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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color=#fff><colbgcolor=#0047a0> 창씨명 | 도쿠가와 타이키치(德川泰吉) |
호 | 여암(艅巖) |
본관 | 인천 이씨[1] |
출생 | 1920년 9월 29일 |
경상남도 함안군 함안면 대산리[2] | |
사망 | 2014년 9월 14일 (향년 93세) |
부산광역시 사상구 주례동 부산보훈병원 | |
묘소 |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1묘역-457호 |
상훈 | 건국훈장 애국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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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교육인.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수여받았다.2. 생애
이태길은 1920년 9월 29일 경상남도 함안군 함안면 대산리에서 아버지 이수엽(李洙燁, 1892 ~ 1971. 5. 6)[3] #과 어머니 해주 정씨(1890 ~ 1963. 3. 2)[4] 사이의 1남 5녀 중 외아들로 태어났다. 함안공립보통학교(현 함안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대구사범학교 심상과에 진학하였다.1939년 7월, 대구사범학교 학생들은 경상북도 칠곡군 왜관면의 철도노선 매립작업에 근로동원 되었었는데, 이들 중 7기인 5학년생이 중심이 되어 평소 민족차별을 일삼던 악질 일본인 교유를 작업장에서 구타한 일이 있었다.
이에 2·3·4학년 학생들은 선배들의 항일저항정신을 계승하기 위해, 1939년 10월 초 각 기수별로 윤독회(輪讀會)를 조직하고 우리 민족의 역사·문학서적을 윤독하며 월 1, 2회 모임을 가졌다. 이때 8기생으로 4학년이던 그는 그해 10월 말에 같은 학교 학생 박효준(朴孝濬)· 강두안· 문홍의· 유흥수 등과 함께 항일민족의식을 담은 작품집을 간행하기로 합의하고, 윤독회를 통하여 원고를 수집하는 한편, 방학 동안에도 귀향하지 않고 수집된 원고를 편집·제작하여 1940년 1월에 「반딧불」이라는 책자를 간행하였다. 그 내용은 주로 민족의식과 항일정신을 고취하는 것이었고 책자는 약 200부를 발간하여 학생들에게 배부되었다.
그러던 중 학생들은 당시의 국제정세를 분석하여 일제의 패망을 예견하게 되었고 다가올 조국의 독립을 위해 보다 조직적인 활동을 필요로 했다. 그리하여 1940년 11월 23일, 그는 박효준·강두안 등 앞서 언급한 동지들과 함께 당시 대구부 봉산정(현 대구광역시 중구 봉산동)에 있던 자신의 하숙집에 모여 비밀결사 조직에 관하여 협의하고 표면상 문예활동을 표방하는 항일학생결사 '대구사범학교 문예부'를 조직하였다. 이들은 운동방침으로서 비밀 엄수 및 매주 토요일 작품감상 등을 결의하고 동지 포섭에 힘쓰면서 1940년 11월 30일부터 1941년 3월 9일까지 수 차례 회합을 갖고 민족문화존중과 항일의식을 함양하였다.
한편, 문예부와는 별도로 1941년 1월에는 임굉· 장세파·강두안 등과 함께 당시 대구부 동운정(현 대구광역시 중구 동인동) 소재 이무영의 집에 모여 비밀결사 '연구회(硏究會)'를 조직하고 '문예부'와 비슷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연구회는 겉으로 학술연구를 위장하면서 민족의식 고취와 독립을 위한 실력배양을 목적한 결사였는데, 그는 연구회의 문학부 책임으로 활동하였다. 연구회는 1941년 2월부터 1941년 3월까지 6회 모임을 갖고 활동 및 결의사항을 추진하였다.
그런데 문예부와 연구회 회원들 다수가 졸업을 하게 되어 이들은 장기적인 사업계획을 하였는데, 이들이 졸업 후 국민학교 교사로 부임하게 되면 우수한 아동들에게 수재교육을 실시하여 독립에 필요한 인재를 양성하기로 한 것이다. 또 회원들은 현지에서 활동상황 및 성과를 매월 1회 사무원에게 보고하고 사무원은 각지에서 보고된 상황을 취합하여 전회원에게 배부하기로 하였는데, 일제의 감시를 피하기 위하여 공문을 가장하여 발송하기로 했다.
이렇게 문예부, 연구회를 통하여 활동을 전개하던 그는 1941년 3월 대구사범학교 졸업 후 영월금국민학교에 근무하면서[5] 연구회의 사업을 수행하였다. 그런데 1941년 7월 대구사범학교 윤독회의 간행물인 「반딧불」이 일본 경찰의 손아귀에 들어가게 됨으로써 대구사범학교 비밀결사의 전모가 드러나게 되었다. 이로 인하여 그도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으며 그후 미결수로 2년여 동안 혹독한 고문을 당하다가 1943년 11월에 대전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징역 2년 6개월형을 선고받고 대전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으며, 옥중에서 8.15 광복을 맞아 곧 출옥하였다.
1946년 1월 마산여자고등학교 교사로 근무하였고, 마산고등학교 교사로 근무하기도 했다. 이 사이 경남대학교 문학부 문과에 입학하여 1957년 3월 졸업하였다. 1957년 4월부터는 함안군 칠원중학교 교사로 근무하였고 나중에 이 학교의 교감 및 교장을 맡기도 했다. 이즈음 부산광역시 동래구 명륜동에 이주하였으며 1960년 3월 부산여자상업고등학교 교사, 1963년 3월 해동고등학교 교사로 근무했고 1968년 3월에는 부산 동해중학교 교감에 취임했다. 이후 1975년 3월 대연여자상업고등학교, 1984년 3월 동천고등학교, 그리고 부산고등학교 등의 학교에서 교장으로 근무했다.
한편, 1972년 3월 대동간호전문학교 교수를 지내고 1981년부터 1983년까지는 부산대학교와 경성대학교를 오가며 강사직을 맡기도 하는 등 대학교에서 한문을 강의했으며, 1977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포장이 수여되었다.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수여되었으며, 교원 생활을 은퇴한 후에는 1994년 11월부터 안용복장군 기념사업회장을, 1995년 10월부터 광복회 부산광역시지부장을 맡았다. # 또 2000년 회고록인 「긴 삶 숱한 고비」 #와 사료집인「안용복장군」를 저술했으며, 그 밖에 파한집· 화랑세기 #·풍암유고·복재집 등의 우리나라 고전을 번역하여 출간하기도 했다.
이렇듯 후학 양성과 고전 연구에 진력하던 중 2014년 9월 14일 밤 11시 9분경 부산광역시 사상구 주례동 부산보훈병원에서 사망하였다. # 사후 그의 유해는 2014년 9월 17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1묘역에 안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