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일제강점기 현 동국대학교 자리에 있던 일본 사찰인 대화정 조계사에 걸려 있던 범종.참고로 대화정 조계사는 현재의 조계사와는 다른 사찰이다. 그런데 재미있게도 나중에 대화정 조계사가 폐찰되고 종을 옮겨놓은 태고사가 현재의 조계사가 되면서 근 칠십여 년을 '조계사 종'이라고 불리게 됐다.
현재까지도 진품인가 위조품인가를 놓고 첨예한 논란이 벌어지는 뜨거운 감자 같은 유물이다. 만약 진품이라면 통일신라 시대에 만든 1200여 년이나 된 국보급 종이고, 위조품이라면 과거에 존재했던 진짜 범종을 공출하고 일제가 대신 만들어 걸어둔 것이다. 일제강점기 대화정 조계사가 폐사한 이후 종로 조계사로 옮겨졌고, 1998년 경기도 파주시 보광사에 옮겨졌다가 2010년 원래 있던 경기도 양평 상원사로 옮겨졌다.
2. 구(舊) 조계사종?
구(舊) 조계사종은 원래 경기도 양평군 용문산 상원사에 있던 범종이라고 하여 '용문산 상원사종'으로 불리기도 했다.[1] 그러나 본래 이 종이 있던 절은 용문산 상원사가 아니라 역시 용문산에 있던 보리사(菩提寺)였다. 보리사가 폐사가 되자 종을 가까운 용문산 상원사로 옮겨와 걸어두었던 것이다. 따라서 엄밀하게 이 종의 명칭은 원래 있던 절의 이름을 따서 '보리사 종'이나 '보리사 범종'이라고 해야 적절하다.좀 복잡한 문제지만, 위작설에 따르면 현재 상원사가 소장 중인 '구(舊) 조계사종'은 보리사 범종을 위조한 범종이 된다. 그러나 진품설을 따르면 보리사 범종이 바로 구(舊) 조계사종이다.
3. 조계사로 간 범종
양평 용문산 일대는 구한말 의병의 근거지가 되었고 일본군은 의병들의 근거지를 소탕한다는 명분으로 용문산 일대의 사찰들을 무차별로 불질렀다. 이때 범종이 있던 상원사도 불에 타 없어졌지만 범종만은 소실을 면했다.교토에 있는 정토종 사찰 히가시혼간지(東本願寺)는 일제의 후원을 받아 조선 진출을 꾀한 끝에 을사조약 이듬해 1906년에 서울시] 남산 아래에 '동본원사 경성별원'을 개원했다. 이 절이 바로 대화정 조계사(大和町 曹溪寺)다.[2] 대화정 조계사가 있던 자리가 오늘날 서울시 중구 남산동 3가, 소파로 139 한양교회이다.
동본원사 경성별원, 즉 조계사는 범종을 걸기 위해 여러 군데를 수소문하다가 전소된 상원사에 범종이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사들였다. 아마도 1907년쯤인 듯한데, 이능화는 1909년에 환속한 승려가 팔아넘겼다고 저서에 기술했다. 이능화가 연도를 착각했으나 조계사로 넘어간 정황은 정확하게 서술한 것 같다.
어쨌든 조계사는 범종을 구입한 뒤 상원사에서 용문역까지 인근 연수리 주민들을 대거 동원해 범종을 옮겼는데, 1908년 4월 23일에야 겨우 경성에 도착했다. 이틀 뒤 경성별원 설교장에 범종을 걸고 법회를 열었다고 한다. 이후 이 종은 '경성별원종'으로 불렸고 일제강점기에는 연말에 제야의 종을 이 종으로 쳤다고 한다. 그리고 경성방송국에서 그 타종을 라디오 생중계로 진행했다고 한다. 즉 현재의 보신각종이 하던 역할을 원래는 구(舊) 조계사종이 했다는 이야기다.
1939년에 조선총독부는 이 종을 보물로 지정했는데, 이 결정에는 한국 고미술과 고건축을 연구하던 세키노 다다시(関野貞)의 평가가 주요하게 작용했다. 세키노 다다시는 구 조계사종이 제작연대는 불분명하나 고려 초에 제작된 범종으로 신라양식과 중국양식을 절충한 독특한 종이자 우아한 작품이라고 평했다.
1945년 광복 이후에 남산의 조선신궁과 조선신사, 박문사등이 모두 폐쇄되고 철거될 때 조계사도 같은 처지가 되었고 그 시점에 범종은 종로의 태고사로 옮겨졌다. 이후 태고사가 조계사로 이름이 바뀌면서 조계사종이라고 불렸다. 우리나라 정부가 문화재 조사를 한 이후로는 국보 제367호로 지정했다.
4. 국보에서 해제되다
그런데 1962년 12월 12일에 문화재 관리 총국은 이 범종을 국보에서 해제했다. 해제의 사유는 이 범종이 진품이 아니라 위작이라는 것이었다. 위작 판정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인물은 당시 문화재위원이던 황수영 교수였다.황 교수는 구(舊) 조계사종은 한국 범종의 전통 양식과 확연하게 다름을 근거로 제시했다. 결정적으로 종의 윗부분인 용뉴( 龍 鈕)가 한국종은 단룡인데[3] 이 종은 두 마리 용을 묘사한 쌍룡뉴였다. 또한 종의 문양이 가사문인데 이는 일본 범종의 전형적인 특징이기 때문에 일본인이 만든 조잡한 가짜라고 주장했다. 황수영 교수는 원래 있던 보리사 범종을 일본인들이 일본으로 빼돌리고 경성별원에는 대충 만든 위작을 옮겨서 걸어두었다고 보았다.
이런 황 교수의 주장이 받아들여져 구(舊) 조계사종은 결국 국보에서 해제되었고 일본이 만든 가짜 범종이라는 비난 속에 결국 1998년 조계사는 이 종을 파주 보광사로 옮겼다. 그랬다가 2010년에 원래 종이 있던 양평 상원사가 재건되자 다시 양평 상원사로 돌아왔다..
5. 위작 관련 논란
그러나 몇몇 학자들은 황수영 교수의 위작설에 의문을 제기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았다. #- 경성별원은 이미 돈을 주고 이 종을 사들였다. 즉 형식적이든 어쨌든 간에 외견상 보이는 바로는 정상적으로 종을 구매했다. 그러니 동본원사 입장에선 굳이 위조품까지 만들어가면서 빼돌릴 이유가 있을지 의문스럽다. 게다가 일본이 문화재를 불법 반출할 때는 그냥 가져갔지 위조품을 만들어 빼돌린 경우는 없다.[4]
- 범종을 제작하는 데는 시간이 오래 걸린다. 아무리 위조품이라고 해도 말이다. 현재 보신각에 걸린 보신각종만 해도 제작기간이 1년 7개월이고 소형 범종도 만드는데 최소 1달은 걸리는데 사람만한 정교한 종을 만드는데 고작 1년도 안되는 시간에 해치울수 있었을까? 물론 한국과 일본의 종 만드는 방식은 다르지만, 일본 범종이라고 그 많은 쇠를 녹여 주물을 부어야 하는 이상 하루아침에 뚝딱 나올 리는 만무하다. 게다가 이게 일본에서 만들어진 종이라면 일본에서 실어와야 할 텐데 운반과정에도 시간과 돈이 든다. 이 모든 일을 1907년 7월부터 1908년 4월까지 아홉 달 만에 뚝딱 해치우기가 과연 가능할까? 또한 동본원사가 이런 수고와 돈을 들이면서까지 양평 상원사 동종을 빼돌릴 만한 이유가 있었을까?
- 구(舊) 조계사종을 자세히 살펴보면 흠집이 있다. 꽃집 테두리 중심부에 나뭇잎 모양 흠집이 남아있는데 마치 총알이나 포탄이 튕겨나간 듯한 모양새다. 만약 이 흠집이 총알이나 포탄으로 생겼다면 일본군이 상원사를 불태울 때 생겼을 가능성이 있다. 즉, 원래 상원사에 걸렸던 진품일 가능성이 있다는 이야기다.
- 일본으로 빼돌렸다는 '진품' 범종의 행방이 묘연하다. 만약 동본원사가 빼돌렸다면 동본원사 어딘가에, 또는 일본 어딘가에는 있어야 하는데 그 큰 범종이 어디에 있는지 지금까지도 모른다. 위작설을 제기한 황수영 교수도 진품의 행방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고 말하면서 반출 도중에 파기했을지도 모른다고 추측했지만 터무니없다. 만약 동본원사가 정말로 양평 상원사 동종을 입수하고 싶어서 가짜를 만들어 바꿔치기하는 수고를 들였다면, 양평 상원사 동종을 그만한 가치가 있는 보배로운 것으로 여겼단 뜻이다. 이처럼 기껏 힘들게 입수한 보배를 왜 파괴한단 말인가? 게다가 범종은 크고 무거운 것이라 아무리 몰래 옮기더라도 어딘가에는 운송의 흔적이 반드시 남아있을 텐데 그런 흔적은 아예 찾을 수가 없다.
위작설을 반박하고 나선 최초의 인물은 전각서예가 석도륜이다. 그는 국보에서 해제된 지 2년 후인 1964년에 <한국고금순례>라는 책에서 구(舊) 조계사종은 진품이고 신라시대에 만들어졌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자 황수영은 이듬해 <조명기박사화갑기념사학논총>에서 다시금 위작설을 강하게 주장했다.
1967년에는 츠보이 료헤이(坪井良平)가 진단학보 31호에 낸 '전 상원사종고'에서 세키노 다다시의 평가와 비슷하게 한국 범종과 초기 중국 범중의 형식을 절충한 독특한 범종이라고 평하며 진품이라고 주장했다. 1972년에 남천우 교수가 다시금 진품설을 강하게 주장했다. 남천우 교수는 7세기에 제작된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범종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성낙주 또한 구(舊) 조계사종은 진품이라고 주장하며 이 종이 중국의 범종양식을 들여온 신라가 오대산 상원사 범종과 성덕대왕신종으로 나아가는 과도기적 양식을 보여주는 단 하나뿐인 신라범종이라고 보았다. 그 근거는…
- 황수영 교수가 위작의 근거로 제시한 쌍룡뉴와 가사문은 원래 초기 중국 범종의 양식이다. 초기 중국 범종이 신라와 일본에 전해졌으니, 단순히 쌍룡뉴와 가사문를 근거로 일본 범종의 형태와 같으니 일본에서 만든 위조품이라고 주장함은 너무 단순한 합리화라는 것이다.[5]
- 오대산 상원사 범종과 성덕대왕신종에서 형성된 단룡뉴와 원통의 형식은 만파식적에서 나왔다는 해석이 있다. 이 해석대로라면 단룡뉴와 원통이 없다는 것은 만파식적이 나오기 이전에 만들어졌을 가능성이 있다는 이야기다. 만약 일본인들이 모조품을 만들려고 했다면 원래 있던 종의 형태를 본떠서 만들지 굳이 일본 범종처럼 만들 이유가 있었을까? 위조품이란 진짜처럼 보이려고 만드는 것이다. 이상하지 않은가? 만약 진품 보리사 범종이 존재하고 단룡뉴와 원통이 있었고 일본인들이 위조품을 만들려고 했다면, 그런 형식을 조잡하게나마 본떠서 만들려고 노력하지 않았을까?
- 구(舊) 조계사종의 표면에 새겨진 비천조각에는 운좌(구름 무늬)가 없다. 위작설에 따르면 운좌가 없는 것은 위조과정에서 범한 실수인데, 복잡한 비천조각은 하면서 그보다 간단한 운좌는 왜 빼먹었는지 이상하다.
- 황수영 교수는 당시 범종의 운반에 참여했던 마을 사람들의 증언을 내세웠다. 솔직하게 말해서 농촌의 순박한 청년들이 56년 세월이 흘러서 70~80세가 되었을 때에 한 증언이 얼마나 정확한지는 의문이다. 게다가 이들이 한국 범종과 일본 범종의 차이를 알았을 리도 만무하다. 이들의 증언으로 가지고 위작설을 제기함은 학술적이지 않다.
- 동본원사 경성별원은 일본 불교가 한국 불교를 장악하기 위해 크고 거창하게 세운 절이다. 이런 절에서 가짜 범종을 걸어놓고 수십 년 동안 가짜 범종을 치면서 예불을 드렸고 동본원사는 그 종을 조선의 3대명종 이라고 자랑했다는 결론이 된다. 게다가 이 가짜 범종은 일제강점기 내내 제야의 종소리로 조선 전국에 생중계까지 된 종이라는 이야기가 된다. 조잡하게 만든 가짜 범종이라면(그것도 단 9개월에 뚝딱 해치운) 제대로 된 소리가 날 리가 없는데 일제강점기 내내 어느 누구도 구(舊) 조계사종의 소리가 이상하다느니 하는 말을 한 사람이 없었다. 위작설을 받아들이면 일본인들은 아홉 달 만에 맑고 청아한 소리를 내는 훌륭한 가짜 범종을 순식간에 해치울 수 있는 기술력이 있단 결론이 나온다.[6]
6. 현재의 상황
이런 논란이 계속되자 결국 구(舊) 조계사종에 다시금 정밀조사를 시행했다. 카이스트 전통과학기술단이 진행한 진행된 과학조사 결과 구(舊) 조계사종은 한국 전통의 재료를 사용한 밀랍법에 의해 제조된 범종이라는 결론이 나왔다.게다가 구(舊) 조계사종의 성분을 분석해본 결과, 전통적인 신라 범종의 구성성분과 일치했다. 일본에서 만든 가짜 범종이라는 주장을 살펴보기 위해 일본의 나라 시대, 가마쿠라 시대, 에도 시대 등 범종의 구성성분과도 비교해 보았지만 화학적 조성에서 차이가 컸다. 오히려 납동위원소비는 804년에 만든 통일신라시대 선림원종과 일치했다.
이런 결과는 구(舊) 조계사종이 통일신라시대에 만들어진 진품일 가능성을 높여준다. 다만 범종의 내부가 근대의 재료로 훼손된 흔적도 발견되었는데 종의 윗부분인 천판 중심부의 납 성분이 천판의 다른 부위의 납 성분보다 납 함유량이 9배나 더 높았다는 것이다. 이는 범종 주조 이후에 누군가가 근대의 재료로 범종을 훼손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인데, 천판에 새긴 명문을 지워버리려 하지 않았는가 하는 주장이 나오기도 했다.
이런 과학적 분석결과를 근거로 일각에서 구(舊) 조계사종을 국보로 다시 지정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있지만, 구(舊) 조계사종이 통일신라의 진품으로 공인되려면 아직도 멀었다는 것이 주류의견이다.
2021년 9월, 경기도는 이 종을 양평 상원사 동종이라는 이름으로 경기도 유형문화유산에 지정했다. # 결국 경기도문화재로나마 문화재의 가치를 다시 인정받은 셈이다. 다만 해당 소식을 보도한 기사들에서는 카이스트의 조사 결과와 달리 고려 시대(11~12세기) 제작 추정 및 한국과 일본의 혼합 양식으로 서술하고 있다. 추가적인 연구가 필요한 지점이다. #
7. 같이보기
[1]
강원도
오대산
상원사와는 당연히 다른 절이다. 용문산이라는 이름을 쓰지 않으면 오대산 상원사의 범종과 오해할 우려가 있다. 마침 강원도 오대산의
상원사 동종도
통일신라 시대의 범종이라 오해하기 쉽다.
[2]
현재의 조계사는 일제강점기에는 태고사라 불렸다.
[3]
오대산의 상원사 범종과
국립경주박물관의
성덕대왕신종, 선림원지 파종 등이 모두 단룡 형식 용뉴의 대표적 형태다.
[4]
비슷한 시기 일본으로 무단 반출되었던
경천사 10층 석탑을 생각해 보면 된다.
[5]
고유한 단룡뉴 양식이 있는 우리나라에서도 쌍룡뉴 양식을 사용했다. 화재로 파괴되었던
낙산사 동종이나
선암사 소장 대원사 부도암종과 화순 만연사종
옛 보신각 동종등 여러 조선시대 범종 유물들만 해도 쌍룡뉴이다.
[6]
일본 범종과 한국 범종은 제작기법이 다르기 때문에 범종의 소리도 판이하게 다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