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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나이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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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민주건국회 중앙부주임 위원
한문 章乃器
한국식 독음 장내기
영문 Zhang Naiqi
본명 장샨(章埏)
즈웨이(子偉)
출생 1897년 3월 4일 청나라 저장성 칭티엔현
사망 1977년 5월 13일 중화인민공화국 베이징시
국적 청나라 파일:청나라 국기.png
중화민국 파일:중화민국 북양정부 국기.png
중화민국 파일:대만 국기.png
중화인민공화국 파일:중국 국기.png
학력 저장성립 갑상업학교 졸업
직업 회계사, 경제학자, 정치가
종교 무신론

1. 개요2. 생애
2.1. 초기 경력2.2. 구국회의 7군자2.3. 중일전쟁 시기2.4. 국공내전 시기2.5.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후2.6. 반우파 투쟁의 희생양2.7. 문화대혁명과 말년
3. 작품4. 참고 문헌

1. 개요

중화인민공화국의 정치가, 경제학자. 초창기 은행 및 회사의 회계사로 활동했고 국민당에 가입한 이래 보호주의 경제정책을 주장하며 중국의 화폐제 통일과 열강의 중국 화폐 통제 금지 정책을 시행할 것을 호소했다. 1935년 '상하이 문화계 구국회'를 발족해 민주제도 도입과 항일투쟁을 호소하다가 7군자 체포 사건 때 국민당에게 체포되어 중국 여론의 분노를 촉발시켰다. 1937년 석방된 후 중일전쟁 때 일본에 맞서 투쟁할 것을 국민들에게 호소했고 국공내전 시기 국민당의 독재와 공산당 토벌을 반대하다가 탄압받고 홍콩으로 망명했다.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후 여러 직책을 맡으며 왕성한 정치활동을 벌였으나 반우파 투쟁 때 '대우파'로 몰려 탄압받았다.

2. 생애

2.1. 초기 경력

장나이치는 1897년 3월 4일 저장성 칭티엔현 고위안촌의 한 선비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의 본래 이름은 장샨(章埏)이었는데, '노자'를 읽으면서 "사람을 도려내어 그릇으로 삼다(陶人埏埴以為器)"라는 구절을 마음에 들어하며 이름을 장나이치(章乃器)로 고쳤다. 1911년 신해혁명이 발발했을 때 15살이었던 장나이치는 저장성 리수이(麗水)현에서 혁명군에 가담해 장쑤성 난징까지 진군했다가 혁명이 종식된 후 고향으로 돌아갔다. 1918년 저장성립 갑상업학교를 졸업한 장나이치는 상하이의 저장성 실업은행에 입사해 연습생으로 활동했다. 그러다가 1919년 봄에 실업은행을 떠나 베이징으로 가서 통주 경조은행에 들어가 영업부 주임을 맡았다.

이 무렵 5.4 운동이 발발하자, 장나이치는 이 운동의 영향을 받아 민주제도와 과학을 숭상했다. 그는 1921년 7월 중미실업회사의 회계 주임으로 들어가서 좋은 대우를 받았지만 3개월마에 사직하고 상해로 돌아가 저장성 실업은행에 입사했다. 1927년, 그는 독자적으로 <신평론> 잡지를 창간하여 중국 국민당의 북벌을 지지했다. 1932년 저장성 실업은행의 부사장이었던 장나이치는 여러 은행 인사들과 함께 학술단체인 중국 흥신사를 세웠다. 그리고 그해 6월, 그는 저장성 실업은행을 대표하여 상하이의 각 은행과 연합하여 중국신보소를 설립하여 은행권 신용조사의 공공기관으로 활동했다. 이 중국신보소는 중국 최초로 중국인이 설립한 징신소로서, 회원제를 채택했고 장나이치가 이사장을 맡았다. 장나이치는 이 중국신보소의 준칙을 다음과 같이 정했다.
"성심으로 '진(真)을 추구하고, '선(善)'을 충실하게 추구하며, '미(美)'를 상세히 추구한다."

중국신보소는 상하이 중국계 회사들의 큰 호응을 얻었고, 얼마 안가서 외국인이 운영하는 4개의 징신소를 제치고 상하이의 독점 신보소로 떠올랐으며, 장나이치는 이곳의 이사장으로서 상하이 경제계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한편, 장나이치는 1933년부터 1936년 사이에 '자본주의 국제와 중국', '장나이치 논문선', '중국 화폐제도는 어디로 가느냐', '중국 화폐, 금융 문제'를 잇따라 발표했다. 그는 이 일련의 사설에서 지방 화폐는 군벌의 할거 성격을 반영하며 중국의 장기적인 발전을 위해서는 지방 화폐를 과감하게 폐지하고 중앙 화폐로 통합하여 중국의 독창적인 화폐제도를 실시해야 하며 서구 열강에게 중국의 자본이 이탈당하는 걸 방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보호주의 경제정책을 실시해 자국의 산업을 서구의 침탈로부터 보호해야 하며, 현대 은전시장과 자본시장을 창조하고 회사 주식과 채권을 발행하며, 어음인수와 어음할인을 실시하자고 주장했다.

1935년 초 중국 공농홍군이 대장정 도중 루딩차오를 지났을 때, 중국 공산당은 천윈을 상하이로 보내 중국 공산당 상하이 중앙국을 찾아가 코민테른과 연락하기로 결정했다. 천윈은 같은해 6월 상하이에 도착했으나 상하이 공산당 조직은 중국 국민당 당국에 의해 파괴되어 코민테른과 연락하기 어렵다는 걸 알게 되었다. 이에 천윈은 장나이치의 동생 장추양(章秋陽)과 접견했다. 장추양은 일전에 중국 공산인서관 발행소의 서기 및 상하이 점원 총노동조합 위원장을 지내며 천윈과 함께 노동운동을 벌인 적이 있어 친분이 두터웠다. 천윈은 장추양과 형 장나이치의 협조에 힘입어 코민테른과 연락할 수 있었다. 장나이치는 이때부터 공산당과 인연을 맺게 되었다.

2.2. 구국회의 7군자

1935년 12월, 장나이치는 마샹보(馬相伯), 선쥔루(沈鈞儒) 등과 함께 '상하이 문화계 구국회'를 발족했다. 상하이 문화계 구국회는 12월 27일 '구국운동 선언'을 발표해 일제와 투쟁할 것을 국민정부에 호소했다. 장나이치는 구국회의 집행위원과 상무위원으로 추천되어 재무를 주관하고 홍보 업무를 겸했다. 그는 구국회 기관부 '구망정보(救亡情報)'를 주관했으며 대다수 문건을 작성해 동료들로부터 '선언 전문가'라는 칭송을 받았다.

1936년 초, 장나이치는 상하이 각계의 구국회를 발족시킨데 이어 전국 각계 구국연합회를 조직했다. 그러던 11월 8일, 상하이의 일본인 방적공장에서 노동자들이 일제의 침략에 대한 항의 파업을 실시했다. 이에 장나이치는 11월 12일 왕자오스(王造時) 등과 함께 구국회 회원 700여 명을 이끌고 상하이 정안사로에 위치한 교회 광장에서 집회를 열었다. 선쥔루 스량(史良)이 뒤늦게 집회에 참석해 국민정부에게 초공작전을 중단하고 공산당과 힘을 합쳐 일제에 맞서라고 연설했다.

이에 국민정부 당국은 구국회 지도자들을 체포하기로 결정했고, 장나이치는 11월 23일 선쥔루, 왕자오스, 스량, 쩌우타오펀(鄒韜奮), 리궁푸(李公朴), 사첸리(沙千里)와 함께 체포되어 위해민국 긴급치죄법에 의거, '비합법 단체를 조직하여 적비와 결탁하거나 파업, 동맹휴교, 불매운동을 선동하고 은밀하게 치안의 요란을 계획하여 정부의 전복을 기도한 죄'로 수감되었다. 이에 각지에서 "7군자를 석방하라"는 시위가 촉발되었고 초공작전을 지휘하던 장쉐량과 봉천군벌은 장제스에게 7군자를 석방하고 초공작전을 중지할 것을 건의했다. 그러나 장제스가 끝까지 거부하자, 장쉐량 등은 서안 사건을 단행했다.

서안 사건이 평화적으로 해결된 뒤, 국민당은 공산당과 국공합작을 체결하기로 합의했다. 이후 장쉐량은 동료들과 함께 1937년 6월 11일 쑤저우 고등법원의 공판에 회부되었다가 7월 7일 루거우차오 사건이 발생하고 중일전쟁이 발발한 뒤 7월 31일에 정식으로 석방되었다.

2.3. 중일전쟁 시기

1938년 3월, 장나이치는 제5전구 사령관 겸 안후이성 정부 주석의 초청으로 안후이성 재정청장을 맡았다. 당시 안후이성은 중일전쟁의 여파로 상공업소들이 문을 닫았고 정부의 세수가 격감해 재정이 매우 어려웠다. .1937년 11월 안휘성 재정 수입은 120여만 위안에서 80여만 위안으로, 1938년 2월에는 월수입이 50만 위안으로 감소했다.1938년 5월에는 안후이 성 허페이, 일본군을 공략하면 월 소득이 크게 하락한 재정 수입만 약 10만원 군경과 공무원들의 임금이 2,3개월 체불되었다. 장나이치는 부임 후 "횡령을 척결하고 절약을 준수하며 낭비를 근절하자"는 방침을 제시하며 수지 균형을 빠른 시일에 이뤄내겠다고 약속했다.

장나이치는 일본과의 전쟁에 필요한 물자 마련을 위해 적의 물자 및 사유품을 조사하고 세원 및 재원을 마련하고 체불된 임금을 지급하는 데 초점을 맞췄으며 인근 지역에 주둔한 신사군에 3만 위안을 할당했다. 이밖에도 안후이성 공사채와 지방은행 소액본표를 발행하여 화폐유통을 활성화하고, 안후이성에 다른 성에서는 없었던 전시 금융경제체제를 건립했다. 몇달 후, 안후이성 재정은 매달 수입이 30만 위안 증가했으며 수지는 점차 균형잡혔다. 1935년 5월 안후이성 재정수입은 매월 75위안으로 증가해 항일 전쟁 발발 이래 최고 기록을 세웠다. 이에 대해 국민정부 부총통이었던 리쭝런(李宗仁)은 훗날 장나이치의 세무정비가 훌륭했다며 그의 재정관리 능력을 칭찬했다.

장나이치가 이렇듯 안후이성에서 좋은 성과를 거두자, 천청 장제스에게 장나이치를 중용하여 후방 경제를 정비하는 임무를 맡길 것을 건의했다. 그러나 안후이성 교육감 방치(方治) 등은 장제스에게 장나이치가 안후이성을 적화시켰다고 주장했다. 1938년 8월에서 9월, 장제스는 우한에서 장나이치를 불러 중앙에서 공작 업무을 맡을 것을 권유했지만 장나이치는 거절했다. 장제스는 천청, 쿵상시(孔祥熙), 천리푸 등을 보내 권유하게 했지만 모두 성과가 없었다. 장나이치가 안후이성에 돌아간 후, 방치 등이 장나이치가 안후이성에서 무장조직을 결성했다는 소문을 퍼트렸고, 장제스는 장나이치를 의심했다. 1939년 6월, 장제스는 장나이치를 충칭에 불러 책임을 물은 후 그를 면직시켰다.

1939년 장나이치는 충칭에서 상하이-첸촨(遷川) 공장 연합회 집행위원과 상무이사 등의 직책을 맡았다. 1940년에는 상천 실업회사를 설립하여 기계제조, 수동발전기, 알코올 제조공장을 설치하고 공장 옆 언덕에 축목장을 열었따. 장나이치가 직접 생산을 관리해 성과가 매우 좋아서 공업계의 칭찬을 받았다. 또한 1941년, 장나이치는 소련이 일본과 불가침 조약을 체결하고 만주국을 인정한 것에 항의하며 민족구원 연맹을 떠났다.

중일전쟁 말기, 장나이치는 일본의 침략으로 중국 민족 자본과 산업 자본이 큰 타격을 입어 재건이 어려운 상황을 개선하는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오온초(吳蘊初), 호궐문(胡厥文) 등과 함께 국가 산업에 대한 조사와 연구를 수행하는 연구소를 설립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후 오온초를 회장으로 하고 장나이치를 소장으로 하는 중국 공업경제연구소가 창립되었다. 이 연구소는 장나이치의 주관 하에서 물가와 공업 문제 등을 연구하고 학술 보고서와 문집들을 작성했다. 또한 장나이치는 <상공서> 편찬을 주관하였고 <대공보> 등의 간행물에 많은 경제 평론과 학술 논문을 발표하여 전시 재정금융과 중국 공업화에 대한 의견을 피력했다.

2.4. 국공내전 시기

1945년, 장나이치와 황옌페이(黃炎培), 호궐문 등은 민주건국회를 창립하여 민주 평화운동을 전개해 국민당 독재와 내전을 반대했다. 1946년 1월 정치협상회의가 충칭에서 개막되었으나, 국민정부가 민주건국회의 합법적인 지위를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민주건국회의 정식 대표는 정치협상회의에 참가하지 못했다. 대신 장나이치는 중국 민주동맹 대표단의 고문 자격으로 정치협상회의에 참석해 왕성한 정치 활동을 전개했다. 그런데 1946년 2월, 국민당 특수요원들이 비 국민당 인사들을 대거 공격하기 시작했다. 장나이치는 직접 특수 요원들과 교섭했다가 구타당했고 궈모뤄, 시복량(施复亮), 마인추(马寅初) 등 많은 이들이 구타당해 부상을 입었다. 장나이치 등은 즉시 기자회견을 열어 "빛은 결국 어둠을 물리칠 것이다."라며 민주주의를 위해 분투할 것을 다짐했다. 또한 그는 각종 문서와 성명에서 민주제도 도입, 내전 반대 입장을 견지하며 미국 정부의 국공내전 개입에 반대했다.

1947년 민주동맹이 강제 해산된 후, 국민정부는 공산당에 옹호적인 민주인사에 대한 탄압을 가했다. 장나이치는 어쩔 수 없이 홍콩으로 망명했다. 그는 홍콩에 상륙한 뒤 국민당 당국과 결별하고 새로운 중국을 기다리겠다는 신념을 드러냈다. 1948년 5월, 장나이치 등 민주건국회는 홍콩 정부의 감시하에서 성명을 발표해 중국 공산당이 신정치협상회의를 개최하고 새로운 중국의 민주연합정부를 수립하는것을 지지했다. 이 시기 홍콩에서 민주당파들이 공동 발표한 선언문은 대부분 그가 초안을 잡은 것이었다. 한편 장나이치는 홍콩에서 9개의 부동산 회사를 설립하고 홍콩에서 가장 비싼 지역에 투자해 꽤 많은 이익을 벌었다.

1948년 말, 장나이치는 중국 공산당 중앙위원회로부터 연락을 받고 홍콩의 부동산을 모두 포기하고 리지선, 마인추와 함께 비밀리에 공산당과 합류해 신정치협의회 준비 작업에 참여했다. 1949년 2월 25일, 장나이치 등은 베이징에 도착했다. 한달 뒤 공항에서 마오쩌둥 등 중국 공산당 중앙 수반들의 영접을 받은 장나이치는 환영회에서 "나는 과거 수년간 자본가들을 위해 회계 업무를 맡았는데, 앞으로 인민을 위해 모든 정성을 다하겠다."고 말햇다. 그는 1949년 9월 신정치협상회의 준비회의 제2차 전체회의에 참석해 '공동강령' 제3기초소조의 소집인으로서 '공동강령'의 경제 부분을 담당했다.

1949년 9월 21일, 장나이치는 베이징에서 펑전, 장둥쑨(張東蓀), 천밍수와 함께 의장으로서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 제1차 전체회의를 주재하며 '신민주주의 민족공업가의 임무'라는 제목의 연설을 했다. 그는 이 연설에서 다음과 같이 발언했다.
"제국주의, 봉건제 및 관료주의 자본주의의 억압과 억제가 제거 된 이후 중국의 경제 건설 영역은 실제로 광대하며 국가 산업 및 상업 개발의 미래는 실제로 무한하다. 자본 낭비, 불필요한 경쟁과 무정부 초래, 미래의 사회주의로의 이행을 피하기 위해 포괄적인 경제 계획과 국영 경제의 강력한 리더십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또한 장나이치는 민족공업가, 상업가는 마오쩌둥의 지시를 숙지해야 하며, 중국 공산당은 자신의 사상을 살리면서 현재 사업을 발전시키고 자본을 축적해 장래에 부르주아 계급을 없애려고 노력하고 있다고 밝혔다. 민족 부르주아 계급의 대변자 역할을 맡아왔던 장나이치가 본 계급을 박멸할 준비가 되어있다고 공개적으로 제안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2.5.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후

1952년, 장나이치는 저우언라이 중앙인민정부 정무원 총리의 지명으로 새로 구성된 중앙인민정부 양곡부장에 임명되었다. 당시 중국의 식량 사정은 좋지 않았다. 1952년 봄가을부터 인민생활수준의 향상으로 식량 수요가 증가하는 반면, 자연재해가 발생한데다 공산당의 토지개혁으로 강제로 국가에게 토지를 빼앗긴 농민들은 농사 의욕이 감퇴되어 제대로 일을 하지 않아 식량 생산량이 크게 줄어들었다. 게다가 간상들은 소상공인과 결탁하여 농민을 상대로 식량을 징집하고 식량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거액의 돈을 받아냈다. 1953년에는 개별 지역에서 수천수만 명에서 많게는 1만 명이 국가 양곡 판매점에서 식량 구입 경쟁을 벌이는 상황이 발생하는 등 식량 구입 상황이 갈수록 악화되어 국가의 식량 재고가 나날이 소모되었다. 급기야 1953년 8월, 베이징, 천진 당국은 어쩔 수 없이 밀가루 배급 판매를 실시해야 했다.

장나이치는 이 난관을 극복하기 위해선 식량 생산을 늘리는 것만이 유일한 길이라고 판단하고 공산당 중앙의 협조하에 식량 일괄구매 정책을 제정했다. 1952년 1월. 천윈은 중국 공산당 중앙에 제출한 경제공작보고에서 시범적으로 양곡수매를 실시하자고 건의했다. 이때 장나이치는 수매가를 높여 식량을 강제로 구입해서라도 시장에서 문제를 해결하는 편이 낫다며 회의적인 입장을 보였다. 그러나 천윈은 식량 구입과 배급 판매를 실시하는 것이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했고 1953년 10월 1일 국경절 때 마오쩌둥과 저우언라이에게 보고했다. 다음날, 중공 중앙은 식량 형세와 관련해 공산당 중앙정치국 확대회의를 열어 천윈의 의견을 승인하고 10월 10일 전국식량공작회의를 긴급 소집하기로 결정했다. 천윈은 회의에서 자유구매와 매상 모두 위험하다고 생각하며, 8가지의 가능한 해결방안을 비교 분석한 후 식량 구입과 배급이 유일하게 가능한 방안이라고 주장했다. 이에 장나이치는 "배급"을 "계획 공급"으로, "구입"을 "계획매수" 또는 "통일구매"라는 명칭으로 변경하자고 건의해 모두의 동의를 얻어냈다.

그러나 양곡 일괄판매 정책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1954년 23억근을 더 매입하게 되자 국가와 농민 사이에 긴장된 분위기가 조성되었고 "통괄 구매 정책이 엉망이 되었다."는 비판이 일었다. 이에 천윈은 1955년 1월 자신의 고향인 장쑤성 칭푸현을 방문해 생산량과 주문, 판매를 제한하는 '3정' 정책을 제시해 중국 공산당 중앙과 마오쩌둥의 찬성을 얻었다. 한편, 장나이치는 1955년 9월 저장성 청전현에서 조사 연구를 하고 좌담회를 열어 농촌의 식량 생산, 구입, 판매 및 대중 생활 상황을 파악하고 좌담회에 참가한 마을의 7~8명의 촌민으로부터 이야기를 들은 뒤 상부에 보고했다. 다음날, 그는 청전현을 시찰하고 마을 주민들의 식사 상황을 보고는 "다들 너무 힘들게 사는구나."라고 말했다. 뒤이어 태학산 기슭의 청전중학교 교정에 와서 학생들을 찾아보니 중학생은 1인당 매달 24근의 식량이 전부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장나이치는 고향에 와보니 어떻더냐는 질문에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중앙에서 신문보도를 봤을 때 저장성에서 식량이 자급되고 있다기에 기뻤다. 그러나 고향에 돌아와보니 대중의 잡곡이 부족하고 쌀은 더 부족해 하나같이 누렇게 여윈 얼굴이다. 이번에 중앙에 돌아가면 반드시 사실대로 보고하겠다. 양곡부장을 맡고 있는데 자기 배만 불리고 남이 (밥솥) 새는 것을 상관하지 않으면 어떻게 되겠는가!"

장나이치는 즉시 저장성 지도자와 중앙 지도자에게 보고해 식량과 긴급한 물자를 조달해 대중을 곤경에서 벗어나게 해줄 것을 촉구했다. 그 결과 오래지 않아 저장성 전체 중학생의 식량 표준이 월 31~33근으로 높아졌다.

1955년 7월 전인대 제1기 2차 회의에서, 천윈은 '식량의 일괄 매입과 개선을 위한 일괄판매'라는 발언을 통해 양곡 일괄판매 정책에 대한 각종 의심을 해소하고, 양곡 일괄 매입과 판매 정책을 견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장나이치는 1년간의 식량 사업을 보고하여, 양곡 일괄 매입과 판매 정책의 사회적 효익을 인정함과 동시에 경제적인 효과와 증산 절약을 중시하여, 2,3년 내에 적게 배상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정부가 이러한 두 사람의 주장을 적용한 결과, 이듬해 양곡 부문은 적자에서 흑자로 돌아서, 해마다 이윤을 국가에 상납하기 시작했다.

1953년 식용 식량 가공 표준을 제정할 때, 사람들은 인민의 생활수준이 높아졌으니, 정제미를 많이 생산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이때 장나이치는 과학 연구에 근거하여 가공의 정밀도를 통제하고, 유효한 영양 성분을 많이 보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천윈은 장나이치의 주장에 찬성했고 .질적정률'의 원칙으로, 식량부가 마련한 '표준쌀' '표준분말'을 시행했다.

이렇듯 장나이치를 비롯한 식품부의 노력으로, 곡물 기업들은 손실을 이익으로 전환했다. 또한 1953년 7 월부터 1954 년 6 월까지 곡물 구매량은 전년 대비 77.78 % 증가했고 1954 년 6 월의 재고량은 작년 같은 기간에 비해 51 % 증가했다. 이에 마오쩌둥과 저우언라이는 칭찬을 아끼지 않았고 다양한 사역의 지도자들에게 식품부의 업무 경험을 소개 할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몇년 후, 장나이치는 자신을 높게 평가한 마오쩌둥과 중국 공산당으로부터 "반당을 꾀한 우파 분자"라는 비난을 받게 된다.

2.6. 반우파 투쟁의 희생양

1956년 4월25일에 열린 중국 공산당 중앙정치국 확대회의에서, 마오쩌둥 공산당 주석은 "10대 논제에 관하여"라는 제목의 연설을 하여 지식인들의 자유발언을 허용하는 문제를 논의했고 4월 28일 정치국 확대회의에서는 '백화제방(百花齊放),백가쟁명(百家爭鳴)'이라는 방침을 제시했다. 마오쩌둥은 예술상에서는 '백화제방', 학술상에서는 '백가쟁명'을 우리의 방침으로 해야 한다며 공식적으로 "쌍백방침"을 제기했다. 이에 1956년 9월 중국 공산당 제8기 전국대표대회에서 백화제방, 백가쟁명을 당의 공식 방침으로 정하기로 합의했고, 1957년 초부터 공산당내 정풍운동을 개시하면서 당외 인사들에게 공산당의 잘못된 점을 기탄없이 지적하라고 요청했다. 이에 장나이치는 1957년 4월 15일 중국 민주건국회 중앙상무위원회 좌담회에서 다음과 같이 발언했다.
"이데올로기적 개혁작업은 자연스럽게 해야지 야만스러워서는 안되며, 신비적인 것을 추구해서는 안된다. 내용 없이 추상적인 슬로건을 부르거나 개인을 지나치게 숭상하지 마라. 우리 모두 인간이다. 마오 주석을 포함한 어느 누구도 신이 아니다. 마오 주석은 항상 그를 신격화하는 것에 반대했다."

1957년 5월 14일, 장나이치는 <인민일보>에 <'벽'과 '구'의 사상적 기초로부터>라는 제목의 글을 발표해 "공산당이 정치를 대신하는" 문제를 비판했다. 그후 그는 5월 31일 중국민주건국회 전국공산개조사업 좌담회에서 일련의 발언을 쏟아냈다. 그는 먼저 당과 당외의 문제, 당과 행정의 구별, 통일선전부의 결점을 거론하면서 당원, 당외인사가 갖고 있는 '벽'과 '구'의 사상적 근거에 대해 발언했다.
"당은 혁명, 건설을 지도하여 지금의 중국이 있게 하였지만, 이 때문에 당외 인사들은 당원에 대한 열등감을 가지게 되었다. 또 당원들은 오만한 기풍을 조장하고 있는데, 이는 스탈린의 레닌 추도사에 '우리 공산당은 특수한 자룔로 만들어진다.'고 한 말 때문이다. 즉, 이 구절은 수양이 덜 된 당원이라도 자신은 특수한 인간이라고 자임하는 것을 조장하고 있다. 따라서 공산당이 특수한 자료로 만들어지고 있다는 공식, 즉 교조주의를 비판할 필요가 있다."

또한 그는 관료주의가 자본주의보다 더 위험하니 마땅히 시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그의 발언은 1957년 6월 2일자 인민일보에 그대로 실렸다. 그는 자신의 이같은 발언이 공산당에게 좋은 참고자료가 되기를 희망했다. 그러나 그런 그의 기대와는 달리, 마오쩌둥과 공산당은 자신들에게 비판을 가하는 이들에게 철퇴를 가하기로 결정했다. 1957년 6월 8일 중국 공산당 중앙에서 우파의 공격을 반격할 준비를 하라는 지시를 각 성장들에게 내렸다. 이와 동시에, 인민일보에 마오쩌둥이 직접 작성한 <이것은 왜인가?>라는 제목의 사설을 실으면서 우파에 대한 대대적인 '반격' 개시를 명령했다. 이리하여 반우파 투쟁이 개시되었고, 장나이치는 거센 비판을 받았다. 처음에 장나이치에 대한 비판은 그가 풍파를 퍼트렸다는 것에서 그쳤으나, 점차적으로 그가 '반당, 반사회주의자'라는 것으로 확대되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그가 설립한 민주건국회 자체가 "빨간 자산계급 정당"이라는 비난을 받으면서, 그는 "극우파", "우파 두목"으로 간주되었다.

급기야 1957년 7월 17일, <인민일보>에 "내가 아는 장나이치"라는 제목으로 장나이치의 전 부인이 쓴 폭로문이 실렸다. 이 폭로문에는 장나이치가 자신과 관계를 맺어 아이를 낳아놓고 내팽개쳤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장나이치의 아내 양미진(楊美真)은 정치적 압력을 받고 장나이치와 별거했다. 이후 장나이치는 우파 분자로 간주되었고 1958년 1월에 심문을 강요받은 후 3만여 자의 진술서를 써서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하고 당에 진심을 다하고 있다고 호소했다.

1958년 1월 31일, 장나이치는 중화인민공화국 양곡부 부장의 직무를 취소당했다.그는 중국민주건국회, 전국공상련, 전국인대에서도 잇따라 직위가 폐지되고 전국정치협상위원회의 위원 직함만 남겨두었다. 그의 임금은 행정 4급(월 450원, 전국인대 50원, 전국정협 각 50위안)에서 행정 10급(월 212위안, 외가 전국정협 50위안)으로 내려갔다. 그래도 그는 경호원 호위를 받는 등 관료로서 기본적인 대우를 받기는 했지만 전용차를 국가에 반납해야 했다.

장나이치는 자신이 우파 분자라는 걸 결코 인정하지 않았다. 그러던 중 1962년 1월부터 2월까지 7천인 대회가 열렀을 때, 장나이치는 공산당의 고 경제건설, 정치운동, 민주법제 등을 비판했다. 1962년 3월 중국 인민정치협상회의 제3차 전국위원회 제3차 회의에서 제출된 그의 제안 중 하나는 '헌법상 불가침의 존엄을 재확인하고, 국가의 법제를 정비하고, 사회를 향상시키자'는 것이었다. 이에 대우파로 간주되고 있던 장보쥔, 뤄룽지는 장나이치의 주장을 지지한다고 밝혔다.

그러나 1963년 1월 19일 중국민주건국회 중앙위원회는 '장나이치 제적에 관한 결정'을 발표해 장나이치의 당원 자격을 박탈한다는 뜻을 밝혔고 그해 2월 14일 전국정치협상회의에 서한을 보내 장나이치를 본회대표로 하는자격을 취소한다고 밝혔다. 1963년 3월 7일 중국 인민정치협상회의 제3차 전국위원회 상무위원회 제39차 회의에서는 결의문을 통해 우파 분자인 장나이치의 전국정치협상위원직을 철회했다. 이후 장나이치 주변의 경호원들은 모두 철수헀고, 장나이치는 전국 정치협상회의에서 임금을 더이상 받지 못했으며 단지 국무원 소관 사무관리국으로부터 매월 150위안의 생활비로 근근히 먹고 살아야 했다. 그러나 그의 시련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으니.....

2.7. 문화대혁명과 말년

1966년 8월 24일, 장나이치는 국무원 기관 사무관리국이 주관하는 홍위병에 의해 동안시장 옆 길상희원에 끌려가 홍위병에게 온갖 구타와 모욕을 당하고 중상을 입었다. 장나이치의 아들 장리판(章立凡)은 이때 한 관할 민간 경찰이 회의장에 찾아와 홍위병들에게 "이 사람이 사살되면 중앙에 진술하기 어렵다고 말하고 장나이치를 인근의 병원으로 보낸 덕분에 간신히 목숨을 건졌다고 회고했다. 이후 장나이치는 중난하이에서 추방되었고 국무원 기관 사무관리국은 그를 베이징의 일반 주민 건물로 배치했다. 그후 한번은 서류 가방을 든 몇몇 사내가 장나이치를 찾아가 "당신, 장징푸(張勁夫)와 교류한 적 있지? 장징푸는 배신자니 당장 진술서를 써라."고 협박했다. 장리판의 회고에 따르면, 장나이치는 이를 거부하고 그들이 준 종이를 조각조각 찣어버렸다가 마구 구타당했다고 한다.

1975년 초, 덩샤오핑이 정계에 복귀하자, 장나이치는 그에게 희망을 걸고 자신의 어려운 처지를 호소하는 편지를 보냈다. 그해 4월, 마오쩌둥, 저우언라이는 장나이치의 '우파분자' 누명을 벗기라고 지시했다. 1975년 4월 25일, 천윈과 장징푸가 장나이치를 복권시키자고 호소하자, 중공 중앙은 그를 전국정협위원과 중화인민공화국 재정부 고문으로 임명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얼마 후 장칭 등 4인방이 비림비공운동을 개시하면서, 이 계획은 실현되지 않았다.

1977년 4월, 장나이치는 중병에 걸려 병원에 입원했다. 천윈은 이 소식을 듣자 관계 기관에 병원의 응급처치를 당부하고 정기적으로 자신에게 장나이치의 병세를 보고하라고 지시했다. 그로부터 한달 후인 5월 13일, 장나이치는 베이징에서 병사했다. 향년 80세.

1980년 6월, 덩샤오핑, 천윈은 장나이치를 복권시키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1982년 5월, 장나이치의 유골은 베이징의 바바오산 혁명공묘에 안치되었다.

3. 작품

  • 장나이치 문집

4. 참고 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