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봉길 관련 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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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885년 |
충청남도 예산군 덕산면 | |
사망 | 1950년 (향년 65세) |
충청남도 예산군 덕산면 | |
본관 | 파평 윤씨[1] |
부모 | 아버지 윤진영(尹振榮), 어머니 원주 원씨 |
형제자매 |
형 윤경(尹慶) 누이 윤씨(尹氏) |
배우자 | 김원상(金元祥) |
자녀 |
장남
윤봉길 차남 윤성의 장녀 윤순례 삼남 윤남의 사남 윤임의 오남 윤영의 육남 윤준의 |
친인척 |
손자 윤종 손부 김옥남 증손자 윤주웅 증손녀 윤주경, 윤주영 |
1. 개요
조선 말기의 농부. 독립운동가로 윤봉길 의사의 부친이다.2. 생애
1885년 조선 충청남도 예산군 덕산면에서 아버지 윤진영(尹振榮)과 어머니 원주 원씨 사이에서 2남 1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윤황(尹堭)은 성장하여 평범한 농부로 직업을 구하여 살아왔으며 형 윤경(尹慶)과는 달리 학문을 접히지 않고 평생을 흙과 더불어 사는 농부로 지내왔다.오래전 아버지 윤진영(尹振榮)은 별명을 윤두더지라고 불러왔으며 즉 덕산에서 문중을 일으킨 사람이 윤황의 아버지인 윤진영(尹振榮)이었다.
그후 마을사람들은 부농(富農)으로 일가를 이룬 아버지 윤진영(尹振榮)과 어머니 원씨(元氏)를 존경하였다고 한다 윤황(尹堭)은 얼마후 1908년 6월 21일 23세 나이에 김원상(金元祥)과 결혼하여 아들인 윤봉길(尹奉吉)와 윤성의(尹成義), 윤남의(尹南義), 윤임의(尹林義), 윤영의(尹英義), 윤준의(尹俊義)를 두었고 딸 윤순례(尹順萊)를 두어 지냈다.
그때는 중시하던 시절이었고 마을 어른들은 복을 받아 많은 손자들을 얻고 그 손자들은 5형제 바위의 정기를 받고나서 태어났다고 한다 이후 윤황(尹堭)은 1918년 장남인 윤봉길(尹奉吉)를 덕산초등학교에 입학시켰고 그 학교의 교장은 일본인으로 알려져 학교에선 조선말이 아닌 일본말을 써야한다고 하여 아들인 윤봉길은 불만이 많았다.
한달후 1922년 15세가 된 이후에 윤봉길(尹奉吉)은 배용순(裵用順)을 만나게 되고 이둘은 어린 나이에 결혼을 하게 되면서 1927년 손자 윤종(尹淙)과 윤경(尹涇)과 윤담(尹淡)을 두었고 손녀 윤안순(尹安順)을 두었다 하지만 둘째 손자인 윤경(尹涇)은 형 윤경(尹慶)과는 같은 이름이지만 한자이름이 틀리며 형도 자기 이름과 같다는걸 알고있었다.
그런데 1929년 둘째 손자 윤경(尹涇)과 손녀 윤안순(尹安順)이 홍역으로 인하여 어린 나이에 일찍 사망하였고 5년 후인 1932년 장남 윤봉길(尹奉吉)도 사형을 당하며 사망하게 되었다.
장남을 잃은 윤황(尹堭)은 안타까워 했고 그때 막내 손자인 윤담(尹淡)은 고작 2살이었다 윤황(尹堭)은 별일없이 잘 지냈고 막내 손자인 윤담(尹淡)은 덕산보통학교에 입학했지만 1년이 지난 후 중퇴하였다 1938년 당시 손자 윤담(尹淡)은 9살이 된 후부터 복막염으로 병을 얻게 되고 결국은 갑작스럽게 윤담(尹淡)도 죽은 손자들과 같이 사망하고 말았고 이제 남은 손자는 첫째 손자인 윤종(尹淙)이었다.
윤황(尹堭)은 많은 손자들과 손녀를 잃었고 얼마후 손자 윤종(尹淙)이 성인이 되는걸 지켜보고 1950년 당시 갑작스러운 지병으로 인하여 향년 65세 나이로 사망하였다.
[1]
판도공-제학공-공간공파 31세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