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3-12-14 14:28:31

예수 그리스도 후기 성도 교회/역사



1. 개요2. 조셉 스미스의 교회 창설
2.1. 시대 배경2.2. 첫번째 시현2.3. 몰몬경 출판2.4. 교회 설립2.5. 박해와 갈등2.6. 조셉 스미스의 사망
3. 2대 교주 브리검 영4. 3대 교주 존 테일러5. 4대 교주 월포드 우드럽 이후

1. 개요

예수 그리스도 후기 성도 교회의 역사는 사실상 미국 유타 주 개척 역사이기도 하기 때문에, 미국사를 공부하면서 이 교파의 역사를 공부하게 되는 경우가 생긴다. 초기에는 다른 교리로 인한 이단 논란과 일부다처제 등으로 인해 박해가 심했다. 현재는 논란의 일부다처제 교리가 폐지되었다. 여전히 이단으로 보는 교단도 있으나 신흥 종교로 인정해주는 추세이다.

2. 조셉 스미스의 교회 창설

2.1. 시대 배경

19세기 초반 당시 미국 뉴욕주 서부 지역은 '타오르는 관구(Burned-Over District)'라는 별명이 있었다. 당시 뉴욕주 서부 지역은 이리 운하의 개통으로 일대에 개발붐이 일면서 수 많은 사람들이 이 지역으로 이주를 하였는데 이들 대부분은 농민으로 전문적으로 신학교육을 받은 성직자가 거의 없다시피 했다. 한편 동시기 미국 전역에서는 대규모 개신교 대부흥 운동인 제2차 대각성 운동(Second Great Awakening)이 유행하고 있었는데, 제2차 대각성의 영향으로 각 교파의 성직자들은 당시 이주민들이 몰리는 뉴욕주 서부 지역으로 이동해 교회를 세우고 전도 활동을 펼치고 있었다. 한편 제2차 대각성의 또다른 영향으로 자신이 하느님의 계시를 받았다고 주장한 '자칭' 전도사들이 생겨났고. 이들 역시 뉴욕주 서부 지역으로 이동해 자신들만의 독자적인 교회를 세우고 있었다. 이렇게 종교적 열망으로 열심히 '불타오르던' 지역이 바로 당시 뉴욕주 서부 지역이었다.

2.2. 첫번째 시현

버몬트에서 이주하고 몇 년 후 스미스가 살던 곳에도 제2차 대각성 운동이 유행하기 시작했다. 스미스는 신앙심 깊은 사람이었지만 뉴욕주 서부 일대에 난립한 수많은 종류의 교회 중 어느 교회에 가입하여야 할지 몰랐다. 각 교파에서는 자신들의 교파로 와야만 구원받고, 하나님이 자신의 교파를 선택했다며 홍보 아닌 홍보를 했는데 이로 인해 스미스는 더욱 더 깊은 갈등 혼돈에 빠진다.

그러던 어느 날, 조셉 스미스는 성경을 읽다가 우연히 야고보서를 읽게 되었는데 야고보서 1장 5절의 구절인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라는 보고 영감을 받아 직접 하나님께 물어보기로 결심하고 장소를 찾기 시작한다. 고민 끝에 자신의 오두막 과 멀리 떨어지지 않은 조용한 숲 (성스러운 숲)에 들어가서 하나님께 기도했고, 기도를 마치자 하나님과 예수가 자신 앞에 나타나는 시현을 보게 되었고, 예수는 그에게 어떤 교파에도 가입하지 말라고 부탁하고 스미스가 그 명령을 따르기 시작하면서 교회의 역사가 공식적으로 시작된다. 이를 보고 첫번째 시현이라고 부른다.[1]

2.3. 몰몬경 출판

첫번째 시현으로부터 3년 후인 1823년, 모로나이라는 이름의 천사가 나타나 아메리카 대륙에 살았던 고대 주민(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기록이 담긴 금판을 찾으라는 명령을 듣고 이를 번역하여 영어 출판하게 된다. 그 책의 이름은 몰몬경(The Book of Mormon)이었다.

2.4. 교회 설립

1830년 4월 6일, 조셉 스미스는 뉴욕 주 페이에트에서 교회를 창립했다. 조셉 스미스는 새로 세워진 교회의 초대 선지자[2]가 되었다. 1831년에 교회 본부를 오하이오주 커틀랜드로 이동하였다. 참고[3] 커틀랜드에서 신자는 2만명 가까이 불어나게 된다. 이에 따라 첫 번째 성전[4]이 지어졌고 조셉 스미스는 커틀랜드를 "새 예루살렘"을 세울 에덴 동산이자 교회의 성지라고 여겼다. 미주리주 잭슨 카운티에는 교회의 지부가 건설된다.

2.5. 박해와 갈등

초기 미국 정부와 개신교인들은 몰몬에 경악하여 몰몬을 박해하였고 신자들은 가는 곳마다 박해에 시달리며 쫓겨나기 일쑤였다. 조셉 스미스는 뉴욕에서 1826년에 모자와 "선지자의 돌(seer stone)"을 이용하여 보석을 찾을수 있다고 주장하여 "치안문란죄(disorderly person)" 혐의로 체포되었다. 경범죄로 풀려난 이후 그는 오하이오로 떠나게 된다.
1837년 1월에는 커틀랜드 은행을 설립했다가 부도가 나서 불법 지폐를 발행한 혐의로 1000불의 벌금형을 받은 후 채권자들을 피하여 파산을 선포했다. 교회는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인해 미주리주 파웨스트 지역으로 이동하게 된다. 하지만, 기존 미주리 주 주민들과 몰몬들은 충돌하게 되었고, 그 결과 주지사의 추방령으로 교회 본부는 일리노이 주 나부로 이동하게 된다.

몰몬들은 나부에도 성전을 짓고 선교사를 보내며 교회는 성장하게 된다. 몰몬교의 일부다처제는 나부에서 시작된 것이다. 이곳에서도 원 주민들과 신자들간의 갈등은 격화되었다. 나부시의 시장이었던 조셉 스미스는 1844년 대통령 후보에도 출마했다. 일부다처제와 승영(exaltation)을 비판하는 기사를 싣는 나부 익스포지터 신문사의 파괴를 명령하고 민병대를 동원해 인쇄기들을 파괴하는 등 갈등이 고조되었다. 핸콕 카운티는 스미스를 폭동혐의로 체포하려 하지만 스미스는 5,000명의 시민을 민병대로 나부 군단을 조직하고 이에 포드 주지사 역시 민병대를 조직하여 스미스 체포에 나섰다. 주지사의 민병대는 나부를 수색했지만 스미스는 피신하였고 스미스는 1주일 뒤 체포될 것을 알고 되돌아와서 주 정부에 의해 체포된다.

2.6. 조셉 스미스의 사망

조셉 스미스는 재판에 회부되어 감옥에서 재판을 기다리고 있던 중 박해자들과 총격전을 벌이다가 교전으로 사망하였다.
폭도측에서의 공격으로 사망한 것은 사실이지만 스미스가 공격을 지연시키기 위해 발포했다는 기록이 있으므로 교전이 맞다. 폭도는 얼굴에 검은 칠을 한 200명 가량으로 기록되고 있다. 정확히는 교전중에 피스톨 6발을 발포하고 3발로 폭도들을 명중시키고 2층 창문에서 뛰어 내리는 중 등에 2발 맞고 한발은 밖에서 발포된 총알을 맞고 사망했다. HC(교회의 역사) 7권 102페이지 참조. 참고로 이 책은 종교교육원에서 교육자료로도 쓰인다. 형인 하이럼 스미스와 함께 피살당했다. 이후 후임 회장인 브리검 영이 교단을 정비한 뒤 유타주로 이전하게 된다.

3. 2대 교주 브리검 영

1844년 조셉 스미스의 사망 이후 지도자가 사라진 교회는 사분오열될 위기가 찾아왔으나 당시 십이사도 정원회[5] 회장이었던 브리검 영을 주축으로 모이기 시작했다. 교회는 회장 자리는 한동안 궐석인 상태로 십이사도 정원회의 집단 지도 체제 하에 운영되었다. 이후 조셉 스미스의 유지에 따라 당시 멕시코 영토였던 록키 산맥 서쪽으로 이동하는 대이주를 시작하게 된다. 1847년, 솔트레이크 분지에 닿아 '이 곳이 새 땅'이라고 선언하고 자치적인 종교 공동체를 건설하였다. 이들의 초기 정착지는 현재 유타 주의 주도인 솔트레이크 시티가 된다.

이 과정에서 교단의 일부가 무장 봉기를 하여 체류지의 개척민을 습격하여 대부분을 학살했는데, 몰몬 민병대는 캘리포니아로 향하던 이주자들의 포장마차 행렬을 공격, 남녀노소 120명을 학살했다. '메도우산의 대학살'로 알려진 사건이다.

희생자 대부분 아칸소 출신인 희생자들은 밝은 미래에 대한 꿈을 안고 캘리포니아로 이동하던 중이었다, 여섯 살 이하의 어린이 17명만을 살려둔 이 끔찍한 범죄는 시더시티에서 남서쪽으로 대략 56킬로미터가량 떨어진 마운틴 메도스라 불리는 산지의 계곡에서 일어났다. 오랜 세월 동안 교회는 이 대학살과 관련한 자신들의 역할을 축소하려고 했으며, 인디언들에 뒤집어 씌우기도 하고 이 사건과 관련해 유일하게 처형된 잔 D. 리에게 책임을 돌리기도 했다가 2007년에야 사과했다. 기사

몰몬교인들은 농지 개간을 해서 기름진 땅을 일구고 성과를 거뒀다. 일설에 의하면 그들은 유타 땅에 들어와서 그레이트 솔트레이크를 발견하고 여기에 정착하면 물 걱정은 없겠다고 생각했으나, 정작 그레이트 솔트레이크는 식수나 농업용수로 사용할 수 없는 소금물 호수였다. 하지만 주변 산에 있는 만년설을 관개를 해서 정착에 성공했다고 한다.

브리검 영은 유타주를 시작으로 서부 곳곳, 나아가 캐나다 앨버타주에도 몰몬교 정착지를 세웠다. 또한 브리검 영 대학을 비롯해 대학, 기업 등의 설립으로 몰몬 르네상스를 이뤘다. 1850년대에 유타주에는 몰몬 신정 국가가 번성하였다.
몰몬 공동체는 미국-멕시코 전쟁의 승리로 태평양까지 영토를 확장한 미 연방정부와 다시 만나게 되었다. 일단 몰몬이 먼저 연방정부에 고개를 숙이면서 1850년 유타 준주가 신설되었다. 브리검 영은 1851년부터 1858년까지 유타 준주의 준주지사를 맡았다. 교회의 안정적인 정착과 선교 사업 덕분에 교회는 지속적으로 확장되고 불어났다. 교회 초창기인 1850년 경에는 이미 칠레, 이탈리아, 스칸디나비아 반도, 영국 등에 선교사가 파송되었다.

그러나 연방정부는 몰몬이 주장하는 신정 정치와 일부다처제를 이유로 1896년까지 주 승격을 거부하였다. 이로 인해 산발적인 충돌, 심지어 연방정부와의 전쟁이 있기도 하였다. 1857년, 당시 미국 대통령이었던 제임스 뷰캐넌은 유타 준주에 군대를 파견하였고, 그 결과 유타 준주와 미국 사이에 군사적 긴장 관계가 생기기도 했다.
1870년 미국에서 2번째로 여성선거권이 주어졌다. 최초의 여성선거권은 이미 1년전인 1869년 와이오밍 주에서 주어졌으며 두 주 모두 여성인권 상향에 표면적으로 기여한 점은 있다고 해도, 논란이 있는 편이다. 와이오밍은 주로의 승격을 노렸으며[6], 유타의 경우는 약한 정치적 기반을 물량으로 커버하려는 경향이 강했다.[7]
브리검 영은 1877년 8월 29일 76세에 솔트레이크 시티 자택에서 사망했다.

4. 3대 교주 존 테일러

존 테일러는 1880년부터 1887년까지 예수 그리스도 후기 성도 교회 제3대 회장이었다. 그는 조셉 스미스와 하이럼 스미스가 살해됐던 당시 중상을 입었으나 생존했다. 1877년 브리검 영 사망 이후 십이사도 정원회 회장으로 교회를 지도하다가 1880년에 제3대 회장으로 취임했고 제일회장단을 재조직했다. 일리노이주 나부에서 일부다처제를 수용했던 테일러는 여덟 명의 부인을 둔 것으로 전해진다. 1878년, 일부다처제를 한 인물에게 징역형과 벌금을 매기는 것이 합당하다는 연방대법원의 판결이 나왔다. 1882년에는 에드먼드 터커 법이 통과되면서 당시 일부다처제를 시행하고 있던 예수 그리스도 후기 성도 교회의 법인 명의를 해지하고 일부다처제를 실시하는 가정의 자녀들의 상속권을 인정하는 당시 준주의 법안을 무효화하는 등의 조치가 취해졌다. 존 테일러는 일부다처제에 대한 정부의 압박에 저항하며 정부 당국을 피해 은신생활을 하다가 1887년 7월 사망했다.[8]

5. 4대 교주 월포드 우드럽 이후

존 테일러 이후 1889년부터 1898년 9월까지 월포드 우드럽이 4대 지도자가 되었다. 월포드 우드럽은 코네티컷주 출신으로 1833년에 몰몬교에서 침례를 받았고 1839년 사도 직책을 받았으며 50년 이상 십이사도 정원회의 일원으로 활동했다. 월포드 우드럽은 일부다처제 교리를 수용하여 최소 7명의 부인과 34명의 자녀를 둔 것으로 알려진다.[9]
일부다처제 교리로 인한 정부의 탄압으로 수세에 몰린 예수 그리스도 후기 성도 교회는 정부와의 타협을 선택했다. 1890년 연방정부와의 협상을 통해 유타 준주는 유타 주로 승격시키는 조건으로 몰몬 측은 당시 교회 회장이었던 윌포드 우드럽이 성명서를 발표해 일부다처제를 공식적으로 폐지하였다. 반면 몰몬 측의 요구로 여성의 선거권이 인정된다. 사실 협상이 원활하게 된 이유가 남북전쟁의 승리를 통해서 연방은 분리독립 움직임을 무력으로도 진압한다는 의지를 천명한데 있다. 미국의 절반이 떨어져나간 남부연합도 패배시킨 연방이 황량한 서부 한가운데 동떨어진 종교 공동체를 제압하는 건 쉬운 일이었고, 몰몬들도 남부가 말그대로 쑥밭이 된걸 보고 항전보다는 협상을 하자는 쪽으로 기울어졌다. 그리하여 1896년에 와서야 유타 준주는 미합중국의 45번째 주인 유타주로 승격되었고 더 이상 교회와 미 정부간의 갈등은 사라지게 되었다.

1893년, 교회의 랜드마크라고 할 수 있는 솔트레이크 성전[10] 이 건축되었다. 1950년대 이후 교회는 급격하게 발전하였다.[11][12]

[1] 선교사들과 교리교육을 받을 때 선교사들이 가장 먼저 가르치는 내용이 바로 이 첫번째 시현이다. [2] 교회 회장 [3] 교리와 성약 20편 [4] 성전은 교회와 다르다. [5] 선지자 바로 아래 조직 [6] 와이오밍은 1890년 주로 승격하는데 성공한다. [7] 참조 [8] 존 테일러, 예수 그리스도 후기 성도 교회 [9] 월포드 우드럽, 예수 그리스도 후기 성도 교회 웹사이트 [10] 언론에서 대 성전, 대 성당이라고들 하나 이 성전의 역할은 다른 성전들과 기본적으로 다르지 않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 후기 성도 교회 내에서는 단순히 솔트레이크 성전이라고 부르는 편이다. [11] 한 예시로 이전에 8개만 운영중이던 성전이 현재 182개로 불어나는 것을 예로 들 수 있다. 위키백과 참고 [12] 네이버 캐스트에 교회에 대한 역사가 간단하게 서술되어 있고 배경에 대한 내용에 대해 알 수 있다. 다만 위 링크의 기사 일부는 사실과 다르다, '비신앙인을 멀리 하면서 자기들만의 공동체 생활을 하고 있다.'는 표현은 사람들이 흔히 몰몬에 대해 오해하는 부분이며, 몰몬들은 대부분 사회에서 타 종교인을 포함한 다른 사람들과 같이 어울리고 직장 생활을 하며 살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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