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color=#fff><colbgcolor=#0047a0> 자 | 대경(大慶) |
본관 | 동래 정씨 [2] |
출생 | 1896년 3월 23일 [3] |
홍주부
정산군 대면 대박리 (現 충청남도 청양군 정산면 대박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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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952년 [4] 10월 22일 [5] (향년 56세) |
충청남도 청양군 | |
묘소 |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4묘역-184호 |
상훈 | 대통령표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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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으로 2004년 대통령표창을 추서받았다.2. 생애
1896년 3월 23일 홍주부 정산군 대면 대박리(現 충청남도 청양군 정산면 대박리)에서 아버지 정인수(鄭寅壽, 1860. 7. 15 ~ 1946. 1. 30)와 어머니 삭녕 최씨(1862. 5. 5 ~ 1925. 3. 7) 사이의 두 아들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이후 큰아버지 정인구(鄭寅九, 1857. 5. 8 ~ 1882)에 입양되었다.그는 1919년 4월 5일 오후 3시 청양군 정산시장에서 300여 명의 주민들이 태극기를 흔들고 독립만세를 부르며 장터를 행진하자 이에 가담했는데, 얼마 뒤 일본군 헌병대가 출동하여 30여 명의 시위 참여자들을 강제 연행해 갔다. 이에 분노한 시위대는 피검자 석방을 요구하며 헌병주재소로 쇄도했다.
시위대를 주도하던 청양향교 직원 권흥규(權興圭)가 일본군의 철수를 주장하며 격렬히 항거하자, 일본군 헌병은 빈 총을 쏘아대며 권흥규를 제지하려 했다. 이때 권흥규가 앞가슴을 풀어 헤치고 달려들며 더욱 거세게 항의하자, 일본군 헌병은 기어이 그의 가슴에 총을 쏘았고 권흥규는 현장에서 순국했다.
이튿날인 4월 6일 아침, 정산시장 사람들이 권흥규의 시신을 청양군 목면 안심리 본가로 운구하던 도중 1천여명의 군중들이 전날과 같이 태극기를 흔들고 독립만세를 부르며 운구 행렬에 동참했다. 이 때 공주군에서 지원해 나온 일본군 헌병들이 운구 행렬에 무차별 사격을 감행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얼마 뒤 정길모는 일본 제국 경찰에 체포되어 1919년 4월 24일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로 청양군 헌병분견소에서 태형 90도를 맞았다.
석방된 후에는 조용히 지내다가 1952년 10월 22일 충청남도 청양군에서 사망했다.
2004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대통령표창을 추서받았다. 그의 유해는 본래 청양군 정산면 대박리에 안장되었다가 2010년 4월 3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4묘역에 이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