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004787><colcolor=#fff> 이인영 李仁榮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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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 | 학산(鶴山) |
출생 | 1911년 |
평안남도 평양부 | |
사망 | ? |
학력 |
휘문고등보통학교 (졸업) ( 구제) 마츠모토고등학교 (졸업)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 조선사학 전공 / 학사) |
약력 |
연희전문학교 강사 경성대학 교수 연세대학교 교수 문교부 고등교육국장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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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역사학자, 서지학자.2. 생애
1911년 평안남도 평양부에서 부호의 아들로 출생했다.1929년 3월 휘문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930년 4월 마츠모토고등학교(現 신슈대학)에 입학했다.
1933년 3월 마츠모토고등학교 졸업 후 조선으로 돌아와 동년 4월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에 입학했다.
1937년 3월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조선사학전공을 졸업했다(문학사).
이후 진단학회에서 활동하면서 1940년부터 연희전문학교 강사로 근무했다.
1945년 8월 광복 후 일본인들이 귀환하고 난 모교 경성제대 강사로 임용되었고, 연희대학에도 교수로 출강하다가 문교부 고등교육국장으로 관계에 발을 들였다.
1949년부터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교수 및 연희대학교 교수를 겸임했다.
1950년에 간행한 ≪국사요론 國史要論≫은 바로 신민족주의 사관의 입장에서 한국사의 체계화를 시도한 개설서였다. 주로 한국과 만주관계에 관심을 가져, 그 연구결과가 ≪한국만주관계사의 연구≫라는 논문집으로 1954년에 출간되기도 하였다.
비슷한 연배의 다른 사학자들처럼 그 또한 일제시대에는 실증사학에서 출발했으나 해방 후 민족주의의 영향으로 손진태와 함께 신민족주의 사학을 주창했고, 이는 [국사요론]이라는 단행본 서문에 잘 나타나 있다. 학산의 사관은 서울대 사학과 1기생인 손보기, 김성준, 이기백, 한우근 등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
하지만 그 자신과 손진태, 사회주의 계열인 박시형, 김석형 등이 납북되거나 월북하고 난 다음 이병도와 이선근, 신석호, 이상백으로 대표되는 실증사학 계열이 득세하며 학산 학풍은 인맥이 끊어지다시피 했다.
학산은 대단한 고서 수집열을 자랑했는데 그가 모은 장서는 현재 평양의 인민대학습당에 보전되어있는 것으로 전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