국기|
파일: 특별행정구기.svg
행정구
]][[틀:국기|
파일: 기.svg
속령
]](1958~1975)
직업 가수, 댄서, 배우, 인권운동가, 레지스탕스
활동 기간 1921년 ~ 1975년
종교 가톨릭
묘소 팡테옹 (2021년 안장)[1]

1. 개요2. 생애3. 사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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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국에서 출생하여 프랑스에서 활동한 가수, 배우, 댄서, 레지스탕스, 인권운동가.

2. 생애

세인트루이스에서 스페인인 아버지와 흑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빈곤의 밑바닥에서 자라 8세 때부터 춤을 추기 시작하였다.

1925년에 파리에서 찰스턴을 추어 센세이션을 일으켰으며, 1930년에 '카지노 드 파리'의 레뷰에서 <두 사랑> 등을 부르면서 크게 성공하였다.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비밀리에 레지스탕스에 가입하여 스파이로 활약했다. 링크 대외적으로는 여전히 무용수로 활동하던 그녀는 대사관 외교파티에서 들은 중요한 내용을 손바닥과 팔에 메모해두었다가 악보를 이용해 메시지를 전달하는 첩보활동을 펼쳤다.
이러한 공로로 종전 후에는 레지스탕스 메달 무공십자훈장을 받았으며, 드골 대통령으로부터 레종 도뇌르 훈장을 받았다.
1956년 오랑피아 극장에서 은퇴공연을 했으나 3년후 다시 이 극장의 레뷰에서 롱런에 성공, 무대에 복귀했다.

조세핀은 1941년 아이를 유산한 후 자궁을 들어내야 해서 더 이상 임신할 수 없는 몸이 되었고[2], 남편과 상의하여 총 12명의 고아를 입양했다. 백인, 흑인, 아시안, 인디언, 아랍인, 유대인 등이 어우러진 이 아이들을 조세핀은 ‘무지개 대가족’이라고 불렀다. 그중에는 한국 전쟁 고아도 있었다고 한다.[3]

1968년 그녀는 채무를 갚지 못한 까닭에 본인의 성을 잃었는데, 양자녀와 동물의 양육비 때문이었다. 당시 그녀가 소유했던 성은 사실상 고아원 겸 동물원으로 쓰였으므로 운영에 엄청난 자금이 들었고, 이 문제로 갈등하여 남편과도 이혼하게 되었다. 링크 다행히도 당시 모나코의 공비였던 그레이스 켈리가 모나코 주변의 로크브륀느에 위치한 아파트를 주면서 그녀를 도와주었다.

1975년 뇌출혈을 앓던 도중 혼수상태에 빠져 누워 있다가 병원으로 이송되었으나 결국 사망하였다.

3. 사후

레지스탕스 활동 등의 업적을 인정받아 2021년에는 흑인 여성 최초로 팡테옹에 안장되는 영광을 얻었다.

2024년부터 새 프랑스 20센트 주화에 들어가게 되었다.

[1] 다만 실제 그녀의 유해는 모나코 몬테카를로 묘지에 그대로 있으며 팡테옹에는 유해 없이 안장되었다. [2] 'Josephine Baker in Art and Life'라는 전기에 언급된 내용이라고 한다. [3] 아키오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이 동양인은 한국에서 태어났으나 일본의 고아원에서 돌봄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일본식 이름으로 불렸다. 하지만 조세핀은 원래 한국인 고아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아키오도 자신에게 한국인의 피가 흐른다는 것을 알았다고 한다. 조세핀 사후 입양자들의 삶을 추적한 슈피겔 기사에 따르면 아키오가 다른 형제들을 이어 주는 가교 역할을 했다. 링크 기사에 따르면 조세핀과 입양자들 사이에서는 조세핀의 엄격한 양육 방식 때문에 애증이 있었다. 그중 핀란드 출신 Jarry는 어려서부터 자신이 동성애자임을 자각했는데, 성소수자를 받아들이지 못하던 당시 사회 분위기 때문에 15살에 집안에서 쫒겨나 양아버지와 함께 아르헨티나에서 살았다. 다만 Jarry의 경우는 원래 부모 형제가 다 있었으나 가난 때문에 조세핀이 입양해 준 것이라서 나중에 친부모, 친형제와 연락이 닿아 정서적으로 안정적인 삶을 살 수 있게 되었고 자신을 쫒아낸 조세핀도 용서했다고 밝혔다. 한편 정식 입양자는 아니지만 나중에 조세핀의 성을 따 개명한 뉴욕의 레스토랑 사업가 장 클로드 베이커의 경우, 가난 때문에 가족과 생이별한 케이스였는데, 그 또한 조세핀과 갈등이 있었지만 그녀의 이름을 딴 클럽을 열고, 생전 조세핀의 면모를 입체적으로 기록한 자서전을 펴내 나름의 방식으로 조세핀을 추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