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2-18 20:18:28

제양공

강제(姜齊) 국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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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齊)나라 14대 국군'''
강(姜)
여(呂)
제아(諸兒)
아버지 제희공(齊僖公) 강녹보(姜祿父)[1]
생몰 기간 음력 기원전 ???년 ~ 기원전 686년
재위 기간 음력 기원전 697년 ~ 기원전 686년

1. 개요2. 가계와 치세3. 복무 연장이 부른 양공의 최후4. 즉위 후 일대기5. 평가

1. 개요

춘추시대 제나라의 제14대 군주로 이름은 제아(諸兒)였다.

2. 가계와 치세

제나라의 제13대 군주였던 희공(僖公)의 맏아들이었다. 희공의 차남은 규(糾)로 관이오를 스승으로 모시고 있었으며, 3남이 나중에 첫 번째 패자가 되는 환공(桓公) 소백(小白)으로 포숙아를 스승으로 모시고 있었다. 희공에게는 또한 이중년(夷仲年)이라는 동생과 첩 사이에서 얻은 문강(文姜)이라는 미모의 딸이 있었다.

희공은 평소 동생인 이중년을 몹시 아꼈는데, 이중년이 죽자 희공은 슬퍼하며 그의 아들인 공손 무지(公孫無知)를 제아와 동등하게 대우했다. 이에 제아는 강한 불만을 품었다. 희공이 죽자 제아가 뒤를 이어 양공이 되었고, 사촌인 무지를 쫓아냈는데, 이에 무지는 복수를 결심했다.

그런데 양공에게는 간통하고 있는 여자가 있었으니 바로 자신의 이복 여동생이었던 문강이었다. 기원전 709년, 문강은 노(魯)나라의 환공에게 시집을 갔는데, 15년 후인 기원전 694년 노환공과 문강이 제나라로 오게 되자 오빠와 여동생은 오랫동안 쌓인 게 많았는지 침실에서 근친상간을 벌였다. 근데 이걸 매제인 노환공에게 들키게 되었고, 남매의 짐승같은 패륜에 격노한 환공이 근친상간을 한 처남 양공과 아내인 문강을 처치하기 위해 노나라로 돌아가 병력을 일으키려고 했다.

이에 겁을 먹은 양공이 노환공에게 술을 잔뜩 먹이고, 자기 아들인 공자 팽생(彭生)을 시켜서 그를 부축하는 척하며 갈비뼈를 부러뜨려 죽여버렸다. 그러자 노환공과 문강의 아들이었던 노장공이 아버지의 죽음을 외숙부인 양공에게 따졌고, 이에 양공은 자기가 시킨게 아니라 팽생이 멋대로 그런거라고 둘러대며 팽생을 죽여버렸다.[2]

3. 복무 연장이 부른 양공의 최후

제양공 11년(기원전 687년) 7월, 양공은 대부 연칭(連稱)과 관지보(管至父)를 국경 지대인 규구(葵丘)에 파견했다. 당시 복무 기간은 1년이었는데, 양공이 1년이 지나도 교체를 안시켜주자 복무 연장에 분노한 연칭과 관지보가 공손 무지를 꼬드겨서 반란을 도모했다.[3]

그해 12월, 양공은 사냥을 나가서 멧돼지를 발견했는데 부하가 가까이 가서 보니 멧돼지가 아니라 죽은 아들인 팽생이었다.[4] 화가 난 양공이 팽생을 쏘자 그가 발광하면서 양공을 덮쳐왔다. 양공은 크게 놀라 궁궐로 도망가다가 신발 한 짝을 잃어버렸고, 이때문에 신발 관리자인 도인비(徒人費)를 불러 매 300대를 쳤다. 바로 그때, 공손 무지의 반란군이 궁궐을 습격했고 양공을 죽이려고 하자 도인비는 자기가 양공이 있는 곳을 안다고 무지에게 말했다. 무지는 처음에는 믿지 못했지만 관리자가 매 맞은 자리를 보여주자 그제야 믿고 그를 따라갔는데, 알고 보니 도인비는 양공을 옷장에다 숨겨두고 반란군을 엉뚱한 곳으로 끌고간 후 군대를 이끌고 무지를 습격했다.

무지는 관리자와 군인을 모두 죽여버리고 양공을 찾았는데 아무리 찾아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다가 양공이 숨어있는 옷장 앞에까지 눈길이 닿았는데, 잃어버렸던 신발 한 짝이 거기 떨어져 있었다. 결국 양공은 발견되어 끔살당했다. 이후 공손 무지가 즉위했으나 얼마 뒤에 살해당하고 강소백이 즉위하여 제환공이 되었다.

4. 즉위 후 일대기

제양공 원년(기원전 697년) 4월 기해일, 양공은 아버지 제희공을 안장했다. 6월, 허숙이 허나라 도성에 진입하자 제양공과 노환공이 애 땅에서 회맹했다. 그 이유는 허나라를 안정시키기 위함이었다.

제양공 2년(기원전 696년) 5월 병오일, 제나라 군대가 노나라의 해 땅에서 전투를 벌였다. 11월, 위나라의 좌공자와 우공자가 위혜공에게 원한을 품었는데, 그 이유는 제자들인 세자 급자와 공자 수를 죽였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좌공자와 우공자는 위혜공을 폐위하고 공자 검모를 세우니 그가 바로 위후 검모다. 이에 위 혜공은 제나라로 달아났는데, 그 이유는 그 어머니인 선강 제희공의 딸이자 제양공의 누이였기 때문이었다.

제양공 3년(기원전 695년) 정월 병진일, 양공과 노환공이 기(紀)나라의 황 땅에서 결맹했다. 그 이유는 제나라와 노나라의 화의 주선을 위해서였다. 그 해 5월, 제나라와 노나라의 국경에서 두 나라 군대가 서로 충돌했다.

제양공 4년(기원전 694년) 정월, 노환공과 제양공이 낙 땅에서 회견을 가졌다. 그리하여 문강이 노환공과 함께 제나라에 도착했다. 문강은 제양공과 이복남매였다. 문강은 시집가기 전 당시 태자였던 오빠 양공과 사통했다. 이후 문강이 노환공에게 시집을 가는 바람에 제양공을 보지 못했다가 이때 만나 다시 근친상간을 자행한 것이었다. 그런데, 노환공이 이 패륜을 알고 격노하여 아내인 문강을 강하게 질책하자 두려움에 빠진 문강이 그 사실을 오빠 양공에게 알리니 이에 양공은 노환공을 주연에 초대해 취하게 만든 뒤 아들인 팽생을 시켜 갈비뼈를 부러뜨려 죽였다. 이에 노나라 사람들이 분노하여 강력하게 항의하자 제양공이 변명을 했다.
"내가 노후를 잘 대접했는데, 팽생이 이 짓거리를 한 것이다."
그리고는 공자 팽생을 죽여버렸다. 7월, 제양공이 노나라의 수지 땅에서 정나라의 군주인 공자 미를 불러들여 회맹하고자 하니 공자 미는 제나라의 국력이 두려워 채중의 간언을 무시하고 고거미와 함께 제양공을 만나러 갔다.[5] 제양공은 이전의 원한을 갑자기 들춰내더니 공자 미를 참수하고, 고거미는 거열형에 처했다. 이에 정나라의 제족이 그 틈을 타 공자 영에게 미의 뒤를 잇게 했다.

제양공 5년(기원전 693년), 양공은 기(紀)나라, 병나라, 자(鄑)나라, 오(郚)나라를 쳤다. 이해에 동주의 왕녀가 제양공에게 시집왔다.

제양공 6년(기원전 692년) 12월, 양공은 누인인 문강과 작 땅에서 밀회했다.

제양공 7년(기원전 691년) 봄, 양공은 노나라의 공자 익과 함께 위(衛)나라를 쳤다. 가을, 기나라의 군주 강계가 제나라에 휴 땅을 바쳐 기나라가 분열되기 시작했다.

제양공 8년(기원전 690년) 2월, 양공이 누이인 문강과 축구 땅에서 밀회했다. 기나라가 제나라에 할양만하고 굴복하지 않자 제양공이 기나라를 쳤다. 이에 강계가 항복해 기나라를 바쳤다. 여름, 기후가 기나라에서 달아났다. 그 이유는 제나라의 원한을 피하기 위함이었다.[6]

제양공 9년(기원전 689년), 양공은 노나라, 송나라, 진(陳)나라, 채나라 4국과 함께 위나라를 쳐 위후 검모를 몰아내고 폐위당한 위혜공을 복위시키려고 했다. 이 해 여름에 제양공이 누이인 문강과 군중에서 밀회했다.

제양공 10년(기원전 688년), 양공은 동주 장왕의 명령이라는 핑계로 위나라를 쳐서 좌공자와 우공자를 주살하고, 위후 검모를 몰아낸 후 위혜공을 복위시켰다.

제양공 11년(기원전 687년) 봄, 양공은 누이인 문강과 방 땅에서 밀회했다. 이때 관지보와 연칭에게 명령하여 규구 땅에서 수자리를 서도록 했다. 겨울에 제양공이 다시 누이인 문강과 곡 땅에서 밀회했다.

제양공 12년(기원전 686년), 양공이 노나라와 함께 담나라를 포위하여 담나라의 항복을 받았다. 겨울 11월, 제양공이 관지보와 연칭을 교대시키지 않자 그들이 한을 품고 공손 무지와 함께 반역하여 양공을 시해했다.

5. 평가

제양공은 자신의 이복여동생인 문강과 사통하고 그것을 따지려는 매제 노환공을 살해했으며, 정나라의 군주인 공자 미와 대신 고거미를 불러 살해했다. 당시 제나라의 국력이 날로 강해져 위나라의 폐위된 군주였던 혜공을 복귀시키는 등 군사적인 실적은 좋았다. 그러나 관칭과 연지보를 한군두시키고, 사촌인 공손 무지를 후대하라는 부친 제희공의 유언을 무시해 결국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다.[7]

사마천의 평가는 이러했다.
"제양공은 노환공이 취한 틈을 타 살해하고 그 부인과 간통했으며, 많은 사람들을 함부로 죽이고, 자신의 처첩과 음탕하고 난잡한 행실을 저지르며, 대신들을 자주 속였다."


[1] 달리 '父'또는 '甫'를 쓰기도 한다. [2] 비슷한 사례가 서기 260년 조위의 권신 사마소가 황제 조모를 대낮에 길거리에서 참혹하게 죽이도록 명령한 가충 대신, 실행에 옮겼던 성쉬, 성제 형제를 죽인 사건이다. [3] 제양공이 이 두 사람을 임지로 보내면서 다음해 오이(혹은 참외)가 익을 무렵인 7월에는 돌아오게 하겠다고 말했는데 그 시기가 지나도 아무런 명령이 없자 두 사람은 불순한 마음을 품게 되었다. 이에 유래된 말이 과시(瓜時)이다. [4] 팽생이 아닌 팽생의 원수를 갚으려는 일족의 누군가가 멧돼지 가죽을 둘러쓰고 제양공에게 덤빈 것이라는 설이 있다. 공원국의 《춘추전국이야기》 1권에 나오는 이야기로 따지고 보면 이쪽이 더 현실적이다. [5] 공자 미는 젊을 때의 원한으로 제양공의 미움을 샀다. [6] 과거 기나라의 양후가 서주의 이왕에게 제애공을 모함하여 팽형을 당하게 만들었다. [7] 다만 상기한 근친상간 건과 더불어 대부들과의 약속을 어기며 초래한 반란으로 인해 좋지 못한 결말을 맞은 것과는 별개로 평소 본인이 아끼던 사람들에게는 잘해줬는지 시해되었을 당시 신발 담당 하인은 본인을 방금 전 가혹하게 처벌한 주인을 살리고자 본인의 생명을 담보로 노력했고, 공손 무지는 그리 길지 못한 통치 기간 내에 다른 대부에 의해서 암살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