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color=#fff><colbgcolor=#0047a0> 초명 | 이희구(李熙龜) |
이명 | 이점보(李點甫, 李占甫) |
자 / 호 | 문익(文益) / 포재(浦齋) |
본관 | 성산 이씨[1] |
출생 | 1902년 6월 8일 |
경상북도
성주군 본아면 하아동 (현 경상북도 성주군 대가면 용흥3리 율포마을)[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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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929년 11월 6일 (향년 27세) |
경상북도 성주군 | |
묘소 |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4묘역-253호 |
상훈 | 건국훈장 애국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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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2. 생애
1902년 6월 8일 경상북도 성주군 본아면 하아동(현 성주군 대가면 용흥3리 율포마을)에서 아버지 이상우(李相雨, 1883. 4. 6 ~ 1945. 7. 24)와 어머니 수원 백씨(1884. 7. 18 ~ 1968. 9. 16)[3] 사이의 3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그는 고향에서 농업에 종사하다가 1923년 일본 오사카로 건너가 경제학을 공부했다. 그 뒤 귀국했다가 1924년 다시 일본으로 건너갔고, 재차 귀국한 뒤 1925년 4월 일본으로 다시 건너간 뒤에는 효고현 히메지시에 있던 타카다 마쓰조(高田松藏)의 집에 머물러 있었다. 그러다가 1928년 11월 25일에 천황 히로히토가 교토를 방문한다는 소식을 듣고는 24일 밤 교토 후시미구로 가서 하룻밤을 머물렀다. #
그리고 이튿날 그는 시모교구(下京區) 아카즈노몬지도리(不開門通) 기즈야초(木津屋町) 및 가메초(龜町)를 옮겨다니며 천황의 마차를 기다리다가, 그날 오전 11시 25분, 천황이 교토시 후시미구에 있는 메이지 천황의 묘소인 후시미모모야마능을 참배한 뒤 교토고쇼로 돌아가던 도중 교토시 시모교구에 있는 히가시혼간지 앞을 지나자, 일제의 조선 침략의 부당성 및 조선총독부의 철폐를 요구하는 직소장(直訴狀)을 제출하려고 경계선을 나와 천황이 탄 마차에 접근하던 중에 현장에서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그 뒤 그는 제4대대 경위본부(警衛本部)에 이송되어 취조를 받았으며, 같은 해 12월 교토구재판소에서 마쓰이(松井) 검사로부터 징역 6개월이 구형되었고 결국 12월 10일 오전 10시 교토구재판소에서 검사 측의 구형과 같이 타마이(玉井) 판사로부터 징역 6개월을 선고받고 총 9개월간 옥고를 치르다가 출옥하였다.
출옥 후 귀국하였으나, 1929년 11월 6일 빼앗긴 나라에서 더 이상 살 수 없다며 원통해하다가 결국 집 근처 낙동강변의 어느 나무에 목을 매어 자결했으며, 부인 성주 배씨 배순희(裵순희, 1902. 4. 23 ~ 1902. 6. 11)[4]도 남편이 죽은 뒤 3일 만에 뒤따라 자결했다. 그 뒤 11월 15일에 장례를 치렀는데 모여 든 사람이 수천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대한민국 정부는 이경환에게 1968년 대통령표창을, 이어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당초 성주군 대가면 용흥1리 용전마을에 안장되어 있던 그의 유해를 2010년 5월 22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4묘역에 이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