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3-07 08:00:44

자마히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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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상세3. 기타

1. 개요

여러 단계에서 인민회의를 수립하는 것이 대중민주주의를 달성하는 유일의 수단이다.
무아마르 알 카다피, 녹색서
Jamahiriya, جماهيرية

무아마르 카다피의 저서 녹색서를 기반으로 한 사상.

2. 상세

직접민주주의를 적극 주장했던 카다피는 자신의 저서를 바탕으로 1977년부터 리비아에 단계적 직접민주주의를 실행했다.

이는 모든 리비아 국민이 의원이 될 수 있는 기초인민회의[1]에서 선출된 서기들과 직능조직(노동조합, 협회, 조합)의 서기장들이 출석하는 리비아 총인민회의, 그리고 기초인민회의에서 뽑힌 인사로 구성된 지방의회로 이루어지는 민주주의 체제로써 리비아 총인민회의의 서기장이 국가원수를 겸하고 행정부 수반까지 겸하는 독특한 체제다.

정당을 허가하지는 않았으나 의외로 선거 방식은 제1세계 못지않게 민주적이었다. 실제로 기초인민회의에서도 전직 고위 관료가 일반 국민에게 밀려 낙선하는 경우가 허다했으며 카다피 1인 독재가 아닌 3개의 토후국(에미리트)과 13개의 주로 이루어진 분권 통치에 가까웠다. 2009년 카다피가 뉴욕 타임즈 기자를 초청했을 때도 꾸밈이 섞여 있었겠지만 1인 독재 국가로 알려진 리비아에서 민주적인 분권 통치와 과거 트리폴리타니아와 사이가 좋지 못했던 키레나이카의 평화적인 자원 수익 분배에 대해 호평했는데 이는 국민합의정부, 대표자의회, 투아레그 군벌 모두가 인정한 사안으로 사실이라고 볼 수 있다.

기초인민회의 의원은 대부분 일반 시민으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여성 투아레그족도 꽤 있었고 지역감정 없이 평화적으로 자원 수익을 분배했으며 리비아의 발전에 상당히 많이 공헌하였다. 카다피가 몰락 직전에 했던 "나는 공식적인 자리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말은 엄밀하게는 거짓말은 아니었던 셈이다.

이런 지방분권적 직접민주주의는 리비아 발전에 공헌을 하였으나 그 위에 있는 카다피 권력이 불안정해지자 순식간에 무너저 내려 내전을 벌이는 결과를 낳았다.

3. 기타

  • 이를 시행하기 시작한 1977년에는 리비아의 국가, 국기 등이 바뀌었다.
  • 2011년에 들어서 아랍의 봄의 물결로 인해 이 체제는 34년만에 무너졌지만 카다피 추종 세력들은 여전히 약소하나마 남아 있다.
  • 아프리카 연합의 발기인인 무아마르 카다피가 아프리카 공통의 정치 체제로 강력히 주장했으나 무산되었다. 그래도 의장 중심 등을 보면 꽤 영향을 받은 듯 하다.


[1] 13개 주마다 따로 의원을 선출한다. 안건을 처리하는 의회의며, 하원 의원에 해당한다. 수는 총 800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