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10 08:50:38

에릭 헤러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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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릭 헤러츠의 감독직 및 기타 직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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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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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대

벨기에 축구 국가대표팀 주장
줄리앙 쿨스
(1977~1980)
에릭 헤러츠
(1980~1984)
얀 쾰레만스
(1984~1991)
}}} ||
벨기에의 축구감독
파일:Gerets_Profile.jpg
<colbgcolor=#eeeeee,#191919> 이름 에릭 헤러츠
Eric Gerets
출생 1954년 5월 18일 ([age(1954-05-18)]세) /
벨기에 플란데런지방 림뷔르흐주 라나켄
국적
[[벨기에|]][[틀:국기|]][[틀:국기|]]
신체 182cm
직업 축구선수( 라이트백 / 은퇴)
축구감독
소속 <colbgcolor=#eeeeee,#191919> 선수 AA 라나켄 (1964~1971 / 유스)
스탕다르 리에주 (1971~1983)
AC 밀란 (1983~1984)
MVV 마스트리흐트 (1984~1985)
PSV 에인트호번 (1985~1992)
감독 RFC 리에주 (1992~1994)
리르서 SK (1994~1997)
클뤼프 브뤼허 KV (1997~1999)
PSV 에인트호번 (1999~2002)
1.FC 카이저슬라우테른 (2002~2004)
VfL 볼프스부르크 (2004~2005)
갈라타사라이 SK (2005~2007)
올랭피크 드 마르세유 (2007~2009)
알 힐랄 SFC (2009~2010)
모로코 대표팀 (2010~2012)
레크위야 SC (2012~2014)
알 자지라 SC (2014~2015)
국가대표 86경기 2골 ( 벨기에 / 1975~1991)
1. 개요2. 클럽 경력3. 국가대표 경력4. 지도자 경력5. 수상 내역
5.1. 선수
5.1.1. 클럽5.1.2. 개인
5.2. 감독
5.2.1. 클럽5.2.2. 개인
6.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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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파일:Gerets_National.jpg

벨기에 축구선수 출신 감독.

80년대 벨기에 축구의 황금기를 이끈 라이트백으로, 스탕다르 리에주 PSV 에인트호벤에서 뛰어난 기량을 선보이며 수 많은 트로피를 들어올렸다. 특히 1987-88 시즌, PSV 소속으로 팀의 역사적인 트레블을 공헌하기도 했다.

2. 클럽 경력

1964년, 그의 나이 10살에 지역팀 AA 라나켄에서 축구를 시작했다. 이후 자국 명문팀인 스탕다르 리에주로 팀을 옮길 때까지 7년간 라나켄의 유스팀에서 축구 실력을 배양했다. 1972년 4월 16일, 헤러츠는 FC 디에스트와의 시합에서 팀 동료인 실베스터 타카치의 대신 교체 투입되며 데뷔전을 치른다. 1972-73 시즌에 팀은 리그컵 결승에 진출했고, 상대는 라이벌이자 숙적이었던 RSC 안데를레흐트였다. 당시 감독이었던 블라트코 마르코비치는 헤러츠가 아직 완전히 1군 멤버로 정착하지 않은 풋내기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선발로 기용하는 파격적인 선택을 한다. 그러나 팀은 2:1로 패하면서 아쉽게도 준우승에 머물렀다. 다음 시즌부터 헤러츠는 주전 라이트백으로 낙점받았고 1975년에는 벨기에 축구 국가대표팀의 일원이 된다.

2.1. 스탕다르 리에주

1980년대에 들어서 팀은 황금기를 맞기 시작한다. 먼저 자국의 명장 레몽 후탈스가 지휘봉을 잡았고 아리에 한, 미셸 프뢰돔등 실력있는 선수들까지 가세했다. 그리고 여전히 주축선수로 활약하던 헤러츠는 팀의 주장이었다. 1980년에 스탠다드는 리그에서 준우승을 차지한 후 1981년 내셔널 컵에서 KSC 로케런을 4:1로 꺾고 우승을 차지했다. 1982년에는 리그 마지막 경기에서 K 바터셰이 SV 토르 헹크[1]를 꺾고 리그 타이틀을 획득했다.

며칠 후, 그들은 UEFA컵 위너스컵 결승전에서 바르셀로나를 만나 아쉽게 2-1로 패했지만 자국과 유럽대항전에서 최고의 활약을 펼치고 있던 헤러츠는 1982년 벨기에 골든 슈를 수상한다. 그리고 다음 해에 그는 스탠다드를 다시 한번 리그 우승으로 이끌었고[2], 그는 유럽 전역에 주목을 받기 시작한다.

2.2. AC 밀란, 마스트라흐트 시절

스탕다르에서 맹활약한 헤러츠는 1983-84시즌을 앞두고 세리에 A의 명문 구단 AC 밀란으로 이적하게 되면서 빅리그에 도전한다. 그러나 당시 밀란은 지난 날의 명성과 달리 2년전 토토네로 스캔들[3]로 인해 세리에 B로 강등을 겪고 난 뒤 힘을 잃은 상태였고 거기에 재정악화까지 더해져 상당히 암울한 상황이었다. 심지어 1984년 초에는 스탕다르가 1982년 리그 최종전 상대였던 바터셰이 선수들에게 보너스를 지급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당시 스탕다르의 선수였던 헤러츠는 승부조작 혐의에 연루되었고 출전 징계를 먹으면서 3월, 팀에서 방출되었다. 물론 승부조작에 관련해서 해러츠 본인은 전혀 몰랐다고 부인했다.

1984년, 팀에서 방출된 그는 네덜란드의 MVV 마스트리흐트로 자리를 옮겼지만 징계 여파로 시즌 반 이상을 날려먹었고 징계기간이 끝난 1985년 4월이 돼서야 공식 경기에 출전할 수 있었다.[4]

2.3. PSV 에인트호번

2년간 힘든 시기를 보냈던 헤러츠가 선택한 곳은 PSV 에인트호벤이었다. PSV는 기존의 멤버 휘프 스테번스, 로날드 쿠만과 함께 뤼트 휠릿, 프랑크 아르네센, 호마리우를 영입하며 리그 정복을 위한 대대적인 투자를 단행하고 있었다. 그리고 팀의 노력은 빛을 발휘하기 시작했고 1986년, 에레디비시 타이틀을 획득했다.

1987년 휠릿이 떠난 후 그는 새로운 주장으로 선임되었고 거스 히딩크의 지휘 아래 PSV는 3년 연속 리그와 컵 더블을 달성했으며 1988년 UEFA 챔피언스 리그 무대에서 팀의 주장이자 베테랑인 헤러츠는 짠물수비를 보여주며 준결승 진출을 이끈다. 그리고 4강 상대는 레알 마드리드 CF. 당시 레알은 멕시코의 골잡이 우고 산체스 에밀리오 부트라게뇨, 마놀로 산치스 등 스타들이 다수 포진된 강팀이었다. 그러나 PSV는 산티아고 베르나베우에서 열린 1차전에서 레알의 맹공을 완벽하게 틀어막으며 1실점만을 허용했고 리스켄스의 득점으로 원정골까지 기록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그리고 2차전에서도 헤러츠는 탁월한 리더십으로 수비를 컨트롤하며 레알의 공격을 저지했고 0:0 무승부를 기록, 원정다득점으로 결승전에 진출하는 이변을 일으키는데 큰 공헌을 한다. 결승 상대는 포르투갈의 강호 SL 벤피카였고 팀은 득점없이 승부차기까지 가는 혈전끝에 우승을 차지하며 트레블을 달성했다.

트레블의 주역이 된 헤러츠는 이후에도 팀의 주장으로 활약했고 1990년 여름, 잉글랜드의 월드컵 4강을 이끈 보비 롭슨이 히딩크의 후임으로 선임되었다. 그는 롭슨의 휘하에서 2개의 타이틀을 더 획득한 후 1991-92 시즌이 끝날 무렵 37세의 나이로 은퇴를 선언했다.

3. 국가대표 경력

1975년, 국가대표에 데뷔한 해러츠는 1980년 이탈리아에서 열린 유럽 선수권 대회에 출전했다. 그는 조별리그 2차전 스페인과의 경기에서 선제골을 기록하며 팀의 2:1 승리를 이끌었고 팀은 조 1위로 결승에 진출하는 쾌거를 이룩한다.[5] 비록 서독에 1:2로 패해 우승은 아쉽게도 놓쳤지만 헤러츠를 포함하여 장 마리 파프. 얀 쾰레만스, 에르빈 판덴베르흐 등 재능있는 선수들이 다수 활약하면서 80년대 초중반을 주름잡게 될 벨기에의 황금세대의 서막을 알리는 뜻깊은 대회였다.

그는 캄프 누에서 열린 1982년 월드컵 조별리그 1차전에서 디펜딩 챔피언을 만나 경기내내 에이스인 디에고 마라도나를 꽁꽁 묶으며 맹활약을 했고 팀은 1:0으로 승리한다. 2승 1무로 조 1위를 기록하며 2라운드로 진출했으나 팀은 폴란드 소련에 밀려 4강 진출에는 실패했지만 헤러츠는 대표팀 수비진의 구심점 역할을 충실히 하였다.

4년 후, 두번째로 맞이한 월드컵에서는 주장인 얀 쾰레만스와 장 마리 파프, 그리고 그를 필두로 한 팀은 16강전에서 소련을 만나 연장전 끝에 승리하는 이변을 연출한다. 지난 대회에서 소련에게 당했던 수모를 완벽하게 갚으면서 8강에 진출한 벨기에는 스페인마저 승부차기로 꺾으면서 월드컵 역대 최고 성적을 거둔다. 그리고 준결승 상대는 지난 대회에서 승리를 거둔 경험이 있는 아르헨티나였다. 그러나 아르헨티나는 4년전보다 더 강력해진 완성된 팀이었고 에이스 마라도나도 완숙한 기량으로 절정의 활약을 보이고 있었다. 그리고 팀은 속절없이 무너지며 0:2로 패하면서 결승전 진출에 실패한다. 3.4위전에서도 플라티니 프랑스에게 패하면서 4위로 대회를 마감했지만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성과였고 이는 32년 후 2018년 3위를 차지할 때까지 월드컵 최고의 성적으로 기록됐다.

36살의 헤레츠는 1990년 월드컵에 참가하면서 3번째 월드컵을 맞이한다. 그는 1차전 대한민국과의 경기에서 90분 선발출전하며 팀의 승리를 이끌으나 우루과이와의 2차전에서 후반 42분 경고누적으로 퇴장을 당하고 말았다. 다행히 팀은 3:1 승리를 거두며 조기에 16강 진출을 확정 짓는데 성공한다. 16강 잉글랜드전에서 복귀한 그는 120분 풀타임을 뛰었지만 팀의 1:2 패배를 막을 수는 없었고 그의 마지막 월드컵도 막이 내렸다.

1991년 3월 27일, 웨일스와의 유로예선을 끝으로 그는 국가대표팀을 은퇴했다.

4. 지도자 경력

현역시절에 발휘했던 명민한 두뇌와 넓은 시야는 감독으로서도 빛을 발휘하는데 RFC 리에주에서 감독경력을 시작한 그는 리르서와 클뤼프 브뤼허에서 벨기에 퍼스트 디비전 A 우승을 이끌고 두 번의 감독상을 수상하며 감독으로서 좋은 출발을 한다. 자국에서 인정받은 후 1999년에는 전성기를 보낸 PSV의 감독으로 부임하여 2번의 리그 우승과 2번의 요한 크루이프 스할 우승을 이끌며 감독으로서도 팀에 큰 공헌을 했다.

이후 독일 분데스리가 무대로 옮겨 3년간 활약 후 2005-06 시즌을 앞두고 터키의 갈라타사라이의 지휘봉을 잡았다. 갈라타사나이에서 리그 우승을 달성하며 본인의 감독으로서 5번째 리그 우승을 이뤄냈고 2007년 5월에 클럽을 떠났고 9월 25일에 올랭피크 드 마르세유의 감독이 되었다.

2007-08시즌 마르세유에서의 첫 시즌에 그는 리그 하위권에 머물던 팀을 3위로 마무리하는 데 성공했으며 이후에도 발군의 지도력으로 2009년 리그 앙 올해의 감독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그리고 2009년 4월 29일, 그는 계약이 만료되는 여름에 팀을 나갈 것임을 선언했고 2009년 5월 26일, 그는 사우디 클럽인 알 힐랄의 감독직을 2년 동안 180만 유로를 수령하는 계약을 채결했다.

2010년 7월 6일, 그는 모로코 대표팀와 4년 계약을 체결했다. 2년간 팀을 지휘했으나 이전의 명성에 걸맞지 않게 영 좋지 않은 지도력을 보였고 2012년 9월 9일, 모잠비크와의 아프리카 네이션스컵 지역예선 1차전에서 0:2로 패한 뒤 그는 경질되었다.

이후에는 다시 중동으로 자리를 옮겨 레크위야 SC 알 자지라 SC에서 감독 생활을 한뒤 2015년을 끝으로 감독으로서의 커리어도 마감했다.

5. 수상 내역

5.1. 선수

5.1.1. 클럽

5.1.2. 개인

  • 발롱도르 노미네이트: 1982, 1983
  • 옹즈 드 옹즈: 1982, 1983, 1988
  • 벨기에 골든 슈: 1982
  • 20세기 벨기에 골든 슈: 1995 (8위)
  • IFFHS 벨기에 올타임 드림팀: 2021

5.2. 감독

5.2.1. 클럽

5.2.2. 개인

6. 여담

이영표가 뽑은 3대 감독 중 한명이다. 다른 두명은 위르겐 클롭, 거스 히딩크 #


[1] 1988년 재정난으로 인해 이웃 클럽인 KRC 헹크와 합병된다. [2] 이후로 다시 한번 리그 우승을 하기까지는 24년이 걸렸다. [3] 선수들과 심판들을 매수하여 경기의 결과를 정해두고 그에 대해 배팅을 하는 것이 주가 되는 내용으로 이는 승부조작에 해당한다. [4] 원래 징계기간은 3년이었으나 항소로 인해 2년으로 단축되었고 1985년에 징계가 취소되었다. [5] 당시에는 A,B조 1위팀이 바로 결승전에서 붙는 방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