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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회 역대 회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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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900년 9월 5일 |
황해남도 장연군 | |
사망 | 1978년 3월 2일 (향년 78세) |
사망지 | |
묘소 | 국립서울현충원 |
재임기간 | 제2대 광복회장 |
1970년 9월 20일 ~ 1971년 2월 11일 | |
본관 | 경주 이씨 |
이명 | 이승춘(李承春) |
경력 |
감찰위원회 감찰국장 대한해운공사 상임감사 제2대 광복회장 |
서훈 | 건국훈장 독립장 수훈 (1963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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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광복회 제2대 회장이다.2. 생애
1920년 12월경 최창한(崔昌翰)·이기춘(李起春)·김경선(金敬善) 등과 함께 장연에서 동지를 규합하고 독립단(獨立團)을 조직한 그는 1921년 1월 11일 김경선·최창한 등과 함께 장연군 목일면(牧日面)의 곽 수(郭琇)에게서 독립단의 결성취지를 설명하고 독립운동에 필요한 자금 120원을 얻었으며, 3월 1일에는 나당리(羅唐里) 손승훈(孫承薰)에게 군자금을 요청하였으나 손(孫)이 이에 불응하자 방화(放火)로써 응징하였다. 또한 3월 20일 밤에는 동지 이기춘(李起春)과 같이 경현리(鏡峴里) 이응엽(李應燁) 집에 가서 군자금을 요청하였지만 역시 불응하자, 이기춘은 이(李)의 집에도 방화하였다. 이어서 4월 초순 그는 다시 학현리(鶴峴里) 김병순(金炳淳)에게 군자금을 모금하려 했으나, 김병순은 이에 응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일제 경찰에 밀고하자 그와 동지들의 군자금 모금운동이 모두 드러나고, 일경의 추적을 받게 되었다.그는 이러한 상황을 파악하고 더 이상 국내에서는 독립운동이 어렵다고 생각하여 중국 연대(煙臺)로 망명하였다. 그곳에서 나석주(羅錫疇)와 함께 북경(北京)을 중심으로 항일투쟁을 계속하였다. 1924년 3월 경에는 나석주와 함께 상해(上海)로 가서 의열단(義烈團)에 가입하였으며, 1926년 12월경에는 다시 천진(天津)을 중심으로 활동하였다.
그러나 1926년 12월 28일 그는 일제의 집요한 추적으로 북경(北京)에서 붙잡혀 신의주(新義州)로 압송되었다. 1928년 6월 27일 그는 신의주지방법원에서 징역 15년형을 선고받고 서울 마포형무소에서 14년간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