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2월에 도쿄 인근의 쵸후 비행장(Chofu Airfield)에서 부하들에게 B-29 공략 전술을 교육하는 이치가와 주이치 대위로, 배경의 기체는 244전대 3중대 소속의 가와사키 Ki-61-I 히엔이다.
이치가와 주이치(忠一市川 : 1918~1954)
1. 입대와 훈련
제1차 세계 대전이 막바지를 향해 치닫던 1918년에 일본의 수도 도쿄에서 태어난 이치가와 주이치(忠一市川 : 1918~1954)는 태평양전쟁의 마지막 달까지 일본인들에게 초공의 요새로 불리며 열도를 잿더미로 만들고 있던 보잉 B-29 수퍼포트리스(Boeing B-29 Superfortress) 폭격기를 9대나 격추시켜 최고의 중폭격기 킬러로 등극한 인물이다.
18세가 되던 1936년에 쿠마가야 육군 비행학교에 입소해 이듬해인 1937년에 졸업한 그는 첫 자대로 만주에 주둔하고 있던 비행 제9전대에 배치받았다. 중국 전선에서 돌아온 후인 1941년에는 육군의 내노라는 파일럿들이 모여든 항공심사부에서 신형기를 테스트하는 시험 비행사를 거쳐, 다음 해 육군항공사관학교에 입학했다.
2. 복무 기록
1943년 6월에 사관학교를 졸업한 이치가와 소위는 비행 제78전대에 배치받았고, "육군항공대 파일럿들의 무덤"이라는 별명이 붙은 뉴기니(New Guinea)로 이동했다. 이곳에서 몇 개월간 근무하며 출격을 거듭하던 어느 날, 미군기와 교전 도중에 피격 당한 그의 탑승기 Ki-61에 불이 붙었다. 이치가와는 그래도 운좋게 비상 탈출에 성공하여 목숨은 건졌으나 심한 화상을 입었다.
1945년 4월에 Ki-100 전투기로 새로 갈아탄 그는 요격 도중에 탄이 떨어지자 적기에 직접 충돌하는 필사의 공격을 가했다. 주이치 중위는 이런 식으로 B-29 폭격기를 2기나 격추시켰고 1기를 중파시켰다. 같은 해 6월에 육군항공본부는 이 공적에 대하여 금치훈장을 수여했는데, 이 훈장은 위관급 장교에게는 5명에게만 주어진 것이다. 이와 함께 대위로 특별 진급한 이치가와는 패전을 맞을 때까지 B-29 폭격기 9대를 격추시키고 6대를 중파하는 무공을 세웠다. 이것은 B-29 단일 기종으로서는 일본 육군 정상급 전과였다. 여기에 더해 오키나와 전투에서 미 해군의 함상 전투기 F6F 헬캣도 1대를 격파한 그는 전쟁이 끝날 때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다.
패전이 코앞에 닥칠 때까지도 본토 결전의 각오를 다지던 이치가와 대위는 시가현의 요카이치시(八日市) 비행장에서 요격을 위해 대기하고 있다가 천황의 옥음방송을 듣고 조국이 전쟁에 진 것을 알게 되었다.
일본이 항복한 후에는 한동안 닥치는대로 날품팔이를 하며 연명하던 그였지만 얼마 후 민간 항공사에 입사하게 되었다. 퇴역군인 이치가와 주이치는 이렇게 해서 민간기를 모는 기장으로 계속 비행하는 행운을 누렸으나, 그 생활은 결코 오래가지 않았다. B-29 격추왕으로 불리던 그는 1954년에 일어난 공중충돌 사고로 사망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