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 시기에
천안에서
의병을 일으켰고
1594년에 송유진의 난이 진압되자
선조가 송유진을 국문하면서
이산겸을 언급할 때 함께 언급되며, 1627년에는 후금의 군사가 조선을 공격하자 미곶첨사로 있다가 김종민, 이광립과 함께 용골산성을 지키기로 했다.
부사 이희건이 운암으로 갔다가 돌아오지 않자 스스로 머리를 깎고 후금군에게 투항하면서 아내를 인질로 맡기고
아이신기오로 아민에게 용천부사가 되길 청했으며, 관곡을 내어 술을 빚고 민가의 소를 빼앗아 후금의 군사에게 대접했다. 백성들 중에 삭발하지 않은 자가 있으면 강제로 깎게 하면서 따르지 않으면 위협하거나 죽였으며,
정봉수에게 글을 보내 항복할 것을 권유했다.
정봉수가 답하지 않자 직접 가서 만약 항복하지 않으면 백성들까지 헤아릴 수 없는 화를 당할 것이라 협박했으며, 몰래 후금의 군사 수백 명을 끌어들여 용골산성 밖 7리 쯤에 매복시켰다. 그러나 정봉수가 꾀를 내서 장사준은 공모자 10여 명과 함께 죽임을 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