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0-18 03:16:25

오카다 갱생관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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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사건 경위
2.1. 오카다 갱생관의 설립과 배경2.2. '모범 시설' 오카다 갱생관2.3. '모범 시설'의 실체2.4. 두 기자의 목숨을 건 잠입취재
3. 사건 이후4. 그 외5. 유사 사건

1. 개요

岡田更生館事件

1946년부터 1949년에 걸쳐 연합군 점령하 일본에서 시설 수용 부랑자를 대상으로 조직적인 인권 유린 및 폭행, 살인이 자행되었던 사건.

2. 사건 경위

2.1. 오카다 갱생관의 설립과 배경

태평양 전쟁 직후 일본에서는 미군이 대대적으로 가한 공습 때문에 전국 각지의 주요 도시가 파괴되었고 이에 따라 살 곳과 가족을 잃은 전쟁 고아들이 넘쳐났다. 또 히키아게샤나 전쟁에서 돌아온 귀환병들도 당연히 갈 곳을 잃고 부랑자가 될 수밖에 없는 처지에 놓였다. 이런 상황에 당시 일본 사회는 부랑자가 폭증하는 문제로 골머리를 앓았다. 종전 직후 시점에서 오카다 갱생관이 있었던 오카야마현도 1946년 9월 당시 기준으로 오카야마 시내에서만 약 500명 이상, 현 전체를 통틀어서 미성년 부랑자만 무려 약 2천 명이 넘어가는 지경이었다.

이렇게 부랑자가 늘어나다 보니 개중에는 범죄를 저지르는 사람들도 나오게 마련이었다. 부랑자들이 저지르는 범죄로 주민들이 피해를 입고 지역의 치안이 악화되면서 부랑자 문제는 자연히 사회 문제로 비화되었다. 이 문제를 좌시할 수 없었던 GHQ는 일본 정부에 부랑자 문제를 일소하라고 명령했고 이에 따라 부랑자들을 구제한다는 명목으로 전국에 부랑자 수용시설 62개소를 건립했다. 이때 설립된 시설 중에 바로 오카야마현 키비군 오카다촌(現 쿠라시키시)에 건립된 현립 오카다 갱생관이 있었다.

2.2. '모범 시설' 오카다 갱생관

오카다 갱생관은 당시 오카야마현 내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부랑자 수용시설이었다. 수용 인원이 한창 많았을 적에는 500명을 넘겼을 정도였는데 수용자 대부분은 주로 성인 남성이었으나 어린이와 영유아, 여성 수용자들도 있었다. 설립 초기에는 연령과 성별에 무관하게 부랑인과 극빈층 전반을 수용했다가 독지가들 사이에서 아이들에게 적합한 환경을 제공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면서 1947년 4월 아동 전용 시설이 건립되기 시작한 것과 맞물려 오카다 갱생관의 아동 수용자 67명은 아동 전용 수용시설 '소년의 언덕(少年の丘)'으로 옮겨갔다.

시설은 한적한 전원지대에 있었고 갱생관 인근에는 유명 추리소설 작가 요코미조 세이시가 가족과 함께 피난 생활을 했던 민가가 있었다.[1] 당시 증언에 따르면 외부에서 보기에 오카다 갱생관은 건물 전체가 흰 담장에 둘러싸인 크고 아름다운 건물이었다고 한다.

시설 건립 다음해에는 수용자들로 구성된 자체극단 '갱생연예단(更生演芸団)'이 모금 운동의 일환으로 현내 순회 공연을 하기도 했다. 정부가 실시한 시찰에서도 딱히 문제점이 발견되지 않았고 각종 사회사업에도 힘써 이른바 '모범 시설'로 알려지고 있었으나...

2.3. '모범 시설'의 실체

세간에 모범 시설로 알려진 오카다 갱생관의 실태가 드러나는 계기의 방아쇠를 당긴 사람은 시설에 수용되었다가 가까스로 탈출에 성공한 자칭 '방랑시인' 키타가와 토이치로(北川冬一郎)[2]라는 사람이었다. 그는 오카다 갱생관의 실태를 언론사에 제보함으로써 세상에 실태가 알려지는 데 기여했다.

키타가와의 증언에 따르면 그는 1949년 1월경 일자리를 구하기 위해 쿠라시키시에 와 있었지만 일용직 일자리조차 구하지 못해 공원 벤치에서 노숙 생활을 하던 참이었다. 그런 그에게 오카다 갱생관의 직원이 접근하여 '시설에 있는 작업장에서 일하면 일당 300~400엔은 벌 수 있다.'는 말로 꾀어 시설에 입소시켰다. 1949년 기준으로 300~400엔은 2020년대 기준으로 약 1만 5천~2만 엔[3]에 상당하므로 사실이라면 상당히 좋은 임금 조건이었다. 이 직원이 오카야마현 회계과 주사 직급 공무원을 겸했다는 점 때문에 키타가와는 그의 말을 쉽게 믿었던 모양이다.

그러나 키타가와는 오카다 갱생관에 도착하자마자 강제로 삭발을 당하고 감금되었다고 한다. 그의 증언에 따르면 시설 수용자들에게는 '서열'이 주어졌고 '작업장'이라고 부르는 3곳 중 하나에 수용되었다. 부랑자들은 일단 제1, 제2작업장에 수용되었고 지도원의 마음에 드는 소위 '우등생'들만 제3작업장으로 올라갈 수 있는 권한이 주어졌다. 오카다 갱생관은 외부에서 시찰을 나오면 일종의 특별실이라고 할 수 있는 제3작업장으로만 시찰자들을 안내했다. 참고로 제3작업장은 가건물로 된 2층 건물이었는데 1층이 멍석 창고, 2층이 주거공간이었다. 그러나 제1, 제2작업장은 시골집에나 있을 법한 흙벽으로 세운 조악한 광이었다.

수용자들은 고작 다다미 1장 넓이밖에 안 되는 공간에서 여러 명이 함께 생활해야 했고 밤에는 도주를 방지한다는 명목으로 알몸으로 마대자루에 들어가 잠잘 것을 강요당하는 등 노예보다도 못한 취급을 받았다. 이런 상황에 목욕도 제대로 할 수 없으니 시설의 위생 상태는 더럽기 그지없어 결핵 따위 질병이 만연했다. 식사도 아침에는 거의 물이나 다름없는 묽은 미음 비슷한 죽, 점심도 빵이나 보리밥 정도가 고작이었다. 당연히 이런 지옥 같은 환경을 버티지 못하고 탈출을 시도한 수용자도 있었으나 곧바로 붙잡혀 끌려와 집단폭행을 당한 끝에 숨을 거두는 경우가 속출했다.

탈주자들이 폭행 끝에 목숨을 잃고 시설에 남은 수용자들도 극심한 영양실조 상태에서 옴이 생긴 자리를 긁다가 생긴 상처가 원인이 되어 죽기도 할 정도였지만 오카다 갱생관 측은 대외적으로는 철저하게 '모범 시설'로 위장하였다. 시설의 상태가 막장으로 치닫고 그나마 유일한 희망이었던 현청 공무원의 시찰마저도 지도원들을 이용해 그럴듯하게 넘어가는[4] 모습을 목격한 끝에 카타가와는 결국 1949년 2월 중순에 탈출을 결심했다. 그는 시찰원들을 위해 준비된 공연에서 사용된 의자를 면사무소에 반납하러 가는 도중에 도망친다는 계획을 세웠고 운 좋게 성공하여 지옥 같은 갱생관 시설을 탈출하였다. 키타가와는 그냥 경찰에 신고하면 경찰이 지역사회의 추문을 은폐할까 우려하여 오카야마를 벗어나 마이니치신문 오사카 본사에 사건을 제보하기로 결심했다. 마이니치신문은 키타가와의 제보를 접수하고 오카다 갱생관의 추악한 실태를 밝혀내기 위해 사전 준비에 착수하였다.

2.4. 두 기자의 목숨을 건 잠입취재

마이니치신문 오사카본사는 키타가와의 제보 내용이 워낙 황당무계하고 충격적이라 당초에는 반신반의하는 분위기였다. 그러나 현지 조사를 한 결과 인근 주민들로부터 오카다 갱생관에서 정기적으로 시신이 실려 나온다는 증언이 나오자 당시 사회부 기자였던 오오모리 미노루(大森 実)를 중심으로 잠입취재 계획을 세웠다. 상황이 상황인 만큼 취재계획은 신중에 신중을 기해야 했기에 오카야마 지방검찰청으로부터 협조를 얻어 잠입 다음 날 정오에 지원팀이 출동하기로 하는 한편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서 마을 변두리의 여관에 동료 기자들과 카메라맨 등을 대기시키는 등 사전 준비에도 철저하였다.[5]

그리고 1949년 2월 16일 부랑인으로 가장해 오카다 갱생관에 잠입한 오오모리와 동료 기자 코니시 켄키치(小西健吉)는 키타가와가 증언했던 참상을 생생하게 목도하였다. 한편 오오모리는 수용자들로부터 시설의 실상에 대한 증언을 모으는 한편 대범하게도 검찰의 지원팀이 도착하기 전에 시설에서 탈주한다는 계획을 떠올렸는데 이는 수용자들이 탈출에 실패해서 붙잡혔을 때 당한다는 일을 자신이 실제로 체험해 보려는 일종의 지적 호기심에 가까운 의도도 있었다고 한다. 잠입 다음 날인 2월 17일 오전 오오모리와 코니시는 갱생관을 탈출했으나 10명이 넘는 지도원들에게 추격받아 결국 다시 시설로 끌려왔다. 이후 사무실로 끌려와 집단구타를 당하기 직전 오오모리와 코니시가 진짜 신분을 밝히자 직원들이 당황한 틈을 타 여관에서 대기 중이던 동료들에게 전화를 걸어 도움을 요청하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불과 몇 분 후 시설로 달려온 동료 기자들은 시설의 참상을 그대로 생생하게 증거 사진으로 남길 수 있었다.

오오모리와 코니시의 잠입 취재 덕분에 마이니치신문사는 전무후무한 특종을 잡았으나 일단 오카야마현 측의 반응을 살피기 위해 1949년 2월 18일 조간신문에는 일부러 외부 취재기사만 편성했다. 그리고 마이니치신문의 예상대로 당시 오카야마현 지사 니시오카 코키치(西岡広吉)는 격분하면서 기자회견을 열어 기사 내용을 부정하고 나섰다.[6] 이에 마이니치신문은 니시오카 지사의 기자회견 바로 다음 날 오오모리와 코니시의 잠입 취재 내용과 현장 사진을 포함한 기사를 메인으로 게재해 니시오카 지사 측의 반론을 정면으로 논파했다.

그러자 이번에는 오카다 갱생관 측에서 엔자이를 주장하고 나섰다. 오카다 갱생관 관장은 정신적으로 제압당한 수용자들을 이용해 자신들의 정당성을 주장하며 기자들을 모아 반박 회견을 열었는데 갱생관 측은 사전에 목욕을 시키고 옷을 갈아입혀 몸가짐을 깔끔하게 한 수용자 200여명을 본관 2층 강당에 모아 앉혀 놓고는 관장이 울먹이는 목소리로 "만약, 정말로 제가 악행을 저질렀다고 생각하시는 분이 계시다면, 지금 여기서 현과 국가 공무원 여러분들 앞에서 손을 들어 주십시오"라고 호소하는 뻔뻔한 모습을 보였다.[7] 그러나 이 때 잠입취재 기간 동안 시설 수용자들과 안면을 텄던 오오모리가 회견장에 난입해 수용자들을 필사적으로 설득한 결과 현장에서 시설의 실상을 고발하는 사람들이 속출하면서 읍소 전략이라는 관장의 얄팍한 술수는 결국 헛일이 되고 말았다.

3. 사건 이후

경찰 수사 결과 오카다 갱생관 인근 산에 설치된 화장장에서 백골 시신이 대량으로 발견되는 등 살인의 결정적인 증거가 드러났다. 공식 사망자는 76명으로 집계되었으나[8] 사건이 알려지기 전 한 달 동안 5~60명은 죽었다는 증언으로 보아 실제 사망자는 더 많았으리라 추측되었다. 이 때문에 오카다 갱생관 직원 등 관계자 10여 명 이상이 체포되는 대사건으로 발전했으나 범인들 중 살인죄 등으로 기소된 사람은 단 한 명도 없고 전부 형이 훨씬 가벼운 업무상 횡령 및 사문서위조 혐의만 적용되었다. 이와 관련해서는 당시의 재판 자료가 어째서인지 거의 남지 않아 자세한 사유는 알 수 없으나 현 차원에서 조직적으로 기록을 은폐했을 가능성이 있다.

후에 밝혀진 바에 따르면 이 사건은 오카다 갱생관 관장이 주범이 된 대규모 횡령으로 드러났다. 이들은 당시 극빈층이나 부랑자 수용 시 현에서 지급되는 보조금을 노리고 이런 짓을 저질렀는데 관장이 횡령한 운영비의 총액은 현재 화폐가치로 약 4500만 엔 이상에 해당하는 액수였다고 한다.

사건 이후 오카다 갱생관은 조직을 개편하고 이름도 '오카야마현 키비 요양소(岡山県吉備寮)'로 바꾸어 새로 개관했으나 1955년에 폐쇄되었다. 1956년에는 또 한 차례 개편했으나 얼마 못 가 1957년에 재차 폐쇄되었고 이후 시설 자리에는 한때 민간 병원이 들어섰다가 이 역시 문을 닫았다.

한편 오카야마 시내에서 부랑인 수용을 담당했던 현청 공무원 오기노 한로쿠(荻野半麓)는 사건 이후 퇴직했다. 그는 1949년에 출판한 저서 <부랑자와 함께(浮浪児とともに)>에서 당시 수용자들에게 자행된 폭력에 대해 수용자들에 대한 통제 수단으로 이 정도라면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고 술회하면서 "양식이 무뎌져 있었던 당시의 자신이 그저 수치스럽다."라고 심경을 밝혔다.

4. 그 외

  • 지역 향토사를 다룬 서적에서는 현에서 주관하는 사회복지시설에서 인권은 물론 인명까지 경시되는 운영이 자행된 결과 수많은 희생자가 나온 이 사건을 두고 지역 복지행정 측면에서도 전례 없는 오점을 남긴 사건이라고 크게 비판했다.
  • 1988년 9월에 사망한 당시 수용자들을 추모하는 '봄의 오가와 마을(春の小川村)'이라는 모임이 결성되었다. 이후 이 모임에서는 희생자들의 시신이 불법 화장되어 암매장된 곳에 추모비를 세우고 위령제를 지내 왔으나 사건으로부터 70여 년이 지난 2023년 기준으로 인근 절의 주지 1명만이 활동한다.
  • 부랑인 수용시설 입소자를 대상으로 자행된 인권유린 사건이라는 점에서 29년 후 한국에서 일어난 부산 형제복지원 사건과 유사한 점이 많다. 다만 형제복지원 사건의 경우 멀쩡하게 가족이 있는 사람들까지 부랑인으로 간주하고 마구잡이로 수용했다는 점에서 오카다 갱생관 사건과는 약간 차이가 있다.
  • 일본의 다큐멘터리 예능 '기적체험! 언빌리버블' 2020년 9월 3일 방영분에서 '진상을 폭로하라! 목숨을 건 잠입수사!(真相を暴け!命がけ潜入捜査!)'라는 제하에 이 사건이 소개되었다.
  • 이 사건을 세상에 알리는 데 큰 역할을 했던 오오모리 미노루는 1965년 베트남 전쟁 현지 취재에서 미군의 북베트남 한센병 병원 폭격 보도 기사 사건[9]에 연루되어 이듬해인 1966년에 마이니치신문을 퇴사한 후 독립했다. 이후 오오모리 국제 연구소를 설립해 1967년부터 1970년까지 주간신문 <도쿄 옵저버>를 발간했다. 1974년 미국으로 이주했고 2010년 폐렴으로 사망했다.

5. 유사 사건

  • 부산 형제복지원 사건: 이쪽은 전술되었듯 부랑인이 아닌 사람들까지 마구잡이로 납치, 수용한 점에서 매우 악질적이다.
  • 장항 수심원 사건: 정신장애인 대상의 인권유린 사건. 이 사건도 형제복지원과 비슷하게 정신장애가 없는데도 가족 간의 재산 분쟁 등으로 강제 입소당한 사람들이 상당수 있었다.
  • 소쩍새 마을 사건


[1] 오카야마는 요코미조의 부친의 고향이었고 요코미조 자신도 1945년 4월부터 1948년 8월까지 이곳에서 피난 생활을 했다. 이런 인연이 있기 때문에 요코미조의 대표작인 긴다이치 코스케 시리즈에서는 오카야마가 작중 배경으로 자주 등장한다. [2] 본명 불명. 당시 20대로 동인 잡지에 시를 기고한 적이 있었다고 한다. 사건 당시의 신문 기사에는 이름이 후지타 켄이치(富士田健一)로 나왔다. [3] 한화로 약 14만~19만원 [4] 이 때문에 표면상으로는 시설에서 아무런 문제점이 발각되지 않았다. 여기에는 지도원들뿐만 아니라 위에 언급된 '우등생'들도 이용되었다. [5] 워낙 위험한 계획이었기 때문에 본사에서도 반대했으나 오오모리 미노루가 취재의 필요성을 역설했고 결국 본사는 잠입취재를 허가했다. 오카야마 지검의 검사도 오카다 갱생관을 모범시설로 인정했으나 한 기자가 촬영한 증거 사진을 보자 태도를 바꿔 잠입취재에 협조하였다. 또한 이 잠입취재 계획은 특성상 마이니치신문 내부에서도 극비 사항으로 취급되었다. [6] 전술되었듯 오카다 갱생관 측이 그 동안 지자체와 경찰의 정기 시찰을 교묘한 눈속임으로 계속 넘겨 왔기 때문에 실상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마이니치신문의 기사를 근거 없는 날조 기사라고 생각했을 가능성이 있다. [7] 관장의 말에 수용자들은 전부 고개를 숙인 채 잠자코 앉아 있을 뿐 손을 드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고 한다. [8] 3년 동안 저 정도 죽었다는 거면 2주마다 1명씩 죽었다는 말이다. 이쯤이면 사실상 부랑자 수용을 명분삼은 살인공장이라 봐도 무방할 지경. 심지어 사망률로 따지면 형제복지원보다도 높다! [9] 1965년 10월 3일자 마이니치신문 조간에 미군이 북베트남의 한센병 병원에 폭격을 자행한 것은 북베트남을 촬영한 기록 필름에 비추어 보아 사실이라는 취지의 기사가 실렸는데 이에 대해 당시 주일 미국대사였던 에드윈 라이샤워( 매큔-라이샤워 표기법의 그 라이샤워가 맞다)가 사실무근이라면서 오오모리의 이름을 거론하며 기사를 비판한 사건. 사건 이후인 2011년 2월 28일자 마이니치신문에 게재된 라이샤워의 전 특별보좌관의 증언에 따르면 당시 라이샤워는 정세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상태에서 해당 발언을 했으며 이후 자신의 외교관 인생에서 최악의 실수였다며 오오모리에게 사과하고 싶다는 뜻을 밝혔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