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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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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3. 대중매체4. 관련 문서

1. 개요

파일:조반 초상.jpg
趙胖
(1341 ~ 1401)

여말선초의 인물로, 조선 개국공신. 조세경의 아들, 조서로[1], 조서강, 조서안의 아버지.

종교는 불교로 독실한 불자(佛敎)였다.[2]

본관은 배천, 배천 조씨 14세 중시조.

2. 생애

풍해도 배주 사람으로 12세에 북경으로 들어가 사촌 누나의 남편인 단편장의 집에 있으면서 한문, 몽골의 글자와 말을 배웠으며, 톡토 테무르가 그를 보고 기이하게 여겨 중서성의 역사로 불러 썼다. 1368년에 부모님이 늙어 고려로 돌아갔으며, 1385년에 공민왕의 시호, 승습을 정하기 위해 전리판서가 되어 개경으로 향했다.

밀직부사로 임명되었다가 1387년 12월에 염흥방 집안의 종인 이광에게 토지를 빼앗기자 염흥방에게 애걸해 토지를 돌려받았지만 이광이 다시 빼앗으며, 조반이 이광에게 찾아가 돌려줄 것을 요청했지만 이광이 방자하고 포학하게 행동하자 분노해 수십 기로 이광을 포위하여 그를 죽인 뒤 이광의 집을 불태우고 말을 달려 염흥방에게 알리려고 했다.

조반은 염흥방으로부터 반란을 꾀한다고 무고를 받아 그의 어머니, 처가 순군에게 붙잡히고 염흥방이 4백여 기를 백주로 보내어 체포하게 했는데, 조반은 5기를 거느려 개성으로 들어갔다. 그는 즉시 체포되어 고문을 받기 시작했는데 염흥방의 협박과 회유에도 굴하지 않았다. 이에 우왕은 조반의 어머니와 처를 풀어주었다. 이 조반 옥사 사건은 결국 무진피화의 시발점이 되어 사건의 당사자인 염흥방을 비롯한 이인임, 임견미 등의 권문세가들이 최영, 이성계 등에 의해 몰락하는 계기가 되었다. 직후 동지밀직사사가 되어 1390년 여름 5월에 명나라에 왕방과 함께 사신으로 가 공양왕의 즉위를 알리고 윤이, 이초 등이 명나라에 와서 공양왕을 세우고 여러 대신들을 죽인 것에 대해 이야기하자 이를 해명했다.

개성윤이 되어 제멋대로 공전을 빼앗고 관청에 소속된 기녀를 탈취하면서 자신의 종이 죄를 질러 수감되자 몰래 도망치게 하는 등의 부정을 저질러 1391년 겨울 10월에 성헌으로부터 탄핵을 받아 죽림으로 귀양을 갔다. 1392년에 조선이 건국되고 7월 18일에 이성계의 즉위를 알리기 위해 명나라의 예부에 사신으로 파견되었고 8월 20일에는 지중추원사로 공신에 임명되었는데, 10월 22일에 남경에서 한양으로 돌아와 예부에서 보내온 차부를 가져왔다.

11월 1일에는 이성계가 친히 조반을 위해 잔치를 베풀어 줬으며, 1393년에 구성로와 함께 서로 트집을 잡아 따져서 구성로가 파면되었는데, 21일에 사헌부에 공납한 말 값을 받아 단자를 몰래 교환했다고 해서 사헌부로부터 탄핵을 받았다. 1394년 2월 22일에는 곽선과 함께 성문 제조를 감독한 것을 소홀히 했다고 해서 대간, 형조 등에게 탄핵을 받기도 했으며, 6월 7일에는 국호, 왕호에 따른 표문을 가지고 이방원, 남재 등과 함께 명나라에 사신으로 파견되었다가 11월 19일에 돌아왔다.

1395년 8월 14일에는 상의문하부사로 있으면서 기우제를 지내기 위해 유후사로 가다가 이지에게 말에서 내리지 않고 그냥 지나가 예를 차리지 않았다가 탄핵받았으며, 1396년 6월 14일에는 참찬문하부사를 지내면서 명나라에 사신으로 파견되어 명나라 황제의 생일을 축하하는 표문을 올리지 못하는 사유를 알리는 표문을 전했다. 11월 10일에 한양으로 돌아왔고 1397년 9월 15일에는 이간과 함께 명나라로 가서 신정에 인사하는 사신으로 파견되었는데, 등주에서 주부에게 저지를 받아 물건들을 빼앗기고 돌아갔고 1401년에 사망했다. 사망 후, 시호 숙위(肅魏)로 봉해졌다.

가정동이 조반의 별장이 있다고해서 이 명칭이 되었다.

3. 대중매체

  • <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에서는 개국 편과 태조, 정종실록에서 등장한다. 그러나 비중이 별로 없어서 별 다른 활약은 없다. 개국 편에서는 명나라에 다녀와서 파평군 윤이와 중랑장 이초가 홍무제에게 거짓 고변을 한 윤이 이초의 옥사 공양왕에게 보고한다. 이 말을 듣고 화가 난 공양왕은 이색, 이숭인을 유배비에서 불러와 국문을 한다. 또 태조, 정종실록에선 태조가 왕위에 오르자 이를 알리기 위해 총알같이 명나라에 보고를 하는 것으로 등장 종료.

4. 관련 문서



[1] 세종때 먼 친척누이이자 다른 사람의 아내였던 유씨와 근친 간음 스캔들을 일으켜 조정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2] 그래서 조반 관련 연기설화나 불교 관련 전설들이 꽤 있는 편이다. 여말선초는 명과의 외교마찰이 심했던 시절이라 사신들 중 홍무제 주원장에게 밉보이면 유폐를 당하거나 사형을 당하는 식으로 조선에 돌아오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조반 역시 사신의 임무를 띄고 명나라로 가던 중 국경 근처 객사에 자다가 승려 셋이 나타나는 꿈을 꾸었다. 승려들은 이곳에서 멀지 않은 몰락한 암자의 돌부처들로 조반이 평호 불심이 깊기로 소문이 나 도움을 요청하러 왔다, 만약 불사 중창에 한몫을 해준다면 이 은혜를 잊지 않겠다 말하고 사라졌다. 꿈에서 깬 조반은 불안하기도 하고 공덕을 쌓아 나쁠 것 없다는 생각에 해당 지역 관리에게 사재를 털어 절을 중창해줄 것을 부탁한 후 사행길에 올랐다. 남경에 가니 역시 홍무제 주원장의 분노를 사 참형에 처해졌는데 망나니가 칼로 목을 세번이나 쳐도 멀쩡하자 황제가 기이하게 여겨 조반을 극진히 대접하고 선물을 가득 안겨 귀국을 시켜주었다. 조반이 조선으로 돌아와 앞서 말한 절을 가보니 돌부처의 목이 떨어져 있었고 주변에 물어보니 칼소리가 나더니 목이 떨어졌다 증언했다. 시간을 따져보니 자신이 중국에서 칼을 맞았던 시간대와 맞았고 조반은 남경에서 자신이 멀쩡했던 이유가 돌부처들이 자신을 대신해 잘렸음을 깨닫고 부랴부랴 재물을 풀어 돌부처를 복구했다. 정도전, 윤소종같은 급진 강경파 사대부가 유독 반불적이였지 여말선초 당시 대부분 사족층들은 불교에 우호적이거나 독실한 신자인 사람들이 많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