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6-04 06:05:35

엠레 벨뢰졸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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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fff> 순서 선수 이름 출전 횟수 첫 경기 마지막 경기
1 뤼슈튀 레츠베르 120회 1994.10.12 2012.5.26
2 하칸 쉬퀴르 112회 1992.3.25 2007.10.17
3 뷜렌트 코르크마즈 102회 1990.10.17 2005.8.17
4 엠레 벨뢰졸루 101회 2000.2.23 2019.10.11
5 아르다 투란 100회 2006.8.16 2017.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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튀르키예의 축구 감독
파일:1000006937.jpg
<colbgcolor=#eeeeee> 이름 <colbgcolor=#fff,#1F2023> 엠레 벨뢰졸루
Emre Belözoğlu
출생 1980년 9월 7일 ([age(1980-09-07)]세) /
튀르키예 이스탄불
국적
[[튀르키예|]][[틀:국기|]][[틀:국기|]]
신체 171cm, 체중 80kg
직업 축구 선수 ( 미드필더[1] / 은퇴)
축구 감독
소속 <colbgcolor=#eeeeee> 선수 갈라타사라이 SK (1996~2001)
인테르나치오날레 (2001~2005)
뉴캐슬 유나이티드 FC (2005~2008)
페네르바흐체 SK (2008~2012)
아틀레티코 마드리드 (2012~2013)
페네르바흐체 SK (2013~2015)
이스탄불 바샥셰히르 FK (2015~2019)
페네르바흐체 SK (2019~2020)
감독 페네르바흐체 SK (2020~2021 / 단장)
페네르바흐체 SK (2021 / 감독 대행)
이스탄불 바샥셰히르 FK (2021~2023)
MKE 앙카라귀쥐 (2023~2024)
국가대표 파일:튀르키예 축구 국가대표팀 로고.svg 101경기 9골 ( 튀르키예 / 2000~2020)
1. 개요2. 선수 경력
2.1. 클럽 경력2.2. 국가대표 경력
3. 플레이 스타일4. 지도자 경력5. 인종차별 구설수6.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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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튀르키예 축구 선수 출신 감독. 대한민국에서는 2002 FIFA 월드컵 한국·일본에 출전했던 선수로 알려져 있다.[2]

2002 한일 월드컵 3위와 유로 2008 4강 4위[3]를 통해 튀르키예 축구 국가대표팀의 영광의 순간을 함께한 선수였으며, 불같은 성격과 행동으로 투사의 이미지를 가지고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인종차별에서 자유롭지 못한 어두운 면을 가지고 있던 선수이기도 했다.

90년대, 00년대, 10년대, 20년대에 모두 리그에서 득점을 올린 기록도 가지고 있다.[4]

2. 선수 경력

2.1. 클럽 경력

1996년 데뷔해서 2020년까지 현역으로 뛰었는데, 그래서 이 선수에 관한 뉴스가 뜨면 "아직도 뛰어?"라는 반응이 다수였다. 또한 유럽 축구를 꽤 오랫동안 봐온 축구팬들에게는 인터밀란, 뉴캐슬, AT 마드리드 등에서 뛰며 준수한 실력을 보여준 중앙 미드필더로 기억할 선수다. 튀르키예 양강 갈라타사라이와 페네르바흐체를 모두 경험한 선수이기도 하다.

1996-97 시즌 튀르키예 최고 명문 갈라타사라이 SK에서 16세의 나이로 프로 선수로 데뷔해 1997-98 시즌부터 주전으로 자리잡았고, 특히 1999-2000 시즌 갈라타사라이의 UEFA컵 우승의 주역이었으며, 2000-2001 시즌 UEFA 챔피언스리그에서의 활약으로 자신의 이름을 전 유럽에 알리게 되었다. 이때 그는 겨우 21세였다.

결국 2001년 여름 500만 유로의 이적료에 이탈리아 명문 인터 밀란으로 이적하며 첫 해외진출에 성공한다. 이적 초기에는 기대한 만큼의 활약을 보여주면서 2002-03 시즌 인터밀란 올해의 선수로 뽑히는 등 성공적인 발자취를 남겼으나, 이후 잦은 부상이 그의 발목을 자리잡으며 2003-04 시즌부터 2004-05 시즌까지 꼴랑 9경기만 출장하는 전력외 자원으로 전락해버린다.

결국 2005년 7월 그는 커리어 반전을 위해 이적을 감행해 뉴캐슬 유나이티드로 이적하며 프리미어리그로 진출한다. 그래도 그동안 보여준 것이 있어서 5년 계약에 380만 파운드라는 적지않은 이적료를 발생시켰다. 출발은 순조로웠다. 시즌 개막 전 열린 UEFA 인터토토컵에서 데뷔를 했고, 리그 개막전에서부터 어시를 적립하며 뉴캐슬이 아스날을 잡는 파란을 연출하는데 일등공신이 되었다. 또 선더랜드와의 타인-위어 더비에서 데뷔골을 기록하는 등 뉴캐슬 중원의 핵심으로 빠르게 자리잡았다. 2006-07 시즌까지 문제없이 잘 뛰었는데..... 또 부상이 도졌다. 그러면서 다시 벤치 자원으로 전락해버린 벨뢰졸루는 시즌이 끝나고 국내 복귀를 선택하게 된다.

그런데 국내 복귀 팀이 친정 갈라타사라이가 아닌 갈라타사라이의 최대 라이벌 페네르바흐체 SK였다! 갈라타사라이 팬들이 격분한건 당연했고, 반(反) 벨뢰졸루 운동까지 벌이면서 갈라타사라이 팀과 벨뢰졸루를 성토했다. 벨뢰졸루는 자신이 평소 페네르바흐체 팬이었음을 지속적으로 드러냈다면서 자신을 변호했지만 이미 그는 라이벌리의 중심에 서버리고 말았다. 복귀 첫 시즌 2008-09 시즌은 부상의 여파로 부진했지만 이내 폼을 되찾아 2009-10 시즌 수페르리가 올해의 선수에 선정되었고, 2010-11 시즌에는 리그 우승을 경험했다. 또한 이때부터 다시 득점력이 폭발하기 시작, 2011-12 시즌에는 1999-2000 시즌 이후 처음으로 리그 한 시즌 5골을 넘는 득점을 기록하면서 완벽하게 자신의 부활을 알렸다. 다만 이때 이미 32세가 되었기 때문에 이대로 페네르바흐체의 레전드로 남은 선수 생활을 천천히 마무리할 공산이 커보였는데....

2012-13 시즌 뜬금 라리가 아틀레티코 마드리드로 이적해 30대의 나이에 다시 해외리그에 도전한다. 같은 튀르키예 국대 미드필더 아르다 투란과 함께 AT마드리드의 중원을 책임지게끔 하는 디에고 시메오네 감독의 구상으로 영입된 것인데, 초반 중용받았으나 이내 벤치 자원으로 밀리고 말아 6개월 만에 라리가 생활을 청산하고 다시 수페르리가에 복귀한다. 페네르바흐체 SK로 돌아온 그는 또다시 미들라이커의 본색을 되찾고 2014-15 시즌까지 2시즌 반 동안 62경기 14골의 기록을 남겼다. 어느덧 35세가 되었기 때문에 박수받으며 은퇴하겠구나 싶었는데 그는 또 다시 이적을 단행했다.

2015-16 시즌 돌풍의 팀 이스탄불 바샥셰히르 FK에 입단했다. 그저 그런 중위권 팀에서 커리어를 마무리하는 것이 아닌 충분히 우승 경쟁이 가능한 팀으로 이적한 것으로 예상치 못한 이적이었다. 2014년 재창단 이후 리그에서 줄곧 상위권에 이름을 올리며 돌풍의 팀으로 자리잡은 이스탄불 바샥셰히르는 벨로조글루 영입 이후 더 탄력을 받아 2016-17 시즌 리그 준우승, 2017-18 시즌 3위, 2018-19 시즌 준우승으로 계속 한 끝이 모자랐지만 최상위권의 성적을 냈고, 벨뢰졸루는 그 과정에서 리그 경기 대부분에 출전해 3년 연속으로 리그 25경기 이상 출장하는 노익장을 과시했다.[5]

2019년 여름 자신이 가장 오랫동안 활약했던 팀 페네르바흐체로 1년 계약을 맺고 다시 돌아갔고, 2020년 7월 8일 끝난 2019-20 시즌 리그 경기에서 득점을 기록하면서 최초로 90년대, 00년대, 10년대, 20년대에 모두 득점을 기록한 튀르키예 선수가 되었다.[6] 그리고 2019-20 시즌을 끝으로 현역 은퇴를 선언했다.

2.2. 국가대표 경력

어린 나이에 1군 무대에서 활약한 재능이라 일찌감치 10대의 나이에 이미 A대표팀에 소집되었고, 2000년 노르웨이와의 경기에서 A매치 데뷔전을 치렀다. 하지만 부상으로 인해 그 해 열린 유로 2000 최종 명단에는 포함되지 못했다.

하지만 이후 튀르키예 대표팀의 주전급 선수가 되어 48년만의 FIFA 월드컵 진출에 힘을 보태 2002 한일 월드컵 본선에서도 주전으로 활약해 1골을 기록하기도 했다. 2000년대 중후반까지 튀르키예 대표팀 중원의 핵심으로 활약해왔다.

국가대표에서 폭력사태에 휘말린 것으로도 유명한데, 2006 독일 월드컵 지역예선 플레이오프 스위스와의 난투극 당시 적극적으로 폭력을 행사한 선수로 지목되어 15000 스위스 프랑의 벌금과 A매치 6경기 출전정지의 중징계를 받은 적이 있다.[7] 그의 불같은 성격을 한방에 요약하는 사건이다. 2011년 2월 튀르키예에서 열린 대한민국과의 친선 경기에서 구자철에게 보복성 파울로 경고누적 퇴장을 당하기도 했는데 이 때도 그의 성격이 나타난다.[8]

이후 유로 2008 본선에 출전했으나 조별리그 첫 경기 포르투갈전만 치르고 부상으로 인해 더 이상 경기에 출전하지 못했다. 이후에도 쭉 대표팀 핵심 멤버로 거의 모든 A매치에 출전했으나, 2014 브라질 월드컵 본선행 좌절 이후 튀르키예가 세대교체에 들어가면서 잠시 대표팀과 멀어졌다. 이후 2018년까지 2017년에 1경기를 소화한 것을 제외하곤 이대로 대표팀 경력이 끝나는 듯 했다.

그러다가 2019년 유로 2020 지역예선 도중 취임한 셰놀 귀네슈 감독이 그를 다시 대표팀으로 불러들여 유로 본선 진출의 주역으로 활약했다. 2019년 한 해에만 A매치 6경기를 소화하면서 2019년 9월 FIFA 센추리 클럽에 가입했다.

원래 계획으로는 유로 2020을 마지막으로 선수 생활을 은퇴할 계획이었으나, 코로나19로 인해 대회가 1년 연기되어 유종의 미를 거두지 못하고 은퇴했다.

3. 플레이 스타일

중원에서 여러 역할을 골고루 소화할 수 있는 선수였다. 기본적으로 안정적인 테크닉과 특출나는 볼 운반 능력이 돋보였다. 이 때문에 보스포러스의 마라도나 라는 별명까지 붙여졌을 정도. 낮은 무게 중심을 기반으로 볼을 지키고 수비수의 움직임에 역동작을 먹여 뚫고 나가는 게 능했다.

이 뿐만 아니라 왼발 킥력까지 좋아서 갈라타사라이 시절인 2000-01 시즌에는 시즌 모든 대회에서 10골을 달성할 만큼의 득점력이 있었다. 어느 팀을 가든 세트 피스를 전담 했을 정도며 중장거리 패스에도 아주 능통했다.

작은 키지만 신체적인 경합을 피하지 않았고, 투쟁적인 수비스타일 덕에 프리미어 리그에도 비교적 빠르게 녹아드는 데 상공했었다.

문제는 볼을 소유하는 데 집착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 이 때문에 플레이에 기복이 심한 편이었다. 이는 인테르 막바지부터 뉴캐슬 시절까지 부상 빈도의 증가와도 관련이 있다. 부상이 늘고, 뉴캐슬 막바지에는 체중의 증가 문제까지 생겼다. 그래서 특유의 볼 운반 능력이 효율성이 급감하고 턴오버가 늘었다.

게다가 ‘무지성 수비’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너무나도 거친 수비 플레이를 보이기도 한다. 태클을 정교하게 가져가는 편은 아니기 때문에 카드 수집이 잦았다. 또한 몸싸움을 마다하진 않으나 몸싸움이 아주 강한 편도 아니다.

인테르 시절까지만 해도 역동성과 준수한 주력이 살아 있었던 덕에 왼쪽 윙어까지 종종 겸하곤 했다. 뉴캐슬 시절에도 볼 운반과 키패스를 찌르는 스타일을 유지했다. 그러나 부상의 급격한 증가로 심각한 부진에 빠졌고 튀르키예 무대 복귀 후에는 플레이 스타일에 변화를 주기 시작했다.

세리에, 프리미어 리그 시절에 비해선 볼 운반 빈도를 확연히 줄였다. 그리고 중장거리 패스의 빈도를 늘리며 ‘후방 플레이메이커’ 로서 자리를 잡은 것이다. 여타 통상적인 후방 플레이메이커와 비교하여 특기할 부분이 있다면 볼 테크닉은 여전했다는 점. 이 때문에 상대의 압박 시도에도 유연하게 대처했을 뿐만 아니라, 종종 직접 볼 운반까지 시도하며 상대의 중앙 지역 수비 형태를 깨부수는 모습까지 보여줬다.

튀르키예 복귀 이후 직접 슈팅의 빈도는 물론 그 정확도까지 개선되어 득점력도 눈에 띄게 올랐다. 프리킥 득점률까지 올랐다.

4. 지도자 경력

선수 은퇴 후 2020년부터 1년간 자신이 은퇴한 클럽인 페네르바흐체 SK 단장으로 재직했다가 감독 대행으로 남은 2020-21 시즌 동안 지휘봉을 잡게 되었다. 그리고 리그 3위로 UEFA 유로파 리그 출전권을 따낸 이후 비토르 페레이라에게 감독직을 넘겨주고 사임했다.

이후 2021년 10월 5일, 이스탄불 바샥셰히르 FK 감독으로 부임했다. 계약 기간은 2022-23 시즌까지이다.

2022년 9월 2일, 2023-24 시즌까지 계약을 연장했다. 이후 2023년 9월 6일에 상호 계약 해지했다. #

2023년 10월 4일, MKE 앙카라귀쥐의 감독으로 부임했다. 계약 기간은 2년. # 2024년 5월 31일, 상호 계약 종료 후 앙카라귀쥐를 떠났다. 팀은 17위로 강등되었다.

5. 인종차별 구설수

언행이 매우 거칠기로 유명해 자주 구설수에 오르며 특히 인종차별 관련해서 안좋은 말을 많이 쏟아내 여러번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2006년 12월 뉴캐슬에서 뛸 당시 에버튼의 수비수 조셉 요보와 골키퍼 팀 하워드에게 경기중 인종차별 발언을 한 것으로 FA에 제소된 적이 있었으나 혐의 없음을 인정받았던 전력이 있고, 불과 3개월 뒤 볼턴의 공격수 엘 하지 디우프에게 또다시 인종차별적 언행을 했다고 논란이 되었었다. 또 1달 뒤에는 왓포드의 수비수 알하산 방구라에게도 인종차별 발언을 했다는 소식이 전해졌지만 이 세 사건에 대해 벨뢰졸루 측에선 완강히 그런 적이 없다고 주장했고, 결국 3건에 대해서 아무런 징계도 받지 않았다. 그러나 1시즌에 한 번 엮이기도 어려운 인종차별 스캔들에 3번이나 엮인 것은 비판을 받을 수 밖에 없다.

한동안 잠잠하던 그의 언행은 6년 뒤 다시 한 번 터지고 마는데, 2012년 4월 트라브존스포르와의 경기에서 트라브존스포르 미드필더 디디에 조코라에게 Fxxxxxx Nxxxxx라는 폭언을 했다고 경기 후 조코라가 인터뷰를 통해 폭로한 것이다. 이번에는 가볍게 넘어가지 못해 2014년 튀르키예 대법원 판결로 벨뢰졸루는 징역 2개월 반을 선고받고 복역까지 하게 되었다. 튀르키예 선수가 인종차별로 처벌받은 것은 그가 처음이다. 여러모로 최대의 흑역사.

6. 여담

  • 갈라타사라이와 페네르바흐체에서 모두 뛰어본 몇 안되는 선수 중 하나며 또한 두 팀에서 모두 주전급으로 맹활약했다.
  • 3대 리그라고 할 수 있는 세리에 A, EPL, 라리가를 모두 경험한 화려한 커리어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세 리그에서 끝은 모두 좋지는 못했는데, 바로 해외에만 나가면 부상에 시달리는 불운을 겪었기 때문이다. 특히 인터 밀란 시절에는 코파 이탈리아도 우승해보고 이적 직후 2시즌 간은 인테르의 핵심 미드필더로 맹활약하다 부상 때문에 입지를 잃고 이적해야 했다. 뉴캐슬 유나이티드 경력도 비슷하게 흘러갔고, 아틀레티코 마드리드 시절은 주로 UEFA 유로파리그 경기 위주의 출전에 불만족하며 6개월 만에 국내로 복귀했다.


[1] 중앙 미드필더, 공격형 미드필더 [2] 우리나라와의 3위 결정전 때도 선발 출장 했었다. [3] 유로는 3,4위전이 없다. [4] 전세계적으로 즐라탄 이브라히모비치 이동국, 로케 산타 크루즈만 가지고 있는 희귀한 기록이다. [5] 튀르키예 수페르리가의 한 시즌 리그 경기는 34게임이다. [6] 같은 기록을 지닌 선수로는 즐라탄 이브라히모비치 이동국, 로케 산타 크루즈가 있다. [7] 이후 FIFA의 징계 경감으로 출장정지는 2경기로 줄었다. [8] 첫 번째 파울은 둘 다 잘못했기에 각자 경고를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