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ki style="margin: -10px -10px" | <tablewidth=300><tablebordercolor=#FFF><tablebgcolor=#FFF> |
광복회 역대 회장 |
}}}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word-break: keep-all"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초대 이갑성 |
제2대 이화익 |
제3대 조시원 |
제4대 안춘생 |
제5대 박시창 |
제6·7대 김홍일 |
제8대 김상길 |
제9대 유석현 |
제10·11대 이강훈 |
제12대 김승곤 |
|
제13대 권쾌복 |
제14대 윤경빈 |
제15대 장철 |
제16대 김우전 |
제17대 김국주 |
|
제18대 김영일 |
제19·20대 박유철 |
제21대 김원웅 |
제22대 장호권 |
제23대 이종찬 |
}}}}}}}}} |
|
|
<colcolor=#fff><colbgcolor=#0047a0> 본관 | 연안 김씨[1] |
출생 | 1922년 2월 12일 |
평안북도
정주군 갈산면 광동리 325번지 (現 평안북도 정주군 갈산면 오산동 325) |
|
사망 | 2019년 2월 20일 (향년 97세) |
서울특별시 | |
묘소 |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6묘역-23호 |
상훈 | 건국훈장 애국장 |
[clearfix]
1. 개요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기업인. 한국광복군 출신으로 백범 김구의 비서, 제16대 광복회장을 역임했다.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수여받았다.2. 생애
1922년 2월 12일 평안북도 정주군 갈산면 광동리 325번지(現 정주시 갈산면 오산동)에서 아버지 김지도(金持燾, 1891. 11. 08 ~ 1950. 09. 15)와 어머니 전주 이씨 이인성(李仁性, 1889. 10. 22 ~ 1952. 04. 17)[2] 사이의 3남 1녀 중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9살 때 정주 오산학교에서 열린 남강 이승훈의 동상 제막식을 보고 애국심을 기르기 시작했고, 조선일보 정주지국장으로 재직 중이던 맏형 김헌전(金憲銓, 1912. 8. 14 ~ 2003. 12. 3)[3]이 일제에 사상범으로 구금된 모습을 보고 민족의식과 애국심이 커졌다고 한다.
16살에 일본에 건너가 고학으로 중학교를 졸업하였고, 리츠메이칸대학 법학과에 합격해 재학하던 중 1943년 11월에 학병으로 끌려갔다. 1944년 중국 서주시(徐州市)에서 복무 중 탈출하였고, 5월 15일 한국광복군에 입대하였다. 입대 후 10월에 장준하, 김준엽, 김국주, 박승헌, 전이호 등과 함께 한광반을 졸업하였고, 한국광복군 제3지대에 소속되어 창설 기간요원으로 활약했다. 그 곳에서 김학규 장군의 비서로 일하면서 연합군 연락장교로 근무하였으며, 쿤밍시 제14항공단에 파견되기도 했다.
1945년 3월 쿤밍의 OSS 본부에 파견되어, OSS 훈련에 참여해 미군 윔스 대위와 정운수 소위의 요청에 따라 훈련 교재 및 한글 무전 암호표를 만드는데 참여하였다. 1945년 3월에는 임시정부 주석 판공실에서 기요비서로 활동하기도 했다.
광복 후 김학규 장군 휘하에서 옥인찬, 한이윤 등과 광복군 주호판사처에 근무해 교포들의 귀국을 주선하고, 치안을 담당하였고, 귀국 후 백범 김구의 비서로 근무하여 1948년 남북협상에도 참가하였다. 1949년 백범 김구 암살 사건 후 김구의 장례식에서 엄항섭과 함께 고인의 대형 영정을 배종하였고, 그 후 정치와 거리를 두었다.
1950년 대에는 노능서, 장재민 등과 함께 대한해운공사에 들어갔고, 1961년 상무이사로 선임되었다. 1964년 에는 부산해운 회장, 1970년대 서울동방운수창고 주식회사 부사장, 1981년 신일건설 회장을 역임하는 등 운수업, 건설업 전문 경영인으로 활동하였다. 1969년에는 이북5도위원회 명예 정주군수, 1980년대엔 개포 주공 2단지 노인정 회장을 맡기도 하였다.
경영인으로 활동하는 와중에도 백범 김구 기념사업 및 광복회 활동에 지속적으로 참여하였다. 1960년 백범 김구 11주기 추도식 상무위원을 맡았고, 1970년 대에는 백범김구기념사업회 상임이사를 역임했다. 1980년부터 광복회 사무국장, 광복군동지회 부회장, 광복회 독립정신 홍보위원, 독립운동사 편집위원장을 맡았고, 1992년 광복회 부회장, 1999년, 2015년 광복군 동지회장, 2003년 제16대 광복회장에 취임했다.
광복회장 재임 시 받은 월급과 독립유공자 연금 전액 5천만 원을 독립유공자 손,자녀 장학금으로 쾌척하였고, 2004년 인제인성대상 상금 2천만 원을 광복회 및 정주 장학회 장학금으로 기부하는 등 기부 활동에도 적극적이었다. 만년에는 광복회 원로로 독립운동가들의 업적을 알리고, 애국 정신을 고취시키다 2019년 2월 20일 서울특별시에서 별세하였다. 그의 유해는 2019년 2월 22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6묘역에 안장되었다.
3. 가족관계
가족은 부인 남인실 여사와 2남 2녀가 있다. 장남 김동제(金東濟, 1953. 07. 19 ~ )는 1960년 대 말에서 70년대 초에 조오련 선수와 쌍벽을 이루던 국가대표 수영선수였다. 맏사위 배천 조씨(白川 趙氏) 조동성(趙東成, 1949. 01. 12 ~ )[4]은 서울대학교 경영대학 출신으로 서울대학교 명예교수이자 경인방송 회장이며, 인천대학교 총장을 역임하였다.4. 참고자료
독립유공자 공훈록독립운동사 제6권, 제9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