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연방 상원의원 (뉴멕시코 주 클래스 2) | ||||
주 승격 | ← |
제62~66대 앨버트 폴 |
→ |
제67~68대 홀름 O. 버섬[1] |
|
|
<colbgcolor=#FFDE13><colcolor=#C86413> 출생 | 1861년 11월 26일 |
미국 켄터키주 프랭크퍼트 | |
사망 | 1944년 11월 30일 (향년 83세) |
미국 텍사스주 엘패소 | |
국적 |
[[미국| ]][[틀:국기| ]][[틀:국기| ]] |
재임기간 | 제28대 내무장관 |
1921년 3월 5일 ~ 1923년 3월 4일 | |
연방상원의원(뉴멕시코 클래스 2) | |
1912년 3월 27일 ~ 1921년 3월 4일 | |
가족 |
엠마 갈랜드 모건 (배우자) 슬하 4명 |
소속 |
(~1904년) (1904년~1944년) |
군사 경력 | |
복무 | 미국 육군 |
1898년 ~ 1899년 | |
최종 계급 | 대위 |
주요 참전 | 미국-스페인 전쟁 |
[clearfix]
1. 개요
미국의 정치인,법조인, 워터게이트 사건 이전 미국 정계에서 가장 큰 스캔들이었던 티포트 돔 스캔들의 중심 인물로 유명하다.2. 생애
남북 전쟁이 진행 중이던 1861년 11월 26일 켄터키주 프랭크퍼트의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어려운 가정 사정 때문에 어릴 때부터 면화 공장에서 일해야 했고 호흡기 질환까지 생긴다. 학교 교육도 거의 받지 못해 공부의 대부분을 야간에 독학으로 했다. 청년이 되고서는 약국 직원,교사로 일한다. 이후 뉴멕시코에 이주해[2] 광부,가축 중개매매인으로 일하면서 공부 자금을 모았고 그 돈으로 텍사스 클락스빌에서 법학을 배우던 중 배우자를 만나 결혼한다. 1888년에 민주당 소속으로 뉴멕시코 준주 하원의원[3]에 출마했지만 간발의 차이로 낙선한다. 2년 뒤인 1890년 폴은 변호사 자격증을 딴 뒤 선거에 재도전해서 현역 준주의원을 꺾고 당선된다.1893년에는 뉴멕시코 준주 제3 지방법원의 부판사가 되었지만 선거 결과를 민주당에게 유리하게 계산했다는 의혹으로 얼마 안 가 사임한다. 준주의원,준주 법무장관 등 요직을 역임하다가 미국-스페인 전쟁 시기에 미 육군 대위로 복무한다. 종전 이후 다시 주 정계에 복귀하고 준주 헌법 작성에 기여한 그는[4] 1904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시어도어 루스벨트 지지 선언을 하면서 정당을 공화당으로 전환한다.[5] 1912년 뉴멕시코가 주로 정식 승격되자, 상원의원에 출마해서 1위로 당선된다.[6] 상원에서는 반 우드로 윌슨, 고립주의 성향을 보였다. 주민들에게도 인기가 없는 편이어서 1918년 선거에서 재선에 실패할 것이라고 예상되었지만 자식 둘이 스페인 독감 때문에 죽어 동정표를 받고 당선되었다. 상원의원을 지내던 중 워런 G. 하딩, 해리 M. 도어티(Harry M. Daugherty)와 친분을 쌓아 오하이오 주 출신이 아님에도 "오하이오 갱"의 일원이 된다.
1920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공화당 하딩의 승리로 정권이 교체되자 폴은 내무장관에 임명된다. 그는 하딩 대통령의 지시로 와이오밍에 위치한 티포트 돔(Teapot Dome)[7] 석유 저장고의 관할을 해군부로부터 넘겨받는다. 내무부는 관할권을 넘겨받은 석유 저장고 두 곳의 운영권을 석유업자들에게 헐값에 넘겼다. 문제는 이 과정에서 폴이 석유업자들에게 40만 9천 달러의 뇌물을 챙긴 것이 들통나버렸다. 그는 뇌물수수 사실을 부정했지만, 스캔들의 범위가 공화당 전체로 확대되고 친구 하딩마저 급사해 방패막이 사라져버린다.[8] 하딩으로부터 대통령직을 승계한 캘빈 쿨리지는 그를 보호해줄 생각이 없었고[9] 로버트 라폴레트가 주도한 상원 조사위원회가 스캔들을 면밀히 파헤쳤다. 결국 폴은 최초로 구속된 현직 장관이라는 오명을 얻는다. 하지만 그의 재판은 1930년대까지 질질 끌리면서 시민들의 관심에서 멀어졌고 폴은 1931년부터 1932년까지 뉴멕시코 주 교도소에서 고작 9개월만 복역했다. 석방된 뒤에는 자산을 대부분 매각하고 빈곤하게 생활하다가 1944년 엘패소에서 사망한다.
3. 소속 정당
소속 | 기간 | 비고 |
|
? - 1904 |
입당 정계 입문 |
|
1904 - 1944 |
입당[10] 정계 은퇴 사망 |
4. 선거 이력
연도 | 선거 종류 | 선거구 | 소속 정당 | 득표수 (득표율) | 당선 여부 | 비고 |
1888 | 뉴멕시코 준주 하원의원 선거 | 뉴멕시코 준주의회 선거구 |
|
- (-%) | 낙선 (2위) | [11] |
1890 | 뉴멕시코 준주 하원의원 선거 | - (-%) | 당선 (1위) | 초선 | ||
1896 | 뉴멕시코 준주 하원의원 선거 | - (-%) | 재선 | |||
1902 | 뉴멕시코 준주 하원의원 선거 | - (-%) | 3선 | |||
1912 | 미국 연방상원의원 선거 | 뉴멕시코 |
|
39표 | 초선[간] | |
미국 연방상원의원 선거 |
|
|
||||
1913 | 미국 연방상원의원 재선거 | 43표 | 재선[간] | |||
1918 | 미국 연방상원의원 선거 | 24,322 (51.40%) | 3선[16] |
5. 여담
- 포커를 좋아했다. 하딩과 친해진 이유도 그가 하딩의 포커 친구였기 때문이다. 다른 취미로는 서부인답게 사격이 있었다.
- 빌리 더 키드를 죽인 보안관 팻 개릿(Patrick Floyd Jarvis Garrett)의 살해자 제시 브레이젤(Jesse Wayne Brazel)을 변호했다.
- 부패 정치인이었지만 정치 경력 초반에는 자수성가한 인물답게 소규모 목장주들을 도운 적도 있다. 또한 미군 내 인종차별 때문에 부당하게 군대에서 쫓겨난 헨리 오시안 플리퍼를 변호해주었고 선거 고문으로 등용했다. 내무장관이 된 후에는 그를 내무부 보좌관으로 채용했다.
[1]
전임자
앨버트 폴 사임으로 주지사에 의해 임명됨
[2]
뉴멕시코의 기후가 호흡기 질환 치료에 좋다는 소문이 있었다.
[3]
한국의
광역의원과 같은 개념
[4]
대부분
진보주의 성향이었던 당시 서부 주 기준
여성 참정권이 보장되지 않고
주민소환,상원의원 직선제 내용도 없는 매우 보수적인 헌법이었다. 그나마
히스패닉의 권리는 어느 정도 보장했다.
[5]
폴은 성향 차이에도 불구하고 시어도어 루스벨트의 측근으로 활동했다.
[6]
뉴멕시코주의 첫 연방상원의원 선거는 주의회를 통한 간접 선거였다. 폴은 뉴멕시코주의 주 승격에 딱히 한 게 없다는 비판을 받았음에도 다른 공화당 정치인
토머스 B. 캐트론과의 야합으로 상원의원에 당선되었다. 다음 선거부터는 직선제로 상원의원 선출법이 변경되었다.
[7]
지형이 찻주전자 뚜껑같이 생겨 티포트 돔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8]
그러나 폴이 하딩과 다른 내각 구성원들의 비리까지 떠안은 희생양이었다는 주장도 몇몇 사학자들에 의해 제시되었다.
[9]
하딩 시대의 부패 정치인들을 쳐내면서 인기를 얻었다.
[10]
시어도어 루스벨트 지지
[11]
50표차 낙선
[간]
주의회 간선
[간]
[14]
선거 무효화
[간]
[16]
1921.3.4 사임(내무장관 취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