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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흥 심씨

{{{#!wiki style="margin: -15px -10px" <tablealign=center><tablewidth=160><tablebordercolor=#008B8B> 吳興 沈氏
오흥 심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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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향 저장성 후저우시
도시조 주문왕 희창
시조 담계재
중시조 심제량
집성촌 절강성, 장쑤성

1. 개요2. 상세3. 주요 인물
3.1. 남북조 시대3.2. 당 시대3.3. 송 시대3.4. 명 시대3.5. 청 시대3.6. 심가본3.7. 심균유3.8. 마오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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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오흥 심씨(吳興 沈氏)는 중국 주나라 전국시대인 BC 500년 경부터 청나라가 멸망하는 AD 1912년까지 절강성(저장성)과 강소성을 세거지로 삼았던 중국 최고의 명문 황족 왕족 귀족 가문이었다.

2. 상세

중국 주나라 추존 천자 문왕(희창)의 10번째 왕자 담계재(희재, 주나라 초대 천자 무왕 희발의 동생)의 후손으로 담계재(희재)가 주나라의 제후국 심나라(沈國)를 건국하였으므로 오흥 심씨는 주나라의 천자족인 동시에 심나라의 왕족이었다.

춘추전국시대로 접어들면서 약소국 심나라는 인접 초강대국 초나라의 보호를 받는 자치속국이 된다. 당시에는 약소국이 강대국의 보호자치국이 되면 약소국 왕세자를 강대국에 볼모로 보내 강대국의 장군으로 임명되는 관습이 있었다. 심나라의 왕세자 심윤술(沈尹戌)도 가족들을 데리고 초나라에 볼모로 잡혀 초나라의 좌사마 대장군으로 임관하였다.

BC 506년 인접 채나라가 초나라를 공격하는데 동참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심나라를 공격하여 멸망시키고 심나라의 군주 심자가(심윤술의 아버지)를 잡아죽인다.

이에 분노한 초나라가 채나라를 정벌하자 채나라는 오나라에 도움을 요청하였고 오나라왕 합려는 손무(손자)와 오자서를 앞세워 초나라를 침략하였다.

초나라는 좌사마 심윤술을 총사령관, 영윤 낭와를 부사령관으로 세워 오나라군에 맞섰지만 낭와의 공명심으로 오나라 손무에게 크게 패하고 심윤술은 자결한다. 이후 초나라 성도까지 점령당해 심윤술의 부인과 막내 아들이 오나라로 끌려갔다. 오나라는 나중에 월나라에게 멸망당하고 월나라는 다시 초나라에게 멸망당한다. 이 때 초나라의 영윤(수상)이 심윤술의 둘째 아들 심제량(沈諸梁)이었다. 심제량은 초나라가 점령한 약소국 섭국의 제후로 봉해졌기에 섭공(공작)이라고 불렸다. 심제량의 후손들은 심씨를 섭씨(엽씨, 葉)로 성씨를 개칭했다. 그래서 엽씨(섭씨, 葉)들도 심씨와 한 혈통이다. 오흥 심씨들은 이 때부터 오월 지역(절강성과 강소성)에 세거한 것으로 보인다.

오흥 심씨가 역사에 본격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한 것은 위진남북조 시대부터이다. 동진 시기에는 심충(沈充)이 대장군 왕돈의 반란에 가담한 일 때문에 관직 진출이 막혔다가, 심경이 낙양을 끝까지 지키다 사망한 것이 인정받아 겨우 복권되었다. 다만 동진 시기에는 진군 사씨나 낭야 왕씨 같은 명문 귀족 가문에 밀려 주목 받지 못 했고, 송나라가 들어선 후에야 비로소 사서에 인물들이 다시 등장하기 시작한다.

3. 주요 인물

3.1. 남북조 시대

  • 명선황태후 심용희 (明宣皇太后 沈容姬, 414년 ~ 453년) : 남조 송나라 제3대 황제 송 문제 유의륭(宋 文帝 劉義隆)의 황후(皇后)로서, 남조 송나라 제7대 황제 송 명제 유욱(宋 明帝 劉彧)의 친모이다.
  • 심경지(沈慶之, 386년 ~ 465년)는 남조 송나라의 대장군으로 시중(侍中)과 태위(太尉)에 이르렀다. 백면서생(白面書生)이라는 고사성어를 처음 만든 인물이다. 충무양공(忠武襄公)에 봉해졌다.
  • 심문숙(沈文叔, ? ~ 465년)은 남조 송나라 때 시중(侍中)에 이르렀다. 심경지의 아들이고 심문계의 형이며 심소략의 아버지이다.
  • 심문화(沈文和, ? ~ 478년)는 남조 제나라의 초대 황제 소도성(蕭道成, 427년 ~ 482년)의 부마(駙馬)로 소도성의 장녀 의흥헌공주(義興憲公主)의 남편이다. 남조 송나라 때 중서시랑(中書侍郎)에 이르렀다. 남조 송나라의 형주자사 심유지(심경지의 사촌)의 아들이다.
  • 심문계(沈文季, 442년 ~ 499년)는 심경지의 아들이고 심문숙의 동생이며 심소략의 숙부이다. 남조 송나라 때 산양현백과 약양현후에 봉해지고 남조 제나라 때 서봉현후에 봉해지고 시중(侍中)에 이르렀다.
  • 심소략(沈昭略, ? ~ 499년)은 심경지의 손자이고 심문숙의 아들이며 심문계의 조카이다. 남조 제나라 때 시중(侍中)에 이르렀다.
  • 심약(沈約, 441년 ~ 513년)은 송, 제, 양 3남조의 황제를 모두 섬긴 대신으로 위진남북조 시대 최고의 관료이자 대학자이자 시인이었다. 그의 할아버지 정로장군 심림자(征虜將軍 沈林子)는 남조 송나라의 개국 공신이었고, 아버지 회남태수 심박(淮南太守 沈璞)은 남조 송나라 황실의 제위 싸움에 연루되어 처형당해 심약은 송나라가 망할 때까지는 은거하며 저술에만 힘써야 했다. 남조 제나라 때 다시 출사하여 남조 양나라 때에는 개국공신에 책록되고 건창은개국후(建昌隱開國侯)에 봉해지고 이부상서와 상서복야를 거쳐 상서령과 시중(侍中)에 이르렀다.
  • 심군리(沈君理, 525년 ~ 573년)는 남조 진나라 초대 황제 무제 진패선(武帝 陳霸先)의 부마(駙馬)이자 진나라 마지막 황제 후주 진숙보(後主 陳叔寶)의 국구(國舅)이다. 후주황후 심무화(後主皇后 沈婺華)의 아버지이며, 폐태자 오흥왕 진윤(廢太子 吳興王 陳胤)의 외조부이다. 망채정헌후(望蔡貞憲侯)에 봉작되었으며 진패선의 딸 회계목공주의 남편이다. 남조 진나라 때 시중(侍中)과 의동삼사에 이르렀다. 불교 천태종의 발전에 큰 공헌을 했다.
  • 후주황후 심무화 (後主皇后 沈婺華) : 남조 진나라 제5대 황제이자 마지막 황제 진 후주 진숙보(陳 後主 陳叔寶)의 황후(皇后)이다. 망채정헌후 심군리(望蔡貞憲侯 沈君理)의 딸이다.
  • 건성현후 심법심 (建成縣侯 沈法深) : 남조 진나라 제2대 황제 진 문제 진천(陳 文帝 陳蒨)의 국구(國舅)이고, 남조 진나라 제3대 황제 진 폐제 진백종(陳 廢帝 陳伯宗)의 외조부이다. 문황후 심묘용(文皇后 沈妙容)의 아버지이다.
  • 문황후 심묘용 (文皇后 沈妙容, ? ~ 605년) : 남조 진나라 제2대 황제 진 문제 진천(陳 文帝 陳蒨)의 황후(皇后)로서, 남조 진나라 제3대 황제 진 폐제 진백종(陳 廢帝 陳伯宗)의 친모이다. 건성현후 심법심 (建成縣侯 沈法深)의 딸이다.
  • 심흠(沈欽, 503년 ~ 569년)은 남북조 시대 진나라의 외척으로, 진나라의 제2대 황제 문제 진천(文帝 陳蒨, 522년 ~ 566년)의 황후 문황후 심묘용(文皇后 沈妙容, ? ~ 605년)의 오빠이다. 건성현후 심법심(建成縣侯 沈法深)의 아들이다.
    남조 진나라 때 건성현후(建成縣侯)에 습작(襲爵)되었으며 시중(侍中)에 이르렀다.
  • 아들 심관(沈觀)도 건성현후(建成縣侯)에 습작(襲爵)되었으며 어사중승에 이르렀다.
  • 심각(沈恪, 509년 ~ 582년)은 남조 양나라 때 동흥현후에 봉해지고 남조 진나라 때 시중(侍中)에 이르렀다.
  • 차남 심법흥(沈法興)은 수나라 말기 5대 군벌로서 양(梁)나라를 세우고 스스로 양왕(梁王)이 되었으나, 또 다른 군벌 이자통(李子通)에게 패해 강물에 투신자살하였다.
  • 상서좌복야 심협 (尚書左仆射 沈勰)은 북주의 제3대 황제 북주 무제 우문옹(北周 武帝 宇文邕, 543년 ~ 578년)의 후비 심황후(沈皇后)의 아버지이고, 당나라 제8대 황제 당 대종의 황후 예진황후(睿眞皇后)의 6대조이다.
  • 후비 심황후 (後妃 沈皇后)는 북주의 제3대 황제 북주 무제 우문옹(北周 武帝 宇文邕, 543년 ~ 578년)의 후비(後妃)이다. 상서좌복야 심협 (尚書左仆射 沈勰)의 딸이다.

3.2. 당 시대

  • 비서감 증 태사 심역직 (秘書監 贈 太師 沈易直) : 당나라 제8대 황제 당 대종 이예(唐 代宗 李豫)의 국구(國舅)이고, 당나라 제9대 황제 당 덕종 이괄(唐 德宗 李适)의 외조부이다. 예진황후 심진주 (睿眞皇后 沈珍珠)의 아버지이다.
  • 예진황후 심진주 (睿眞皇后 沈珍珠) : 당나라 제8대 황제 당 대종 이예(唐 代宗 李豫)의 황후(皇后)로서, 당나라 제9대 황제 당 덕종 이괄(唐 德宗 李适)의 친모이다. 본명은 심원(沈媛)이다.
    북주(北周) 상서좌복야(尚書左仆射) 심협(沈勰)의 6세손, 수나라 대리경(大理卿) 심림(沈琳)의 고손녀, 당나라 합주사마(陜州司馬) 심사형(沈士衡)의 증손녀, 당나라 장안현령(長安縣令) 심개복(沈介福)의 손녀, 당나라 비서감(秘書監) 증 태사(太師) 심역직(沈易直)의 딸이다. 당나라 기주자사(冀州刺史) 심종도(沈從道), 심역종(沈易從)의 조카이다. 당나라 비서소감(秘書少監) 증 태위(太尉) 심진(沈震)의 누나이며, 당나라 태상소경 겸 어사중승(太常少卿 兼 御史中丞) 심방(沈房)의 고모이다. 당나라 제10대 황제 당 순종 이송(唐 順宗 李誦)의 부마(駙馬) 심휘(沈翬)의 당고모이다.
  • 부마도위 심명 (駙馬都尉 沈明) : 당나라 제8대 황제 당 대종 이예(唐 代宗 李豫)의 부마(駙馬)로 당 대종의 8녀 장림공주(長林公主)의 남편이다.
  • 부마도위 심휘 (駙馬都尉 沈翬) : 당나라 제10대 황제 당 순종 이송(唐 順宗 李誦)의 부마(駙馬)로 당 순종의 4녀 서하공주(西河公主)의 남편이다.
예진황후 심씨(睿眞皇后 沈氏)의 5촌 당질(堂姪)이다.
  • 부마도위 심의 (駙馬都尉 沈礒) : 당나라 제11대 황제 당 헌종 이순(唐 憲宗 李純)의 부마(駙馬)로 당 헌종의 6녀 선성공주(宣城公主)의 남편이다.
  • 부마도위 심분 (駙馬都尉 沈汾) : 당나라 제11대 황제 당 헌종 이순(唐 憲宗 李純)의 부마(駙馬)로 ​당 헌종의 8녀 남강공주(南康公主)의 남편이다.
  • 소의 심씨 (昭儀 沈氏) : 당나라 제15대 황제 당 무종 이염(唐 武宗 李炎)의 후궁(後宮)
  • 심기제(沈旣濟, 750년 ~ 800년) : 중당(中唐) 시대의 대표적인 전기 작가, 《침중기(枕中記)》의 저자
  • 심아지(沈亞之, 781년 ~ 832년) : 중당(中唐) 시대의 대표적인 전기 작가
  • 심전기(沈佺期, 656년 ~ 714년) : 초당(初唐) 시대의 심전기 & 송지문, 성당(盛唐) 시대의 이백 & 두보, 중당(中唐) 시대의 한유 & 백거이는 각 당 시대의 대표적인 궁정 시인이다.
  • 심여균(沈如筠) : 성당(盛唐) 시대의 시인, 대표적인 작품으로 《규원(閨怨)》 등이 있다.
  • 심천운(沈千運) : 성당(盛唐) 시대의 시인, 대표적인 작품으로 《고가(古歌)》 등이 있다.

3.3. 송 시대

  • 황태비 소정귀비 심씨 (皇太妃 昭靜貴妃 沈氏, 994년 ~ 1076년) : 북송 제3대 황제 송 진종 조항(宋 眞宗 趙恒)의 황비(皇妃)로서,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郞 平章事)와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를 지낸 재상 심륜(沈倫, 909년 ~ 987년)의 손녀이며, 광록소경(光祿少卿) 심계종(沈繼宗)의 딸이다.
  • 심괄(沈括, 1031년 ~ 1095년) : 송나라 때 최고의 대학자 겸 관료. 세계 최초로 나침반을 발명하였다고 전해진다.
  • 부인 심금남 (夫人 沈金男) : 북송 제8대 황제 송 휘종 조길(宋 徽宗 趙佶)의 후궁(後宮)이다.

3.4. 명 시대

  • 심만삼(沈万三, 沈萬三) : 중국 역사상 아주 전설적인 인물로 중국 재벌의 상징이다. 심만삼은 원나라의 중대부 심우의 장남으로 원말 ~ 명초 중국 최고의 대부호였다. 중국 역사상 최대 부자였던 심만삼은 중국 천하에 그의 땅이 없는 곳이 없을 정도였고, 그의 재물은 중국 천하를 뒤덮을 정도였다고 한다. 중국 최고의 수상도시 주장(周庄)을 건설한 사람이 바로 심만삼이다. 주장(저우장)은 중국 강소성 곤산시와 상하이 사이에 위치한 중국 강남의 고전 수향으로 동양의 베니스(베네치아)로 불리며 세계적인 유명 관광지가 되었다. 2003년에는 '중국 역사 문화 명진'으로 지정되었다. 심만삼의 대장원인 주장(周庄)에는 그의 100칸짜리 대저택 심청(沈厅)이 심수로(沈水路)변에 가장 크고 화려하게 건설되어 있다. 심만삼은 사후 지금까지도 중국에서 재물과 보물을 불러오는 재신(財神)으로 받들어 모셔지고 있다. 특히 심만삼은 명나라의 초대 황제 주원장(朱元璋)의 절친이었고, 홍건적의 수장이었던 주원장이 명나라를 건국하는데 큰 공헌을 하였지만, 주원장은 명나라 황제가 되자 심만삼을 배신하여 멀리 운남으로 귀향을 보낸다.
  • 심주(沈周, 1427년 ~ 1509년) : 중국의 대표적인 문인 화가. 남종 문인화 오파(吳派)의 시조.
심석전(沈石田)으로 더 많이 알려졌다. 강남의 시화로 알려진 문인 가계에서 태어났으며 부친 항(恒), 숙부 정(貞), 조부 징(澄), 동생 빈(?) 모두 시·서·화에 능하였다.
  • 심유경(沈惟敬) : 임진왜란 때 명나라 유격장군으로 조선에 파견되어 일본군 총사령관 고니시 유키나가와 강화 협상을 주도한 명(明)나라 사신
  • 심사현(沈思賢) : 임진왜란 때 조선에 참가한 명나라 장군.
임진왜란 때 명나라 종2품 아장 겸 경략 겸 원임 통판 겸 동지사로 조선에 들어와 명나라 사신 심유경의 왜군과의 협상에 큰 역할을 하였다.
  • 심일관(沈一貫)은 1568년(융경제 2년)에 진사(進士)가 되었다. 사관(史館)과 이부시랑(吏部侍郞)을 거쳐 1594년(만력제 22년) 예부상서(禮部尙書)로 입조하여 동각대학사(東閣大學士)가 되어 기무(機務)에 참여하였다.
    그 뒤 호부상서(戶部尙書), 무영전대학사(武英殿太學士), 이부상서(吏部尙書), 건극전대학사(建極殿大學士) 등을 거쳐 1601년(만력제 29년) 내각을 총괄하는 내각대학사 수보 (內閣大學士 首輔, 수상)가 되었다.
    임진왜란 때 명군의 조선 파병을 적극 건의하여 성사시켰다.
    반동림당의 영수로서 동림당 예부상서 심리(沈鯉)와 불화하여 그를 탄핵하다가 1606년(만력제 34년) 심리와 함께 파직되었다. 사장(詞章)에 능했다.
  • 심경(沈璟, 1533년 ~ 1610년) : 격률파(格律派)의 대표. 중국 명대의 희곡작가. 시문에 능했고 행서와 초서를 잘 썼다.
  • 심사충(沈士充) : 중국 명나라 말기(17세기 후반)의 문인화가. 운간파(雲間派)의 시조.
  • 선시 심씨(選侍 沈氏) : 명나라 제9대 황제 명 홍치제 주우탱(明 弘治帝 朱祐樘)의 후궁(後宮)이다. 이름은 심영동련(沈䖅燑蓮)으로 심정례(沈廷禮)의 딸이며 심부(沈溥)의 누나이다. 홍치 초에 궁에 들어왔는데 효종(홍치제 주우탱)이 여인들 중에 글을 아는 자를 시험할 때 1등하여 '여학사(女學士)'라는 칭호를 얻었다.

​ * 영숙현비 심씨(榮淑賢妃 沈氏, ? ~ 1542년) : 명나라 제10대 황제 명 정덕제 주후조(明 正德帝 朱厚照)의 후비(後妃)이다.

​ * 황귀비 심씨(皇貴妃 沈氏, ? ~ 1581년) : 명나라 제11대 황제 명 가정제 주후총(明 嘉靖帝 朱厚熜)의 황비(皇妃)이다.

​ * 안비 심씨(安妃 沈氏) : 명나라 제11대 황제 명 가정제 주후총(明 嘉靖帝 朱厚熜)의 후비(後妃)이다.
  • 비 심씨(妃 沈氏) : 명나라 제16대 황제 명 숭정제 주유검(明 崇禎帝 朱由檢)의 후비(後妃)이다.

3.5. 청 시대

  • 심전(沈銓, 1682년 ~ 1760년) : 청조 건륭제 때의 문인 화가.
  • 심덕잠(沈德潛, 1673년 ~ 1769년) : 청조 건륭제 때의 문장가, 시인, 예부시랑
  • 심보정(沈葆楨, 1820년 ~ 1879년) : 청(淸)나라 말기의 대신(大臣)으로 임칙서(林則徐)의 사위이다. 도광(道光) 27년(1847)의 진사(進士) 출신으로 벼슬은 서길사(庶吉士), 편수(編修), 감찰어사(監察禦史), 광요구남도도대(廣饒九南道道台) 등을 지냈다. 1861년에 증국번(曾國藩)이 그를 안경대영(安慶大營)으로 청해서 중용했다. 그 후에 강서순무 겸 병부시랑, 복건선정대신(福建船政大臣), 흠차대신 겸 총리각국사무아문대신, 양강총독(兩江總督) 겸 남양대신(南洋大臣)을 지냈다. 남양해군(南洋海軍)을 창설하고 일본의 대만(台灣) 침략음모를 격퇴했다. 양무운동의 중요인물이며, 대만 역사에서도 중요한 인물이다.
  • 심계분(沈桂芬, 1818년 ~ 1880년) : 청(淸)나라 말기의 대신(大臣)으로 도광 27년(1847년) 진사(進士)로 서길사에 임명되어 이홍장(李葆桢), 심보정(沈葆楨), 곽숭도(郭嵩焘) 등과 같은 해에 동관하였고, 함풍 7년(1857) 내각학사(內閣學士) 겸 예부시랑을 지냈다. 동치 2년(1863년)에는 호부좌시랑 겸 산서순무(山西巡撫)로 아편 재배를 엄금하였다. 동치 6년(1867) 군기대신 겸 총리각국사무아문대신을 맡아 이홍장 · 마신이 · 하경 · 심보정 등과 함께 각 성의 양무운동에 대한 지지 운동을 전개하여 양무운동 중앙지도자 중 한족대표가 되었다. 동치 9년(1870년) 병부상서가 되고, 동치 11년(1872년) 태자소보(太子少保)를 겸임하였다. 같은 군기대신이자 총리각국사무아문대신 이홍조(李鴻藻)와 결탁해 청 말기의 극심한 파벌을 양성했다. 광서초년(1875년)에 파면됐다가 복직했다. 복직 후 당나귀 수레를 고용해 상조를 한 적이 있어 '나귀차 재상'으로 불렸다.

3.6. 심가본

심가본(沈家本, 1840년 8월 19일 ~ 1913년 6월 9일)은 청(淸)나라 말기의 대신(大臣)으로 아버지 심병옥(沈丙莹)은 1845년(도광 25년) 진사에 급제하여 형부주사(刑部主事), 형부낭중(刑部郎中) 등을 지냈다.
심가본(沈家本)은 1883년(광서 9년) 진사에 급제하여 형부낭중(刑部郎中)을 지내고, 1893년 천진지부(天津知府), 1897년 보정지부(保定知府)를 거쳐, 1900년 직이안찰사(直隶按察使)로 있을 때, 의화단 운동이 일어나 8국 연합군(八國聯軍)이 보정(保定)에 진입하자 그 책임을 물어 몇 개월간 옥에 갇혔다. 1901년 옥에서 풀려나오자, 형부우시랑(刑部右侍郎)이 되고, 1907년 헌정편사관(憲政編査館) 1등 자의관(一等 諮議官), 수정법률대신 겸 대리원 정경(修订法律大臣 兼 大理院 正卿), 법부우시랑(法部右侍郎), 1910년 자정원 부총재(资政院 副总裁, 청나라 말기 국회 부의장) 등을 역임하였다. 1911년 법부좌시랑(法部左侍郎)을 거쳐, 10월 10일 신해혁명이 일어나자 11월 2일 원세개(袁世凯)는 청나라의 내각총리대신이 되어 청나라의 모든 군권과 대권을 장악하고 신해혁명군을 진압하게 되는데, 심가본은 원세개 내각(袁世凯 內閣)의 사법대신(司法大臣)이 된다. 그러나, 1912년 2월 11일 원세개 손문의 밀약으로 청나라가 멸망하고 공화정인 중화민국(中華民國)이 들어서게 되고 1912년 3월 10일 원세개가 손문(孫文)의 뒤를 이어 중화민국 제2대 임시 대총통이 되자 심가본은 사법대신에서 물러난다.

3.7. 심균유

심균유(沈鈞儒, 선쥔루, 1875년 1월 2일 ~ 1963년 6월 11일)는 중화인민공화국 초대 대법원장이다.
1904년(광서제 30년) 진사에 급제하여 1905년 일본 명문 사립 대학 호세이 대학(法政大學, 법정대학)에 유학하였다. 1907년 청나라로 돌아와 1909년 저장성 자의국 부의장(浙江省 諮議局 副議長, 저장성 지방의회 부의장)이 되었다.
1911년 신해혁명이 일어났을 때, 절강도독부 경찰국 국장(浙江都督府 警察局 局长, 저장성 경찰청장), 절강성 교육국 국장(浙江省 教育局 局长, 저장성 교육청 교육감)을 지냈다.
1912년 중국동맹회(中國同盟會, 중국 국민당의 전신)에 가입하였다.
1922년 중화민국 북경정부 참의원 비서장(北京政府 參議院 秘書長, 중화민국 북경정부 상원의회 비서실장 겸 사무총장)을 지내고, 1926년 장제스(蔣介石)가 이끄는 중국 국민당 북벌군이 저장성을 함락시키고 임시정부를 세우자, 저장성 임시정부 정무위원 겸 비서장(浙江省 临时政府 政务委員 兼 秘書長, 저장성 임시정부 국무위원 겸 비서실장)이 되었다.
1928년 상해법과대학 교무장(上海法科大学 敎務長, 상해법과대학 총장)이 되었을 때, 4·12 사건(四一二 政变, 4·12 정변)으로 구금되었다가 석방되었다.
1933년 중국민권보장동맹(中國民權保障同盟)에 가입하였다.
1935년 상해문화계 구국회(上海文化界 救國会)를 조직하고, 1936년 전국 각계 구국연합회(全國 各界 救國聯合会)를 결성하였다. 같은해 11월, 칠군자 사건(七君子 事件)으로 국민당 정부에 체포되어 유명한 칠군자(七君子) 중 한 사람이 되었다.
1937년 중일 전쟁 발발 후 풀려나, 1939년 통일건국동지회(统一國同志會)를 결성하고 1941년 황염배(黄炎培) 등과 중국민주정단동맹(中國民主政團同盟)을 발족하였다.
1944년 중국민주정단동맹이 중국민주동맹(中國民主同盟)으로 개칭되고, 중앙상무위원(中央常務委員)으로 선출되었다.
1945년 중일전쟁이 끝나고, 중국인민구국회 주석(中國人民救國会 主席)을 맡았다.
1946년 중국민주동맹을 대표하여 중국정치협상회의(中國政治協商會議)에 참가하였다.
1947년 중국 국민당 정부가 중국민주동맹을 단속하자 홍콩에서 민주동맹 1기 3중전회를 주재하고, 중국 공산당과 합작할 것이라고 성명하였다.
1949년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中國人民政治協商會議) 제1기 전체회의에 참석하여 중앙인민정부위원(中央人民政府委員)에 당선되었다.
1949년 ~ 1954년 초대 중화인민공화국 최고인민법원 원장(最高人民法院 院長, 대법원장)을 역임하였다.
1949년 ~ 1954년 제1기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 전국위원회 부주석(中國人民政治協商會議 全國委員會 副主席, 정협 전국위원회 부의장)을 역임하였다.
1954년 ~ 1959년 제2기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 전국위원회 부주석(中國人民政治協商會議 全國委員會 副主席, 정협 전국위원회 부의장)을 역임하였다.
1959년 ~ 1963년 제3기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 전국위원회 부주석(中國人民政治協商會議 全國委員會 副主席, 정협 전국위원회 부의장)을 역임하였다.
1949년 ~ 1955년 제1기 중국민주동맹 중앙 부주석(中國民主同盟 中央 副主席)을 역임하였다.
1955년 ~ 1960년 제2기 중국민주동맹 중앙 주석(中國民主同盟 中央 主席)을 역임하였다.
1960년 ~ 1963년 제3기 중국민주동맹 중앙 주석(中國民主同盟 中央 主席)을 역임하였다.
1954년 ~ 1959년 제1기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회 부위원장(全國人民代表大會 常務委員會 副委員長, 국회 부의장)을 역임하였다.
1959년 ~ 1963년 제2기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회 부위원장(全國人民代表大會 常務委員會 副委員長, 국회 부의장)을 역임하였다.
중국정치법률학회 부회장(中國政治法律學會 副會長)을 역임하였다.

3.8. 마오둔

마오둔(茅盾, 모순, 1896년 7월 4일 - 1981년 3월 27일)은 중화인민공화국의 소설가이자 마르크스-레닌주의 문학가이다. 자는 안빙(雁氷)으로, 본명은 심덕홍(沈德鴻, 선더홍), 별명은 심안빙(沈雁氷, 선옌빙), 필명은 마오둔(茅盾, 모순)이다. 저장성 가흥(浙江省 嘉興) 출신으로, 초대 중화인민공화국 문화부 부장(문화부 장관)을 역임하였다.
1921년 중국공산당에 입당하여 1926년 마오쩌둥의 비서를 맡았다. 이후, 중국공산당 문화 요원으로 활동하다가 1949년 10월 중화인민공화국 정부 수립 후에 마오쩌둥의 비서직을 다시 맡았고, 초대 중화인민공화국 문화부 부장(문화부 장관, 1949년 ~ 1965년), 초대 중국작가협회 주석(1949년 ~ 1981년), 제4기 · 제5기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 전국위원회 부주석(1965년 ~ 1981년) 등을 역임하였다. 1957년 마오쩌둥의 소비에트 연방 방문을 직접 수행하였다. 문화대혁명 기간에는 홍위병과 사인방의 공산당 탄압 간부 명단에서 제외되었고, 사인방의 정치적 보호를 받았다. 사망 직전에 후야오방에게 공산당 당적 회복 청원서를 제출하여, 1921년 이후로 문화대혁명 전까지의 중화인민공화국 간부로서의 경력과 활동 등을 인정받아 공산당원 당적을 회복하였다. 중국 인민들에게서 거둔 거액의 인세 수입을 중화인민공화국 문화부에 기탁하였다. 1981년 베이징에서 사망하였다. 1982년부터 중국 최고 권위의 문학상인 마오둔 문학상이 개최되고 있다. 현대 중국 최고의 장편소설 작가로 평가된다.
아내 공덕지(孔德沚, 쿵더즈)도 중국 공산당원이었고, 남동생 심택민(沈澤民, 선쩌민, 1900년 6월 23일 ~ 1933년 11월 20일)은 중국 공산당 초기 당원으로 28인의 볼셰비키로 활동하면서 제11대 중국공산당 중앙선전부 부장(장관, 1931년 1월 ~ 1931년 4월)을 역임하였으나 1933년 34살의 나이로 요절하였다. 심택민의 아내 장금추(张琴秋, 장친추, 1904년 11월 15일 ~ 1968년 4월 22일)도 남편을 따라 중국 공산당에 가입하여 28인의 볼셰비키로 활동하였고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방직공업부 부부장(차관)을 역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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