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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토지주택공사 역대 사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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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43762><colcolor=#ffffff> 성명 | 이지송 (李之松, Lee Ji-song) |
출생 | 1940년 7월 15일 |
충청남도 보령군 주포면 신대리 | |
사망 | 2023년 4월 13일 (향년 82세) |
가족 | 배우자, 슬하 2녀 |
학력 |
대전중학교 (
졸업) 경동고등학교 ( 졸업) 한양대학교 (토목공학 / 학사) 한양대학교 (토목공학 / 석사) 한양대학교 (토목공학 / 박사) |
병역 | 육군 소위 만기전역 |
약력 |
건설부 한강유역 합동조사단 한국수자원개발공사 공무과장 현대건설 토목사업본부장 현대건설 영업본부장 현대건설 부사장 대한토목학회 부회장 경인운하 대표이사 사장 경복대학 토목설계과 교수 현대건설 대표이사 사장 경동대학교 명예총장 경복대학 학장 한국토지주택공사 사장 아시아근대5종연맹 회장 대한근대5종연맹 회장 한양대학교 공과대학 건설환경공학과 석좌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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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전 기업인, 대학교수.2. 생애
1940년 7월 15일, 충청남도 보령군 주포면 신대리의 가정 7남매의 장남으로 태어났다.1958년 경동고등학교, 1963년 한양대학교 토목공학과 학사, 한양대학교 산업대학원 토목공학 석사, 2003년 한양대학교 토목공학 박사과정을 졸업하였다.
1965년 건설부 한강유역 합동조사단에서의 공직생활을 시작하여 육군 소위 임관(공병 소대장) 후 한강유역조사단에 복직했지만 조사단이 1967년 설립된 한국수자원개발공사로 흡수되면서 10년간 한국수자원개발공사에서 근무했다.
이후 1976년 현대건설에 현장소장으로 입사한 후 30여 년 간 국내와 해외 건설 현장을 누비며 안동댐, 대청댐, 단양댐, 남강댕, 소양강댐, 말레이시아 트랭가누댐 등 모두 9개의 댐 공사에 참여해 업계에서는 '댐쟁이'로 통했다. 중동특수 시절엔 이란, 사우디아라비아, 이라크 등 중동지역에서만 11년간 근무했다.
1999년 현대건설 부사장 직위를 마지막으로 현대건설을 떠나 경인운하 사장으로 자리를 옮겼고 2000년부터 경복대학 토목설계과 교수로 재직했다.
그러나 2003년 현대건설을 다시 건설 명가로 되돌리기 위해 대학교수직을 떠났다. 현대건설 사장으로 취임했던 때는 외환 위기 이후 회사가 파산 직전까지 이른 때였고 워크아웃 처지에 놓여 있었던 당시 취임 공약으로 밝혔던 경영 정상화, 7,000여억 원의 이라크 미수금 해결, 충남 서산 개발 등을 3년 만에 모두 이뤄내는 쾌거를 이룬다.
현대건설 복귀 이후 이지송 사장은 곧바로 신고리 원자력발전소, 광양항만, 청계천 복원 등의 대형공사를 연달아 수주하는 저력을 보였다. 이지송 사장의 추진력에 현대건설은 영업이익 및 주가 상승, 신용등급 상향 조정 등 1년 만에 눈에 띄는 성과를 기록했다. 이지송 사장의 취임 3년째인 2005년에는 4,362억원이라는 사상 최대 영업이익을 올리기도 했다.
특히 이라크 건설공사를 수행하다 근로자들이 피랍됐을 당시 이명박 현대건설 회장의 지시로 이지송 이사가 현지로 달려가 구해냈던 내막도 있다. 이지송 이사가 당시 1년여간 이라크 현지 구석구석을 찾아다닌 끝에 결국 전원을 구출했던 일화가 유명하다.
이명박 서울특별시장 시절에는 당시 이지송 현대건설 사장이 청계천 복원공사를 맡아 흠결없는 완벽한 작품을 만들었다는 칭찬을 받기도 했다.
현대건설 대표이사 취임 당시 920원에 불과했던 주가는 이지송 사장의 퇴임 무렵 5만원대까지 올랐다.
대학 특강을 자주하던 이지송 사장은 2005년 11월 급기야 현역 CEO로서 처음으로 임기 3년인 경동대학교 명예총장으로 추대됐다.
이후 현대건설 사장에서 물러나 경복대학 학장으로 3년간 재직하던 중 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 한국수자원공사 사장, 국토해양부 장관설이 끊임없이 제기되면서 고위 공직자로 중용될 것이 예견됐고, 2009년 8월 한국토지주택공사 사장으로 옮기면서 이후 민간 기업 CEO 출신의 혁신적인 공기업 경영은 연일 화제가 됐다.
2.1. 한국토지주택공사 사장
2009년 10월 1일부로 초대 한국토지주택공사 사장으로 취임했다. 기사 취임사에서 “사명만 빼고 다 바꾸자”, “모든 문제의 해답은 안에서 찾자”며 비상경영체제에 돌입하고 경영정상화 6단계 전략[1]을 발표했다.취임 직후 가장 먼저 인사 혁신을 단행했다. 대한주택공사와 한국토지공사의 물리적 통합을 넘어 화학적 통합을 위해 하나의 부서에 두 공사 직원들을 섞어 배치했고, 간부 직원들에 대한 대대적인 인사도 단행했다. 본사 인원의 25%인 500여명은 지역 현장으로 내려 보냈다.
또한 경영정상화에 심혈을 기울였다. 특히 부채의 원인을 꼼꼼히 분석하고 대책을 마련하기 위해 금융, 재정, 회계, 부동산 전문가들로 구성된 재무개선 특별위원회를 만들어 본격적인 재무진단을 시행했다. 그 결과 부채비율이 통합초기 524%에서 현재 466%로 줄었고 당기순이익이 6,801억원에서 1조 2,047억원으로 증가했다.
수요 등을 고려해 사업비를 68조원 축소하고 53조원 투자시기를 이연했다. 사업규모의 합리적 조정으로 안정적 사업추진 토대를 마련했다. 또한 민간경영기법을 LH에 접목한 LH형 경영시스템도 구축했다.
공기업 최초로 '감찰분소'를 신설했고 10만원이상 금품수수 시 '원스트라이크 아웃제' 등 청렴문화 정착에 앞장섰다. 또 사업별 손익·재무상태 및 현금흐름을 구분해 산출하는 구분회계제도를 도입, 책임경영체계를 확립했다.
또한 예비타당성제도 의무화, 사업실명제, 중간평가제도 도입 등 사업관리체계 개선으로 과거처럼 책임지지 않는 관행을 일소했다.
2013년 5월 14일, 한국토지주택공사 사장에서 퇴임했다. 퇴임식 직후 직원들의 손을 일일이 잡고 “사랑합니다” “계속 LH, 국가와 국민을 위해서 최선을 다해달라”고 당부했다. 한국토지주택공사 사장 퇴임 후 모교인 한양대학교에서 건설환경공학과 석좌교수로 재직했다.
언젠가 오늘 이 시간이 오리라 알고는 있었지만, 막상 이렇게 단상에 서서 여러분 얼굴을 보니까 뭐라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이 북받쳐 옵니다. 돌이켜보면, 출범 당시만 해도 눈앞이 캄캄하고 막막했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산더미 같은 부채, 채권 한 장 발행할 수 없는 자금상황, 재무여력을 초과하는 414개의 사업들, 대규모 인력 구조조정의 압력, 그리고 양 기관을 통합하여 하나로 이끌어가야 한다는 막중한 책임감까지 곳곳에 쌓여있는 난제와 회사 걱정에 숱한 밤을 뜬 눈으로 지새웠습니다. 매일 매일이 부채와의 전쟁이었고, 생존과의 싸움이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러한 LH의 태생적 한계와 위기를 극복해 내라고 저를 보낸 것이고 이 제게 주어진 마지막 召命이라 생각했습니다. 오늘의 LH가 있기까지 부족한 사장을 한결같이 믿고 따라준 여러분께 진심으로 고맙고, 감사하다는 말씀을 올립니다.
일도 많이 시키고, 싫은 소리도 참 많이 했습니다. 여러모로 부족한 것이 많았던 제게 LH 초대사장이라는 옷은 너무 과분했고 때로는 너무나 버겁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50년 건설인생에서 가장 자랑스러운 옷이었습니다. 1300여 일 어느 하루 힘들지 않은 날이 없었지만 그 또한 이었습니다. LH사장으로 보낸 지난 3년 8개월, 저는 LH를 위해 제 모든 것을 남김없이 바쳤습니다. 정말 여한 없이 일했고, 후회 없이 살았습니다. 그리고, 이 세상 누구보다도 가장 LH를 사랑했습니다.
여러분 사랑합니다. 함께여서 행복했습니다. LH의 영원하고도 무궁한 발전을 기원합니다.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2013년 5월 14일,
한국토지주택공사 사장 이임사 中
산더미 같은 부채, 채권 한 장 발행할 수 없는 자금상황, 재무여력을 초과하는 414개의 사업들, 대규모 인력 구조조정의 압력, 그리고 양 기관을 통합하여 하나로 이끌어가야 한다는 막중한 책임감까지 곳곳에 쌓여있는 난제와 회사 걱정에 숱한 밤을 뜬 눈으로 지새웠습니다. 매일 매일이 부채와의 전쟁이었고, 생존과의 싸움이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러한 LH의 태생적 한계와 위기를 극복해 내라고 저를 보낸 것이고 이 제게 주어진 마지막 召命이라 생각했습니다. 오늘의 LH가 있기까지 부족한 사장을 한결같이 믿고 따라준 여러분께 진심으로 고맙고, 감사하다는 말씀을 올립니다.
일도 많이 시키고, 싫은 소리도 참 많이 했습니다. 여러모로 부족한 것이 많았던 제게 LH 초대사장이라는 옷은 너무 과분했고 때로는 너무나 버겁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50년 건설인생에서 가장 자랑스러운 옷이었습니다. 1300여 일 어느 하루 힘들지 않은 날이 없었지만 그 또한 이었습니다. LH사장으로 보낸 지난 3년 8개월, 저는 LH를 위해 제 모든 것을 남김없이 바쳤습니다. 정말 여한 없이 일했고, 후회 없이 살았습니다. 그리고, 이 세상 누구보다도 가장 LH를 사랑했습니다.
여러분 사랑합니다. 함께여서 행복했습니다. LH의 영원하고도 무궁한 발전을 기원합니다.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2013년 5월 14일,
한국토지주택공사 사장 이임사 中
3. 사망
2023년 4월 13일에 사망하였다. 향년 82세.4. 여담
- 한국토지주택공사 사장 시절, 2010년 10월 21일 오후 5시 부장급 직원들 200여 명과 컵라면을 먹으며 경영 안정화 방안을 모색하는 '컵라면 미팅'을 가졌다. LH 경영의 최일선에서 뛰는 간부들과 머리를 맞대고 경영 안정화 방안을 찾아보자는 취지로 마련된 자리에 컵라면이 결정된 것이다. 회의 시간에는 김밥이나 햄버거로 끼니를 때우고, 주말에는 쉬지않고 근무했다. 기사
- 2011년 2월, 이지송 사장이 복도를 지나다가 마주친 여직원에게 얼굴에 뾰루지가 난 원인을 묻자 여직원은 "최근 업무가 바빠 야근과 주말근무로 잠을 제대로 못 자서 그렇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이지송 사장은 사장실에 돌아가 개인카드를 꺼내 현금을 찾아올 것을 비서실 직원에게 지시했고, 이 돈은 봉투로 넣어져 그 여직원에게 전달됐다. 겉봉투에는 발신인 이름도 없이 단지 '피부 관리'라는 네 글자만 쓰여져 있었고 금일봉을 전해 받은 여직원이 이지송 사장을 찾아가 고마움을 표시하자 이지송 사장은 "난 돈을 준일이 없다"고 시치미를 떼다가 이내 "열심히 피부관리를 받아서 말끔해진 얼굴로 돌아와 달라"했던 일화는 이지송 사장과 여직원들과의 간담회 등을 통해 직원들 사이에 알려져 화제를 모았다. 기사
- 현대건설 대표이사 재임 시절 경영정상화의 보답 차원에서 채권단으로부터 받은 200억원 규모의 현대엔지니어링 스톡옵션 5만주에 대한 권리를 2012년 한국토지주택공사 사장 시절 공직자로서 행사 포기를 결정했다. 퇴임이 얼마 남지 않은 시점이었지만 공직자로서 직원들에게 더욱 깨끗한 모습을 보이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기사
[1]
화학적 통합, 유동성 개선, 경영정상화 방안 마련, 정부지원 도출, 임대주택 부채해결, 善순환 사업구조 정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