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중국의 옛 지명
자세한 내용은 시안시 문서 참고하십시오.과거 전한, 후한, 당나라 등의 수도였던 곳. 이후 수도를 뜻하는 일반명사처럼 되었는데 관용어구인 '장안의 화제'나 베이징의 중심가인 장안가(長安街)의 장안은 여기서 유래했다.
현대에는 '장안구'로 이름이 남아있다.
2. 한국의 지명
2.1. 장안구
2.2. 장안동
2.3. 장안읍
2.4. 장안면
2.4.1. 경기도 화성시 장안면
자세한 내용은 장안면(화성) 문서 참고하십시오.2.4.2. 충청북도 보은군 장안면
자세한 내용은 장안면(보은) 문서 참고하십시오.
2007년 10월 1일 외속리면에서 장안면으로 개칭되었다.[1]
3. 고구려의 지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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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
부왕
양원왕 태자 영양왕 · 왕자 영류왕 · 왕자 대양왕 · 왕녀 평강공주 사위 온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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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문서 | #s-3 | 강서대묘 |
고구려의 마지막 수도.
외성, 중성, 내성의 삼중성벽으로, 평지성과 산성이 하나로 결합된 현대의 평양성이다. 고구려의 다른 도성들보다 면적이 압도적으로 넓으며 동시대 다른 나라의 도성들과 비교해봐도 중국의 장안에 이어 두번째로 규모가 크다. 양원왕 시기인 552년에 장안성을 축성하고 586년에 그곳으로 천도하기 전까지는 대성산성과 안학궁이 있는 평양 인근이 수도였다. 이 때는 산성과 평지성이 별도로 구분되어 있었다. 한자가 중국의 장안과 같지만 순우리말 '잣[2] 안(성 안)'의 변형 또는 음차라는 설도 있다.
일제의 역사왜곡과 그 이후 그대로 100년간 반도와 만주로 일제가 만든 역사를 배운 우리에게는 생소하지만 고구려 멸망 후 고구려 유민들이 고구려 부활의 기치를 내걸고 이정기를 중심으로 결집하여 산동반도 15개주(남한면적보다 넓음)를 지배했던 이정기의 제나라가 전쟁을 이어나갔던 방향은 만주와 한반도가 아닌 산동반도에서 서쪽인 대륙의 장안이라는 점.
그리고 이 장안을 향한 정벌이 이정기가 와병중임에도 불구하고 이루어졌고 끝내 장안성을 공략하던 중 병사했다는 점을 미루어보아 대륙의 장안성이 고구려의 장안성이라고 당시 고구려 유민들이 인지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첨부 우리가 학교에서 배운 역사와 실제 서로 다른 세력간의 기록들을 교차검증하여 사실로 밝혀진 기록이 너무나도 차이가 심한 것은 역사는 언제나 당시의 기록 및 근접한 시대의 기록들로 말미암아 미루어비추어보아야됨에도 불구하고 1900년대 일본이 왜곡한 역사지식을 사실이라고 맹신하고 일제의 조선사총독부에서 편찬한 '조선사'에 나머지를 끼워맞추고 맞지않으면 이단이나 거짓으로 취급하는 것이 대한민국 사학계가 해외의 대부분의 사학계로부터 사이비취급받는 이유기도 함을 우리는 명심해야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