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7-12 21:31:28

정주영(독립운동가)

<colbgcolor=#0047a0> 출생 1914년 1월 15일
경상남도 합천군 덕곡면 장리
사망 1935년 3월 20일 (향년 21세)
부산형무소
이명 정인수(鄭寅秀)
묘소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
상훈 건국훈장 애족장

1. 개요2. 생애

[clearfix]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200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정주영은 1914년 1월 15일 경상남도 합천군 덕곡면 장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대구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1927년 일본으로 도항하여 도쿄 아자부(麻布)중학교에 입학하였으나 동년 8월 퇴학당한 뒤 귀국하였다.

그는 일본인의 한국인에 대한 차별대우를 체험하고 사회과학 서적을 탐독하면서 점차 사회주의 사상과 배일사상을 품게되어 독립운동에 투신할 것을 결의하고 동지들과 구체적인 방안을 협의하였다. 그리하여 1933년 1월 경남 진주에서 동지 김두영(金斗榮) 등과 모임을 갖고 각 부문운동별로 산업별 노동조합을 결성하여 연계투쟁을 전개하기로 뜻을 모았다.

이중에서 강용운, 김두영 등은 교사였던 관계로 비밀결사 교육노동자협의회(敎育勞動者協議會)를 결성하기로 하였다. 그리하여 3월 28일 마산만의 선상(船上)에서 강용운을 비롯한 김두영·이화준(李華俊)·정두명(鄭斗明) 등이 회합하여 반전의식(反戰意識) 고취, 교내 일본어 상용 반대, 소위 국민정신 작흥(作興) 반대 등 35개항의 행동강령을 채택한 후 교육노동자협의회를 조직하였다.

한편 정주영 등은 동년 3월 산업별 노동조합 부산건설협의회를 조직하고 기관지로 <붉은 항구>를 간행하는 한편 조선방직회사, 환태(丸太) 고무공장 등의 여성노동자 수십명과 연락을 취하며 제사공장(製絲工場) 노동자라는 출판물과 메이데이투쟁을 독려하는 내용의 격문 등을 인쇄 반포하는 등 활동하였다. 또한 농민층에 대해서는 한인식, 박태권 등이 별동대를 조직하여 남해(南海)의 도내 각면에 세포조직을 두고 항일선전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이와 같은 활동이 일제에 발각됨으로써 그는 1933년 10월경 동지들과 함께 체포되어 1934년 7월 5일 부산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으로 징역 2년을 받고 항소하였으나 재판 진행 중이던 1935년 3월 20일에 옥사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0년 정주영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2003년 그의 유해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