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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 | 어거스틴 스위니(Augustin Sweeny) |
한국식 이름 | 서신부(徐神父) |
생몰 | 1909년 ~ 1980년 1월 19일 |
출생지 | 아일랜드 더니골주 타케닉과멘트 타운 |
사망지 | 아일랜드 |
추서 | 건국훈장 애족장 |
1. 개요
아일랜드의 가톨릭 신부.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9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2. 생애
어거스틴 스위니는 1909년경 아일랜드 더니골주 타케닉과멘트 타운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가톨릭을 신봉했고, 오스트레일리아 멜버른에 유학가서 센트파트릭 중학교를 거쳐 멜버른 성 콜롬반 대학 철학부를 졸업한 뒤 1935년 아일랜드 성 콜롬반 신학교를 졸업했다. 이후 성 골롬반 외방선교회[1]의 선교사가 된 그는 조선 주재 신부의 명을 받아 목포성당에서 재임했다. 그는 처음에는 중앙성당 신부로 있다가 1936년 10월 산남 서흥리 홍로성당 주재신부로 부임했다. 이때 그의 아우 제롬 스위니(Jerome Sweeny) 신부도 제주 중앙성당 신부로 사목했다.당시 제주도의 가톨릭 세력은 스위니 신부와 토마스 다니엘 라이언 신부, 그리고 패트릭 도슨 신부 세 사람이 주도하고 있었다. 이들은 " 중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였을 경우, 동양에서 천주교의 포교는 불가능해지고 서양인은 동양 각처에서 쫓겨나게 될 것"으로 믿었다. 이에 그들은 1939년부터 신문과 라디오 방송이 항상 일본의 전과를 과대하게 보도되는 데 불만을 품고, 제주 천주교회에서 신자들에게 일본의 불공정한 보도를 비판하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1939년 2월경, 스위니 신부는 신자 강군평(康君平)에게 " 일본군은 중국의 쑤저우(蘇州)를 점령할 때 다수의 비전투원을 살해하였기 때문에 이는 너무나 비인도적이다."라고 말했고, 이어 1940년 4월 " 미국이 중국의 장제스를 지원하지 않으면 전쟁은 이미 끝났을 터인데, 미국이 적극적으로 지원하는 한 일본은 승리할 수 없다."라고 말하는 등 여타의 신자들에게도 반전(反戰)사상을 전파하였다. 또 서귀포에 거주하는 만주국 사람 당덕윤(唐德潤)에게 "지금 일본군은 중국의 창사를 점령하고 있지만 중국군이 완강히 저항하고 있기 때문에, 일본군 전사자가 많이 속출되어 손해는 일본이 더 클 것이다."고 하였다.
이 일로 스위니 신부는 1941년 12월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고, 1942년 10월 24일 광주지방법원에서 소위 육군 형법 및 해군 형법에 위반으로 금고 2년을 선고받았다. 1943년 5월 홍로성당의 관리 책임자도 스위니 신부의 명의로 되었던 것을 목포시 산정동의 일본인 와키다 아사고로(脇田淺五郞)[2] 신부의 명의로 변경하여 천주교를 일본화화는데 박차를 가했다. 이후 스위니 신부는 당국의 철저한 감시 속에서 연금 생활을 하다 1945년 8.15 광복 직후 해방되었다. 이후 아일랜드로 돌아가 사목활동에 전념하다 1980년 1월 19일에 선종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9년 어거스틴 스위니 신부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