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color=#fff><colbgcolor=#0047a0> 출생 | 1872년[1] 1월 5일 |
경상도
안동대도호부
예안현 동하면 부라리 (현 경상북도 안동시 예안면 부포리 176번지)[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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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921년 1월 28일[3] (향년 49세) |
충청남도 논산군 두마면 | |
본관 | 진성 이씨[4] |
자 | 명보(明甫) → 성일(性一) |
호 | 성재(誠齋) |
가족 |
아버지 이정호, 남동생 이일우 배우자 권성녀 |
묘소 |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4묘역-254호 |
상훈 | 2010년 건국훈장 애국장 추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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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2. 생애
1872년 1월 5일 경상도 안동대도호부 예안현 동하면 부라리(현 경상북도 안동시 예안면 부포리 176번지)에서 아버지 이정호(李廷鎬, 1845 ~ 1915.6.17.)[5]와 어머니 고성 이씨(? ~ ?.10.2.)[6] 사이에서 2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래로 남동생 이일우(李佾羽, 1887 ~ 1959.1.21.)[7]와 누이 동생 2명이 있었다. 1885년 안동 권씨 권성녀(權姓女, 1868 ~ 1921)[8]와 결혼하였다. 1894년( 고종 31) 식년(式年) 진사시에 3등 574위로 입격하였다.1895년 을미사변으로 명성황후가 시해되자 나랏일에 대하여 애통해 하고 염려하기 시작하였고,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집 문을 닫고 세상일을 잊고자 하여 본격적으로 은거하기 시작하였다. 1910년 경술국치를 당한 뒤 이만도를 비롯한 위정척사파 유림들이 자결, 순국한 소식을 듣고는 근심과 분노로 깊은 병을 얻었고, 이를 안타깝게 여긴 부인이 "상황(上皇)은 아직 무탈하시고, 양친이 살아계시는데 병에 시달려서야 될 일입니까?"라고 하며 만류하였다. 이에 1912년 봄에 배우자와 장남 이동희(李東熙, 1892 ~ 1954.1.7.)[9], 차남 이동묵(李東默, 1896 ~ ?)[10], 3남 이동섭(李東燮, 1908 ~ 1964.7.2.)[11] 등 가족을 데리고 충청북도 보은군 왕래면 갈평리[12] 속리산 아래에 은둔하며 부모님을 봉양하고 망국의 한을 달래었다.
1915년 6월 17일, 아버지가 사망하고 삼년상을 마친 1917년 6월, 아버지의 뜻을 따라 충청남도 논산군 두마면[13] 봉서리 계룡산 아래로 거처를 옮겨 은둔 생활을 이어 나갔다. 1919년 1월 21일 고종이 사망하자 머리를 풀고 미음을 먹으며 삼년상의 예를 다했고, 아침저녁으로 경기도 양주군 미금면 금곡리(현 남양주시 금곡동)에 있는 홍릉을 향해 바라보며 통곡하였다.
그러던 1921년 1월 28일, 고종의 대상(大喪)이 끝나자, "한 번 죽어 국가에 보답하고자 하나 이룰 수 없는 것은 노모가 계시기 때문이다. 이제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임금도 돌아가셨으니 어찌 죽지 않을 수 있겠는가"하며 나라를 잃고 10여 년간 분통함과 부끄러움을 참았으나 이제는 충성과 의로움의 길을 가겠다는 뜻으로 비통사(悲痛辭)와 경고(警告)·분사(憤辭)·유계(遺戒)를 남긴 뒤 마침내 독약을 먹고 자결, 순국하였다. 이어서 그의 아내 권성녀 또한 의로운 아내의 길을 가겠다는 뜻으로 5통의 한글 유서를 남긴 뒤 남편을 따라 먹다 남은 독약을 먹고 뒤따라 순절하였다.
2010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받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유해는 당초 칠곡군 지천면 백운리 청구공원묘지에 안장되었으나, 2010년 5월 23일 배우자 권성녀의 유해와 함께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4묘역에 이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