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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엇 스미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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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 7월 1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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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년 7월 2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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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2월 2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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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년 8월 2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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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4월 1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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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10월 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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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클레임드 뮤직 선정 1990년대 아티스트
29위
<colbgcolor=#000><colcolor=#fff> 엘리엇 스미스
Elliott Smith
파일:MV5BMTk5MDI0NjA5NF5BMl5BanBnXkFtZTgwNTY3ODAxNTM@._V1_.jpg
본명 스티븐 폴 '엘리엇' 스미스
Steven Paul 'Elliott' Smith
출생 1969년 8월 6일
네브래스카 주 오마하
사망 2003년 10월 21일 (향년 34세)
캘리포니아 주 로스앤젤레스 에코 파크
국적 파일:미국 국기.svg 미국
직업 싱어송라이터
링크 파일:홈페이지 아이콘.sv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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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colbgcolor=#000><colcolor=#fff> 학력 햄프셔 대학 ( 철학 & 정치학 / 학사)
장르 인디 포크, 인디 팝, 인디 록, 로우파이
사용 악기 기타, 보컬, 피아노, 베이스
클라리넷, 드럼, 하모니카, 첼로
활동 기간 1991년 2003년
신체 175cm
부모 아버지 게리 스미스
어머니 버니 케이 베리맨
}}}}}}}}}

1. 개요2. 생애
2.1. 유년 시절2.2. 인디 시절2.3. 메이저 시절2.4. 말년2.5. 갑작스러운 죽음
3. 디스코그래피4.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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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파일:external/www.rawkblog.net/elliott-smith.jpg

미국의 가수이자 싱어송라이터. 밴드 Heatmiser의 보컬로 출발해, 1990년대에 포크 록을 주 장르로 가요계에서 왕성한 활동을 하였다.

미국 인디 음악계에서는 전설로 추앙받을 만큼 영향력 있는 가수 중 1명이다. 속삭이는 듯한 특유의 보컬과 서정적인 분위기의 음악, 우울과 음침함을 표현하는 음색으로 많은 인기를 끌었으며 그의 음악을 선호하는 매니아층이 확고한 편이다. 한국에서는 김광석과 유사한 면이 많은 가수로, 포크 록을 주류로 했던 음악 장르도 똑같고 서정적인 멜로디와 퍼포먼스 스타일도 비슷한 편이다.[1]

2003년 10월 21일, 자신의 집에서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2. 생애

2.1. 유년 시절

파일:엘리엇 스미스 - 유년기.jpg
유년기의 엘리엇 스미스

1969년 8월 6일, 네브래스카 오마하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이름은 스티븐 폴 스미스.

매우 불우한 어린 시절로 보낸 인물로, 태어난 지 1년만에 부모가 이혼한 뒤 어머니와 함께 텍사스 댈러스 시로 이사를 가서 자랐다. 그 곳에서 그녀는 양부인 찰리 웰치와 결혼을 했는데 어린 시절 양부에게 많은 학대를 받았다고 한다. 스미스가 고작 4살이었던 때부터 틈만 나면 구타를 했고 한 인터뷰에서는 성적인 학대를 받았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양부인 찰리는 아들을 성적으로 학대했다는 주장을 부인하였고, 그의 어머니 또한 이를 시인하지 않았는데 이러한 사실은 스미스를 더욱 큰 좌절에 빠지게 만들었다. 결국 스미스는 14살이 되자 양부와 어머니가 사는 텍사스를 떠나 친부가 사는 포틀랜드로 이사를 갔다.

이 때의 경험은 그의 인생에 깊은 그림자를 드리우게 되었다. 자랐던 미국 남부 지역에 대한 증오[2]는 ‘Southern Belle’과 같은 곡에 드러나있고 ‘Some Song’, ‘No Confidence Man’, ‘No Name #4’, '2:45 a.m.', 'Roman Candle', ‘Flowers for Charlie’와 같은 곡에는 양부에 대한 증오와 고통스러운 유년시절이 드러나 있다.

참고로 스미스의 가족은 몰몬교의 분파 중 하나인 '복원 후기성도교회(2001년 Community of Christ로 명칭 변경)' 에 다니다가, 스미스는 이 후 감리교에 출석하게 됐다. 그러나 교회는 많은 상처를 받은 그의 마음을 치유해주지 못했고, 결국 스미스는 교회를 떠나게 된다. 2001년 인터뷰에서 "난 체계에 잡혀있는 신앙에는 빠질 필요를 못 느낀다. 하지만 나만의 신앙은 있다" 라며 모호한 종교관을 이야기하기도 했다.

엘리엇 스미스는 생전에 자신과 같이 학대받은 아이들을 위해 자선단체를 세울 계획이 있었고, 다음 앨범인 From A Basement On The Hill의 수입을 이 재단에 전액 기부할 예정이었다. 그가 갑작스레 죽고 난 뒤에 스미스의 유족들은 이 계획을 스미스가 처음 구상한 명칭인 ‘학대아동들을 위한 엘리엇 스미스 재단’에서 ‘엘리엇 스미스 기념 재단’으로 명칭을 바꿔 실행했다.

2.2. 인디 시절

포틀랜드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자신의 이름을 엘리엇으로 바꾸고 햄프셔 대학교에서 정치학과 철학을 공부했다. 대학교 졸업에 대해서 엘리엇은 주변 사람들이 나를 '어떤 일을 끝까지 해낼 수 있는 끈기가 결여된 사람'으로만 생각하기에 자신도 마음 먹은 일을 끝까지 해낼 수 있다는 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증명하고 싶어서 졸업까지 이를 악물고 버텼다고 말했다. 이미 어릴 때부터 음악에 재능을 보인 그는 대학교에서 만난 친구 닐 거스트와 함께 히트마이저라는 펑크 록 밴드에서 음악활동을 시작한다. 히트마이저 활동 중이었던 1994년, 당시 여자친구인 J.J. 곤슨의 권유로 엘리엇은 자신이 최근에 작곡한 여덟 곡의 데모 테이프를 레코드사에 보내게 되는데 이것이 레코드사의 주목을 받아 데모 전체가 그 해 여름 Roman Candle이라는 제목의 앨범으로 발매된다. 당시 엘리엇은 데모 중에서 한 두 곡이 7인치 싱글 정도로 나오겠지 하고 생각하던 차에 데모 전체가 앨범으로 나오자 굉장히 놀랐다.

자신의 음악이 메이저 시장에서 충분히 통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은 엘리엇은 1995년 셀프 타이틀 앨범인 Elliott Smith를 내면서 본격적으로 솔로 뮤지션으로 활동하게 된다. 이 앨범은 전작보다 우울한 정서를 가지고 있었고 헤로인 중독에 대한 주제가 많이 드러나는데 훗날 엘리엇의 인터뷰에 의하면 두 앨범에 실려있는 곡들이 너무 우울한 분위기였기 때문에 대중들이 자신을 '어둡고 우울한 사람'으로 인식하게 될까 염려되어 다음부터 곡을 쓸 때는 가능하면 보다 밝은 풍의 멜로디와 다른 분위기의 가사를 쓰기로 마음먹었다고 한다. 또한, 가사에 나오는 헤로인 중독에 대한 부분은 주변의 헤로인 중독자들과 소설과 영화 등에 묘사된 그들의 모습을 보고 영감을 얻어 작사한 것이고 자신은 헤로인을 해본적이 없다고 밝혔다.[3] 1996년, 엘리엇이 당시 연인이었던 조애나 봄의 집에서 솔로 3집 Either/Or의 녹음을 시작하자 그간 엘리엇의 솔로 활동을 반대한 다른 멤버들과의 사이가 완전히 틀어지게 되고 그는 히트마이저를 나오게 된다. 엘리엇이 탈퇴하자 히트마이저는 그대로 해체.

이후 1년여 동안 여러 장소에서 3집의 녹음을 진행한 엘리엇은 쇠렌 키르케고르가 쓴 동명의 책 제목에서 유래한 3집 앨범 Either/Or을 1997년 발매하게 된다. 그는 앨범 발매 직후 가진 인터뷰에서 Either/Or 앨범에 대해 다시는 이렇게 힘들게 작업하고 싶지 않을 정도로 힘겹게 작업하였으며 앨범 작업 시 작곡한 30곡이 모두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말혔다. 엘리엇 주변 사람들의 증언에 의하면 앨범 레코딩 중에 조애나 봄과 결별한 그는 항상 자살에 대한 이야기만 했으며 실제로 절벽에서 뛰어내리기까지 했다고 한다. 다행히도 나뭇가지에 걸려 자살시도는 미수에 그쳤다. 그러나 이 때의 자살시도로 그는 정신병원에 입원당하게 되는데, 훗날 인터뷰에서 자살 시도보다 더 고통스러웠던 건 정신병원에서의 입원 생활이었다고 털어놓기도 했다.

Either/Or 발매 직후 동향 친구였던 영화감독 거스 밴 샌트가 엘리엇에게 자신의 영화 사운드트랙을 만들어달라고 부탁했는데 그 영화가 바로 굿 윌 헌팅. 영화를 위해 그는 자신의 1집 앨범에서 한 곡, 3집 앨범 "Either/Or"에서 몇 곡을 골랐고 엔딩을 위해 그간 발표하지 않았던 곡 한 곡의 가사를 영화의 장면에 맞게 개사하여 내놓았다. 그곡이 바로 엘리엇 스미스를 가장 널리 알린 곡 "Miss Misery"였다.

2.3. 메이저 시절

영화가 흥행하면서 "Miss Misery"도 아카데미 시상식에 주제가 부분에 노미네이트되었고 엘리엇 스미스는 아카데미 시상식에 초청되어 이 곡을 공연했다. 비록 주제가상은 셀린 디옹 타이타닉 삽입곡 "My Heart Will Go On"에게 돌아갔지만 인디 뮤지션이 아카데미 시상식에 초청받은 것은 이전에도 없었고 이후에도 없었던 일이라고 한다. 사실 "Miss Misery"가 너무 우울한 노래라 아카데미에 노미네이트된 것만으로 대단한 일이라는 지적이 있기도 하다.

Miss Misery의 성공 후, 엘리엇은 대형 레코드사인 드림웍스 레코드와 계약을 체결하고 4집 앨범 XO의 녹음을 시작한다. 4집을 녹음할 때 엘리엇은 자신이 대중들에게 Miss Misery로 원히트 넘버를 기록한 뮤지션으로 기억되지 않기 위해서 완성도 있는 곡을 만들어야 한다는 강박관념과 인디 시절 동료들이 성공을 위해 메이저 시장과 타협한 변절자라며 자신을 비난하고 있을 것이라는 불안감에 시달렸고 이러한 부담감을 해결하기 위해 술을 가까이 하다가 알코올 의존증에 걸리게 된다. 1998년 발매된 XO는 전작들보다 2배가 넘게 판매되는 성공을 거뒀고[4] 싱글로 발매된 Waltz No.2는 Miss Misery, Between The Bars와 함께 가장 널리 알려진 앨리엇 스미스의 곡이 되었다. 이러한 성공에 고무된 엘리엇은 곧바로 다음 앨범 Figure 8의 녹음을 시작한다.

2000년 앨리엇 스미스의 5집이자 생전 마지막으로 발표한 앨범 Figure 8이 발매된다. 비록 다수의 곡들을 원맨 밴드 형식으로 엘리엇 혼자 녹음하긴 했지만 앨범은 전작들과 달리 좀 더 밴드 지향적으로 완성되었고 엘리엇은 솔로로 데뷔한 이래 처음으로 동료 뮤지션들과 함께 밴드의 형태로 투어를 돌기도 하였다. 앨범의 평가는 "엘리엇 스미스와 대형 스튜디오의 협업의 결과물로 발매된 Figure 8은 서로의 장점을 합친 멋진 작업물이다."는 호의적인 평가와 "그간 엘리엇의 앨범에 실린 어둡고 우울한 정서가 많이 희석되어있는, 그동안 엘리엇 스미스에 열광케 한 사람들을 배신한 앨범."이라는 부정적인 평가로 양분되었다.

2.4. 말년

Figure 8 투어 도중 그는 헤로인을 접했고, 투어가 끝나고 공백기를 가지면서 본격적으로 헤로인을 하기 시작했다. 이 시기 정서적으로 많이 불안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는데, 지인들에게 "드림윅스가 Figure 8 앨범을 제대로 홍보하지 않았으면서 적반하장격으로 나를 상품 가치가 없다며 쫓아냈다" 라며 음반사를 비난하거나 "누군가가 내 컴퓨터에 저장되어 있는 작업물들을 훔쳐갔다" “흰색 밴을 탄 사람들이 나를 미행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결국 활동이 힘들어지며 드림윅스는 엘리엇 스미스와의 계약을 해지했고, Either /Or 앨범부터 엘리엇의 음반을 같이 프로듀싱한 롭 슈내프(Rob Schnapf)와 솔로 1집부터 엘리엇의 매니저였던 마가렛 미틀먼(Margaret Mittleman) 또한 엘리엇과 결별하였다. 그의 마약중독과 정신적인 불안증세가 날이 갈수록 심해지자 결국 지인들은 엘리엇을 정신병원에 다시 입원시켰다.[5]
파일:엘리엇-제니퍼.jpg
그의 애인이었던 제니퍼 치바와 함께

2002년 제니퍼 치바와 동거를 시작하면서 그의 삶에 변화가 찾아오는 듯 했다. 엘리엇은 새 사람이 되기로 결심, 술과 마약 및 육식을 끊기 위해 재활치료센터에 입원했으나 치료를 견디지 못하고 나오고 만다. 그 후에는 라이브 공연을 위주로 활동했고 웨스 앤더슨의 새 영화 <The Royal Tenenbaums>의 OST로 비틀즈 Hey Jude를 리메이크해 녹음까지 마쳤다. 그러나 엘리엇의 목 상태는 도저히 라이브 공연을 소화할 수 있을만큼 건강하지 않았고,[6] 팬들에게도 많은 실망을 주었다. 또한 Hey Jude 리메이크로 오랜만에 영화 OST로 복귀하려던 계획도 결국 무산되었고, Hey jude는 오케스트라의 편곡으로 삽입되게 된다.

2002년 11월 25일, 벡 한센 The Flaming Lips의 합동 공연에서 발생한 패싸움에 아내인 제니퍼 치바와 함께 연루되어 체포되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엘리엇은 허리를 다쳤고, 이 때문에 공연 스케줄 일부를 취소했다.[7] 당시에는 잠시 노숙자 생활을 했다고 한다.

2003년 1월 31일 ~ 2월 1일까지 이틀동안 오랜만에 단독콘서트를 열었는데, 이 때 목 상태가 상당히 회복된 모습을 보여 호평을 받았다. 2002년 연말 쯤 다시 재활센터에 입원해 치료를 받았고, 이 과정에서 건강이 많이 회복되어 보컬적으로 안정적인 상태까지 컨디션을 끌어올렸다. 이로 인해 팬들의 엘리엇 스미스의 재기를 기대하고 있었고, 2003년 8월 34번째 생일 때는 금주까지 성공했다.

2.5. 갑작스러운 죽음

2003년 9월 19일, 엘리엇 스미스의 생전 마지막 콘서트[8]

2003년 10월 21일, 자신의 자택에서 갑작스럽게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당시 애인인 제니퍼 치바와 동거하고 있었는데, 엘리엇은 자신과 다투다가 화가 난 제니퍼가 샤워를 하러 화장실에 들어간 사이 키친 나이프로 자신의 가슴을 여러차례 찔러 목숨을 끊었다. 제니퍼의 증언에 따르면, 샤워를 하던 도중 갑자기 비명 소리가 들려서 밖에 나가보니 엘리엇이 칼이 가슴에 찔린 상태로 서 있었다고 한다. 급히 칼을 빼고[9] 911을 불렀지만, 엘리엇 스미스는 병원에서 사망하고 말았다.

당시 둘이 살던 집의 책상에는 다음의 말이 적혀있었다고 한다. 이것이 사실상의 유언이다.
I’m so sorry. Love, Elliott. God forgive me
(정말 미안해. 사랑을 담아, 엘리엇이. 신이시여 저를 용서하소서.)

엘리엇 스미스의 간단한 장례식을 치른 뒤 화장되어, 유해는 가족들이 인계했다고 한다. 사망 후 연인이었던 제니퍼는 사실혼을 주장하며 15%의 유산을 요구하는 소송을 했지만 패소했다. 그녀는 사후 그의 음반발매와 추모 사업 등에 참여하고 있다.

사망 이후에도 자살에 대한 의혹이 여러차례 돈 적이 있다. 특히 칼로 자신을 찔러 자살하는 건 흔치 않은 사례이기 때문에, 현재까지도 죽음에 대한 의혹과 타살 논란이 돌고 있다. 일각에서는 그의 생전 애인이었던 제니퍼 치바를 의심하기도 한다.

검시관은,
  • 술을 먹지 않은 상태였고, 처방된 정상범위의 약물 외에 금지된 약물 반응도 없었다.
  • 칼을 사용한 자살은 목이나 손목을 베는 방법이 주로 이뤄지지만 그는 자신을 찔렀다.
    • 이와같은 방식의 자살을 할 때는 은폐된 공간에서 주로 이루어지만 그는 탁 트인 공간에서 행했다.
    • 이와같은 방식의 자살을 하더라도 뼈가 있는 부위를 찌르는 경우는 거의 없다.
    • 이와같은 방식의 자살을 하더라도 2번 이상 자신을 찌르는 경우는 흔치 않다.
    • 그러므로 자살 방식 자체가 통계적으로 희박하다.
  • 찌르는 각도도 자살이라면 수평이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다. 수직이었다면 100% 타살이겠지만 수직까지는 아니다.
  • 자살이라면 주저흔이 있는 게 보통인데 주저흔이 없다.
  • 손과 팔에 저항흔으로 보이는 상처가 있다.
라는 의학적 견해를 냈다. 자연히 제니퍼는 용의선상에 올랐지만 경찰에서는 수사를 하지 않고 종결시켰다.

3. 디스코그래피

4. 기타

  • 엘리엇 스미스는 키스, AC/DC부터 90년대 R&B 뮤지션들에 이르기까지 폭넓게 음악을 좋아했고 즐겨 들었었는데 가장 좋아했던 뮤지션은 비틀즈 엘비스 코스텔로였다고 한다.
  • 성공하기 전에 어쩌다 여유가 좀 생기면 동네 노숙자들에게 닥치는 대로 20달러씩 나눠주는 버릇이 있었다. 대중적인 인기를 얻은 이후에도 지나가다 노숙자를 발견하면 그냥 못 지나치고 돈을 내주었다는 듯.
  • 유머감각이 매우 뛰어났고 도가 지나친 농담도 곧잘 했다고 한다. 또한 한 번 성공한 농담을 두 번 반복하지 않았다고 한다.
  • 공연을 시작하기 전에 무대공포증으로 인해 통증을 호소할 때가 많았다고 한다.
  • 입에 풀칠하기 위해 도장공 아르바이트를 했는데 이때문인지 회벽 바르는 솜씨가 프로 미장공급이었다고 한다.
  • 어린 시절의 학대경험 등으로 인해 그에게는 심각한 우울증 증세가 있었고 이 때문에 상당히 폐쇄적인 성격을 가지게 되었다고 한다. 우울증을 극복하려고 술에 의존했던 엘리엇은 평생 알코올 의존증에 시달렸고 성공한 후에는 헤로인에 중독된 삶을 살았다. 묘하게 70년대를 풍미했던 어쿠스틱 포크 뮤지션 닉 드레이크와 비슷한 면이 있다. 드레이크도 항우울제 과다복용으로 사망한 걸 보면... 엘리엇 스미스는 이러한 불행한 인생 속에서 아픈 곡을 쓰는 섬세한 사람이었고 포크와 클래식에 영향을 받은, 순수하면서도 깊은 울림을 전해주는 멜로디와 특유의 지적이고 고독한 분위기를 지닌 가사가 맞물리는 음악을 창작해 냄으로써 많은 이들을 공감하게끔 만들었다.
  • 한국 가요계에 대입하면 김현식 김광석의 이미지를 합친 듯한 가수이다. 세 사람 모두 인디에서 음악을 시작해 포크 장르의 음악을 했고 인디 쪽에서는 절정의 위치에 올랐다. 또한 엘리엇은 김광석처럼 자살로 생을 마감했으며 자살에 대한 여러 논란이 있는 것도 비슷하며, 김현식처럼 알코올 중독과 약물중독에 심각하게 시달린 점도 동일하다.
  • 생전 담배를 많이 피우던 골초이기도 했다. 즐겨피우던 담배는 카멜 필터스로, 노래에도 담배에 대한 가사가 나오고 생전 사진 중에서도 담배를 물고 있는 사진을 쉽게 찾을 수 있다.
  • 전 애인이었던 조애나 봄(Joanna Bolme)은 믹싱 엔지니어이자 베이시스트로 엘리엇에게 많은 영향을 끼친 인물이다. 둘은 3집 <Either/Or> 녹음 중 결별했는데 엘리엇의 대표곡 'Say Yes', 'Miss Misery'와 같은 곡들이 그녀와 헤어진 직후 쓰여졌다. 특히 Say Yes의 메인 곡조는 그녀와 헤어진 다음날 아침에 썼다고 한다. 그 외에 조애나는 다양한 밴드와 프로젝트에 참여한 저명한 뮤지션이기도 한데, 현재에는 페이브먼트의 스티븐 말크머스 앤 더 직스의 베이시스트로 활동하고 있다.
  • 2006년 스케이트보드 비디오 'A Time To Shine' Dylan Rieder 파트에 'Coast To Coast'가 배경음악으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 2007년도 11월자 롤링 스톤 지에서는 역사상 가장 과소평가된 기타리스트 25인 중 23위로 그의 이름을 올렸다. 실제로 그의 몇몇 곡들이 가진 코드는 상당히 잡기 어려운 프레이즈로 이루어져 있어 연주하기 힘들다. 엘리엇 스미스는 기타 뿐만 아니라 피아노, 베이스, 드럼, 클라리넷 등을 연주할 수 있는 멀티 플레이어였으며, 앨범을 녹음할 때는 몇 몇 세션들을 제외하면 원맨 밴드식으로 혼자 모든 악기를 연주했다. 특히 피아노의 경우 고난이도인 라흐마니노프의 악보 또한 연주할 수 있는 테크닉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기타는 어쿠스틱의 경우, 야마하의 FG-180과 깁슨 J-45, 그리고 일렉트릭으로는 1969년산 깁슨 ES - 330을 사용했다.
  • 벤 폴즈는 Late라는 곡을 통해 친구인 엘리엇 스미스를 추모하기도 했다. 이 곡의 가사에는 엘리엇이라는 이름이 등장하는데 이게 바로 엘리엇 스미스다.
Elliott, man, you played a fine guitar
엘리엇, 넌 정말 기타를 잘 연주했지
And some dirty basketball
그리고 조금은 거친 농구 실력도
The songs you wrote Got me through a lot
네가 쓴 노래는 내게 많은 생각들을 하게 해
Just wanna tell you that
그걸 너에게 말하고 싶어
But it's too late
그러나, 너무 늦었어
It's too late
너무 늦었어
No, don't you know
넌 모르니
it's been too late for a long time
너무 늦었다는 걸
  • 다큐멘터리 'Heaven Adores You'는 엘리엇 스미스의 음악인생을 다룬다. 2015년 제천국제음악영화제에 출품됐다.
  • 가수 이소라는 엘리엇 스미스의 팬이라고 알려져 있는데, 그녀의 앨범 7집 수록곡 Track8은 엘리엇을 추모하기 위해 만든 노래라고 한다.
  • 미국 재즈 피아니스트 Brad Mehldau의 재즈 앨범 'Highway Rider'에 수록된 'Sky Turning Grey' 또한 엘리엇 스미스의 죽음을 추모하는 곡이다.
  • 델리 스파이스 김민규가 소개하다시피해서 우리나라에 알려진 뮤지션 중 하나이다. '엘리엇 스미스가 요즘에 내가 좋아하는 아티스트다.' 이런식으로.


[1] 또 두 사람 모두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는 것, 사후에 자살에 대한 의혹이 있었다는 것도 비슷하다. [2] 엘리엇은 텍사스 주의 지도를 타투로 새겼는데 그 이유에 대해 “나는 이곳을 좋아해서 타투로 새긴것이 아니다. 오히려 정반대다. 이렇게 타투로 새기면 그곳에 대해 절대 잊지 않을테니까”라는 말을 했다 [3] 이렇게 엘리엇 스미스는 주변의 헤로인 중독자들로부터 헤로인의 위험성을 알고 있었음에도 성공 후 <Figure 8> 투어 무렵부터 헤로인을 하기 시작했다. [4] <XO> 발매 당시의 인터뷰 [5] 이 시기 엘리엇은 마약에 심각하게 중독됐는데, 매일 $1500어치의 헤로인과 코카인을 투약했을 정도로 상태가 심각해졌다. # [6] 중간중간 가사를 까먹을 때면 관객들이 직접 때창을 했다고 한다. [7] 이틀을 유치장에서 보냈다고 한다. [8] 이 날 마지막으로 부른 노래는 비틀즈의 <Long, Long, Long>이었다. [9] 여담이지만 칼에 찔렸을 때 이렇게 몸에 박힌 칼을 빼는 건 잘못된 응급조치라고 한다. 칼이 갑자기 빠지면서, 압력 때문에 엄청난 피가 쏟아져 나와 과다출혈로 사망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10] 미발매곡 24곡이 수록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