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1-01 00:28:30

연비(당나라)

淵毖 (708 ~ 729)

1. 개요2. 행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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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당나라 귀족으로, 고구려 유민 출신이다.

고구려 말기의 실권자였던 대막리지 연개소문의 후예로, 증조부는 연남생이며, 할아버지는 연헌성이고, 아버지는 연현은(淵玄隱)이다. 또한, 외할아버지는 고구려의 마지막 이었던 보장왕이다.

2. 행적

연비의 증조부인 연남생은 당나라 투항하여 고구려 멸망시키는 데 지대한 공을 세웠는데, 덕분에 연비의 아버지인 연현은 때까지 대대로 고위관직을 지냈다. 또한, 연비 역시 709년에 치천현 개국남(淄川縣 開國男: 공후백자남의 맨 밑인 남작)에 봉해졌으며, 얼마 뒤 치천자(淄川子: 자작)로 진봉되어 식읍 400호를 받았다고 한다. 참고로 이때 연비의 나이는 겨우 2세였다. 금수저

후에 과거에 급제하였으며, 뛰어난 능력을 타고나 학문이 깊었고 병서에도 능했으며 또한 방술에도 재주가 있었다고 한다.[1]

그러나 729년에 22세의 젊은 나이로 요절하였다.

연비의 삶에 대한 기록은 전해지는 사서에는 남아있지 않으나 그의 아버지인 연현은이 남긴 묘지명인〈당고선덕랑효기위치천현개국자천군지명(唐故宣德郞驍騎尉淄川縣開國子泉君誌銘)>에 연비의 삶에 대한 기록이 있다.

고구려 당대를 살았던 연남생이나 연헌성의 묘지명에서는 고구려인이라는 것을 명확히 한 반면 이미 고구려가 멸망한 지 한참 뒤에 당나라에서 태어나 자란 연비의 묘지명에서는 그를 당나라 수도 출신이라는 의미인 경조 만년인(京兆 萬年人)이라고만 하고 있다. 세대가 지나며 고구려인이었다는 정체성을 잃고 상당부분 당에 동화된 듯 하다.

연비 이후로는 당나라에 살았던 연개소문의 후손들의 행적에 대한 기록이 더 이상 발견되지 않았다.

[1] 기록상의 출처가 연비의 묘비명이니까 생애가 윤색되었음을 고려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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