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9-21 09:38:09

장아이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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张爱萍
1910년 1월 9일 - 2003년 7월 5일

1. 개요2. 생애3. 평가

1. 개요

중국의 군인, 제독. 초대 해군사령원을 지냈다. 경우에 따라서는 그의 후임인 샤오징광을 초대 해군사령원으로 보기도 한다.

중국의 초대 해군 사령관이었지만 재임 기간은 짧았고, 대부분의 군 생활은 육군에서 했다. 이후 제2포병 (소련의 전략로케트군에 해당) 사령관을 역임했다.

2. 생애

1910년 1월 9일 쓰촨에서 태어났다. 1926년에는 공청단에 가입했고 1928년에 중국공산당 입당을 허가받았다. 1929년에는 홍군에 입대했고 정치위원 등을 지내다가 1934년 홍군대학을 졸업하고 3군단 4사단 정치위원 등을 지냈다. 대장정에도 참여했다. 중일전쟁 국공내전에도 연달아 참전했다.

1949년 공산당이 국공내전에서 승리해 중국 본토가 공산정권의 통치 아래에 놓이면서, 제3야전군 참모장 등을 지냈다. 그 해에 화동군구 해군사령관을 지내기도 했는데, 이 부대는 동해함대의 전신이었다. 그를 중국의 첫 해군사령원으로 보는 근거가 여기에 있다. 중국이 중일전쟁이나 국공내전 당시에 해군이라 할 만한 게 거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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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군 시절

잠깐 해군부대 지휘관을 하다가 다시 육군으로 왔다. 주로 국방과학기술위원회 등에서 미사일, 로켓, 핵무기 개발[1] 부문에 정통한 기술군인으로 활동했고 1955년에 상장 계급을 받았다. 하지만 마오쩌둥의 신임을 받던 첸쉐썬과의 대립을 겪었고, 결국 문화대혁명 당시에 홍위병의 폭행으로 치료를 못받고 수감생활을 하다가 다리를 저는 장애인이 되었다. 하지만 저우언라이가 비밀리에 치료 등을 지원하면서 풀려난다.

덩샤오핑이 문혁을 수습하면서 그도 복권되었고, 1982~1988년 제6대 국방부장( 국방장관)까지 지냈다. 1989년에 천안문 6.4 항쟁에서 군부의 유혈진압을 반대하였다. 3대 해군사령원이었던 예페이도 그와 함께 진압에 반대하는 서명을 보냈다.

2003년 7월 5일에 베이징에서 사망했다.

장남 장샹은 중국 인민해방군 제2포병부대 부사령관(중장)을 지냈고 차남 장셩은 대교(준장)까지 복무했다. 외손자는 왕양의 딸과 결혼했다. 남동생 장찬밍은 외교부 부부장, 최고인민검찰원 부검찰장을 역임했다.

3. 평가

중국의 역대 장성들 가운데 주더, 펑더화이, 린뱌오, 녜룽전 등에 비해서는 다소 덜 알려진 편이지만, 인민해방군의 성장과 발전에서 빼놓을 수 없는 '숨은 공로자'로 평가받기에 충분한 인물이다. 이는 인민해방군의 4대 군종 가운데 2개(해군, 제2포병)의 창설에서 주도적 역할을 담당했다는 점만으로 입증이 된다.

아울러 정치적 행보로 인해 영욕을 겪었던 린뱌오, 펑더화이 등과는 달리 줄곧 전문 군인으로만 남아 모국의 군사력 발전에 기여했던 점도 그에 대한 평가를 높이는 요인이다.


[1] 중국 최초의 핵실험 당시 직접 참관하고 저우언라이에게 보고한 사람도 장아이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