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6-26 23:19:22

앨빈 데이비스

앨빈 데이비스의 수상 경력 / 역대 등번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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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1984 MLB 올스타전 로고.png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올스타
19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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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예의 전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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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빈 데이비스 데이브 니하우스 제이 뷰너 에드가 마르티네즈 랜디 존슨
댄 윌슨 켄 그리피 주니어 루 피넬라 제이미 모이어 스즈키 이치로
펠릭스 에르난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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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MLB 아메리칸 리그 로고.svg 1984년 메이저 리그 아메리칸 리그 신인왕
론 키틀
( 시카고 화이트삭스)
앨빈 데이비스
( 시애틀 매리너스)
아지 기옌
( 시카고 화이트삭스)

시애틀 매리너스 등번호 21번
론 로니키
(1983)
앨빈 데이비스
(1984~1991)
데이비드 세기
(1998~1999)
캘리포니아 에인절스 등번호 21번
월리 조이너
(1986~1991)
앨빈 데이비스
(1992)
그렉 마이어스
(1992)
킨테츠 버팔로즈 등번호 33번

(1993)
데이비스
(1992)
레이놀즈
(19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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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앨빈데이비스.jpg
앨빈 데이비스
Alvin Davis
본명 앨빈 글렌 데이비스
Alvin Glenn Davis
출생 1960년 9월 9일 ([age(1960-09-09)]세)
캘리포니아 주 리버사이드
국적
[[미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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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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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구
]][[틀:국기|
파일: 기.svg
속령
]]
학력 존 W.노스 고등학교 - 노스 리버사이드 고등학교 - 애리조나 주립대학교
신체 185cm, 88kg
포지션 1루수, 지명타자
투타 우투좌타
프로입단 1978년 드래프트 8라운드 (전체 189번, SF)
1981년 드래프트 6라운드 (전체 144번, OAK)

1982년 드래프트 6라운드 (전체 138번, SEA)
소속팀 시애틀 매리너스 (1984~1991)
캘리포니아 에인절스 (1992)
킨테츠 버팔로즈 (1992)
종교 기독교

1. 개요2. 선수 경력
2.1. 아마추어 시절2.2. 시애틀 매리너스
2.2.1. 마이너 리그 베이스볼 시절2.2.2. 1984년 - 1985년2.2.3. 1986년2.2.4. 1987년 - 1989년2.2.5. 1990년2.2.6. 1991년
2.3. 캘리포니아 에인절스 시절2.4. 킨테츠 버팔로즈 시절2.5. 은퇴 이후
3. 플레이 스타일4. 수상 내역5. 여담6. 연도별 성적
6.1. MLB6.2. NPB

[clearfix]

1. 개요

미국의 전 야구 선수. 주 포지션은 1루수였다.

신생팀이였던 시애틀 매리너스의 첫 번째 프랜차이즈 선수이며, 시애틀 매리너스 구단 명예의 전당 최초로 입성하였다. 별명은 Mr. Mariner

2. 선수 경력

2.1. 아마추어 시절

고등학교 시절 1루수 3루수로 나와 3학년 때 타율 4할을 기록하며 팀을 리그 우승으로 이끌었고, 4학년 때는 리그 MVP로 선정되었다. MVP 수상 후 여러 대학들로부터 장학금 제안을 받았으며, 그중 애리조나 주립대학교의 코치 짐 브록[1]의 전액 장학금 제안을 받아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의 8라운드 지명을 거절하고 애리조나 주립대학교에 입학했다.

2학년 때 애리조나 주립대학교 야구팀 선 데빌스에서 지명타자로 타율 .370 10홈런 49타점을 기록하며 활약했다. 또한, 알래스카 서머 리그에 골드패너스 소속으로 참가해 NBC 월드시리즈 우승을 경험했다.[2]

3학년 시즌에는 팀의 공동 주장 및 주전 1루수로 자리 잡았으며, 어깨 부상과 리프트밸리열 감염에도 불구하고 타율 .395로 시즌을 마쳤다. 팀은 오클라호마 주립대학교를 꺾고 대학 월드 시리즈 우승을 차지했고, 대회 올-토너먼트 팀과 Pac-10 컨퍼런스 올스타 팀에 선정되었다.

시즌 종료 후 오클랜드 애슬레틱스의 6라운드 지명을 받았으나 학사 학위를 받기 위해 이를 거부했다.

4학년 시니어 시즌에 타율 .351, 13홈런, 91타점의 성적을 거두며 Pac-10 컨퍼런스 남부 지구 MVP와 서드 팀 올아메리칸에 선정되었다. 짐 브록 코치는 그를 "내가 코치 생활을 하며 만난 가장 완벽한 인간"이라고 평가했다.

1982년 신인 드래프트에서 시애틀 매리너스의 6라운드 지명을 받고 입단했다. 시애틀의 계약금은 전년도 오클랜드의 제안인 4만 달러보다 훨씬 적었고,[3] 대학으로부터 교육 심리학 석사 과정에 대한 전액 장학금 제안을 받으면서 야구를 포기할까 고민하기도 했지만, 어머니의 "어떤 결정을 하든 절대 뒤돌아보지 마라"는 조언을 듣고 야구를 선택했다고 회상했다.

2.2. 시애틀 매리너스

2.2.1. 마이너 리그 베이스볼 시절

지명 직후 산하 더블A 구단인 린 세일러즈에 배정되어 74경기에 출장해 타율 .284 12홈런 56타점 출루율 .419를 기록하며 팀의 후기 시즌 우승에 크게 기여했다. 시애틀 마이너 리그 디렉터인 할 켈러는 그에 대해 "테드 윌리엄스 이후 내가 본 젊은 타자 중 가장 인내심이 많다"고 극찬했다.

1983년에도 더블A에서 131경기에 출장해 타율 .296, 18홈런으로 뛰어난 활약을 이어갔으며, 120개의 볼넷을 골라내며 리그 선두에 올랐다. 이러한 성과로 서던 리그 올스타 팀에 선발되는 영예를 안았다.

1984 시즌 스프링캠프 비 로스터 초청 선수 명단에 포함되었고, 이후 트리플A로 승격되었다. 트리플A에서 단 한 경기를 뛴 후, 주전 1루수 켄 펠프스가 몸에 맞는 공으로 손뼈가 부러지는 부상을 당하자 MLB로 콜업되었다.

2.2.2. 1984년 - 1985년

4월 11일, MLB 데뷔전에서 데니스 에커슬리를 상대로 3점 홈런을 기록하며 인상적인 출발을 보였다. 이어진 두 번째 경기에서는 솔로 홈런을 터뜨려 메이저 리그 역사상 데뷔 첫 두 경기에서 홈런을 친 다섯 번째 선수가 되었다.

4월 한 달 동안 타율 .369 7홈런 17타점으로 맹활약했고, 펠프스가 돌아온 뒤에도 주전 1루수 자리를 지켰다.

5월 12일 뉴욕 양키스와의 경기 중 파울 타구에 얼굴을 맞아 코가 골절되는 부상을 당했지만, 6일 만에 복귀해 뜨거운 타격감을 이어갔다. 전반기를 타율 .287 18홈런 65타점 OPS .933으로 마무리하며 아메리칸 리그 올스타 팀에 선발되는 영광을 안았다.

상대 투수들이 변화구 위주의 피칭을 하면서 후반기 성적은 다소 하락했지만, 타율 .281 9홈런 OPS .842로 여전히 준수한 성적을 기록했다. 시즌 최종 성적은 타율 .284 27홈런 116타점 OPS .888 wRC+ 140 fWAR 5.3을 기록했다.

시즌 종료 후 1위표 28표 중 25표를 휩쓸며 아메리칸 리그 신인왕을 수상했다. [4]

비시즌 동안 사타구니 염좌 부상을 겪은 여파로 전반기에 단 7개의 홈런과 33타점, 타율 .266에 그쳤다. 그러나 후반기에 타율 .311 11홈런 OPS .908의 맹타를 휘두르며 활약해, 최종적으로 타율 .287 18홈런 78타점으로 시즌을 마쳤다.

2.2.3. 1986년

3월에 실시한 일상적인 시력 검사에서 오른쪽 눈은 멀쩡했지만, 왼쪽 눈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이 발견되었다. 이 영향으로 그는 타율 .271 18홈런 72타점 OPS .799 fWAR 0.9를 기록하며 커리어 로우 시즌을 보냈고, 수비에서도 불안한 모습을 많이 보였다.

훗날 데이비스는 "변화구 대처가 어려워졌고, 수비 또한 쉽지 않았다. 특히 당시 시애틀의 홈구장이었던 킹돔의 조명이 어두워 어려움을 겪었다"고 회고했다.

시즌 종료 후, 신임 단장 딕 발더슨이 팀 예배 모임을 중단하라고 지시하자, 이에 반발하며 프런트와 갈등을 빚었다. 데이비스와 경영진 간의 회의에서 경기 전에 경기장에서 예배를 열 수 있는 타협안을 받아들이며 갈등은 마무리됐다.

2.2.4. 1987년 - 1989년

비시즌 동안 여러 안과를 찾아다닌 끝에 희귀 질환인 원추각막을 진단받았고, 하드렌즈를 착용해 시력을 회복했고, 타율 .295 29홈런 100타점 OPS .886을 기록하며 신인 시즌과 맞먹는 활약을 펼치며 부활에 성공했다.

최종 성적 타율 .295 18홈런 69타점 OPS .875 fWAR 3.7로 시즌을 마쳤다. wRC+는 141로 84년 보다 높은 수치를 기록하며 타격 커리어 하이를 갱신했다.

1989년 1월, 시애틀과 3년 445만 달러의 연장 계약을 체결했다.

메이저 리그 커리어 최고 타율(.305)과 볼넷(101개)을 기록하며, 21홈런, 95타점, OPS .920, wRC+ 155, fWAR 4.1로 다시 한 번 자신의 타격 커리어 하이를 갱신했다.

2.2.5. 1990년

1990년 시즌 전에 시애틀은 피트 오브라이언을 영입했다. 데이비스는 두 선수가 1루수와 지명타자 역할을 번갈아 가며 맡을 것이라 생각했으나, 오브라이언이 주전 1루수가 되었고 데이비스는 주로 지명타자로 기용되었다.

1990년 7월 22일, 밀워키 카운티 스타디움에서 테디 히게라를 상대로 안타를 쳐내며 시애틀 매리너스 최초로 1,000안타를 기록한 선수가 되었다. 그는 시즌 타율 .283 17홈런 68타점 OPS .816을 기록하며, 작년만큼은 아니지만 준수한 성적을 올렸다.

2.2.6. 1991년

팀은 83승 79패로 첫 위닝 시즌을 기록했지만, 데이비스는 타율 .221 12홈런 OPS .635 fWAR -1.6으로 부진한 성적을 기록했다. 부진한 성적 탓에 왼손 투수를 상대로 경기에서 제외되었고, 클러치 상황에서 종종 대타로 교체되었다.

1991년 시즌 마지막 경기에서, 그는 6회 대타로 나왔을 때와 9회 타석에 섰을 때 킹돔 관중들로부터 기립 박수를 받았다. 시즌이 끝나면 자유 계약 선수가 될 예정이었고, 부진한 성적 때문에 시애틀에서의 마지막 경기가 될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데이비스는 시애틀에 남고 싶었지만, 팀은 이미 오브라이언과 재계약을 맺었고 1루 유망주로 티노 마르티네스가 있었기에 그를 잡을수가 없었다.

2.3. 캘리포니아 에인절스 시절

매리너스로부터 오퍼가 오지 않자, 캘리포니아 에인절스와 1년 80만 달러의 계약을 체결했다.

1992년 에인절스에서 40경기동안 홈런없이 .250의 타율을 기록하는데 그치던 중 킨테츠 버팔로즈가 데이비스를 영입하기 위해 에인절스에 연락했고, 데이비스의 동의를 받고 에인절스에서 방출되었다. MLB 마지막 타석은 시애틀 원정 경기에서의 1타점 적시타였다.

2.4. 킨테츠 버팔로즈 시절

40경기를 뛰며 타율 .275와 5개의 홈런을 기록하던 중 부상을 당하며 퇴단하였다.

2.5. 은퇴 이후

부진한 성적과 일본에서 입은 부상으로 인해 메이저 리그 복귀가 어려울 것이라고 판단해 32세의 이른 나이에 은퇴를 선언했다. 은퇴 당시, 매리너스 프랜차이즈의 공격 부문에서 10개 항목 1위를 차지하고 있었다.

은퇴 후 성경 기반 재정 상담사로 일했으며, 마틴 루터 킹 고등학교에서 보조 코치로도 활동했다.

1997년 시애틀 매리너스 명예의 전당에 최초로 입성했다.

2012년 부터 시애틀 매리너스 오프시즌 선수 개발 특별 보좌관을 맏고 있다.

3. 플레이 스타일

컨택, 파워, 선구안을 두루두루 겸비한 타자로 특히 출루 능력이 뛰어나, 통산 타출갭이 1할을 기록했다.

다만, 주루와 수비는 좋지 못했는데 통산 도루는 7개뿐 이였으며 수비도 리그 평균 이하였다.

4. 수상 내역

수상
파일:MLB 아메리칸 리그 로고.svg 아메리칸 리그 신인왕 (1984)
파일:MLB 로고.svg 올스타 ( 1984)

5. 여담

  • 불우한 가정사를 지냈는데 앨빈이 6살일 때 형 하워드가 고등학교 졸업 파티에서 친구를 지키다 칼에 찔려 사망했고, 10살 때는 아버지 윌리엄이 대동맥류 수술을 받다가 사망했다고 한다.
  • 그의 별명 Mr Mariner는 시애틀 매리너스의 전설적인 캐스터 데이브 니하우스가 1989시즌 때 지어준 것이다.

6. 연도별 성적

6.1. MLB

파일:MLB 로고.svg 앨빈 데이비스의 역대 MLB 기록
<rowcolor=#fff> 연도 G PA H 2B 3B HR R RBI SB BB SO AVG OBP SLG OPS fWAR bWAR
1984 SEA 152 678 161 34 3 27 80 116 5 97 78 .284 .391 .497 .888 5.3 5.9
1985 155 677 166 33 1 18 78 78 1 90 71 .287 .381 .441 .822 3.1 3.0
1986 135 562 130 18 1 18 66 72 0 76 68 .271 .373 .426 .799 0.9 1.0
1987 157 662 171 37 2 29 86 100 0 72 84 .295 .370 .516 .886 2.9 2.1
1988 140 582 141 24 1 18 67 69 1 95 53 .295 .412 .462 .875 3.7 3.3
1989 142 611 152 30 1 21 84 95 0 101 49 .305 .424 .496 .920 4.1 3.8
1990 140 592 140 21 0 17 63 68 0 85 68 .283 .387 .429 .816 2.7 2.9
1991 145 528 102 15 1 12 39 69 0 56 78 .221 .299 .335 .635 -1.6 -1.8
<rowcolor=#fff> 연도 G PA H 2B 3B HR R RBI SB BB SO AVG OBP SLG OPS fWAR bWAR
1992 CAL 40 118 26 8 0 0 5 16 0 13 9 .250 .331 .327 .657 -0.1 -0.1
MLB 통산
(9시즌)
1206 5010 1189 220 10 160 568 683 7 685 558 .280 .380 .450 .830 21.1 20.0

6.2. NPB

파일:NPB 로고.svg 앨빈 데이비스의 역대 NPB 기록
<rowcolor=#ffffff> 연도 소속 경기 타석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득점 타점 도루 볼넷 삼진 타율 출루율 장타율 OPS wRC+ WAR
1992 킨테츠 40 147 36 3 0 5 10 12 1 14 19 .275 .347 .412 .759 107 0.0
NPB 통산
(1시즌)
40 147 36 3 0 5 10 12 1 14 19 .275 .347 .412 .759 107 0.0


[1] 올해의 코치 4회 수상자이자, 대학 야구 명예의 전당 입성자. [2] 이때 훗날 시애틀 매리너스에서 팀 동료가 되는 해럴드 레이놀즈와 함께 뛰었다. [3] 당시 시애틀의 구단주는 심각한 짠돌이로 유명한 조지 아지로스였다. [4] 나머지 3표는 같은 팀 동료인 마크 랭스턴에게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