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압델카데르

파일:압델카데르 1850.jpg 파일:압델카데르 1852.jpg
프랑스 유배 중 파리에서의 압델카데르. 좌측은 석방 전 (1850년), 우측은 석방 후 (1852년)
1. 개요2. 생애
2.1. 대프랑스 항쟁
2.1.1. 독립 국가 건설2.1.2. 근대 국가 건설2.1.3. 궁지에 몰리다2.1.4. 모로코와의 대립과 항복
2.2. 프랑스 유배 생활 (1847-52)2.3. 시리아에서의 말년
2.3.1. 기독교도들을 구하다2.3.2. '프랑스의 벗'
2.4. 죽음 및 사후
3. 평가4. 여담


아랍어 الأمير عبد القادر بن محي الدين الجزائري
영어 Emir Abdelkader ibn Muhieddine El Djazairi
국문 에미르 압델카데르 이븐 무히에딘 엘-제자이리

생몰 1808년 9월 6일 ~ 1883년 5월 26일
재위 1832년 11월 27일 ~ 1847년 12월 23일

1. 개요

알제리의 첫 근대 국가를 세운 민족 영웅. 수피 성직자 및 학자 가문의 수재로, 부친 무히에딘과 함께 프랑스 7월 왕정의 알제리 침공에 맞서 봉기하였다. 1832년 가문의 거점 마스카라에 에미르국을 세운 후, 1834년부터 연이어 프랑스 군을 격파하며 알제리 내륙 대부분을 석권하고 저항 세력을 통합하였다. 이후 근대 국가 설립을 시도했으나, 1840년대 들어 프랑스 군의 대대적인 공세에 밀려 모로코로 피신하였다.

다만 모로코마저 프랑스에 패배하자 1847년 결국 협상을 통해 항복하였고, 약속을 져버린 프랑스에 의해 투르 일대로 유배되었다가 1852년 국내 및 국제적인 동정 여론으로 석방되었다. 이후 부르사를 거쳐 시리아의 다마스쿠스로 은퇴한 그는 1860년 드루즈 폭동 당시 학살 대상이 된 기독교도들을 보호하여 유럽 각국에서 의인으로 서훈되었다. 1883년 사망한 후 현지에 묻혔다가 1965년 고국의 알제로 이장되었다.

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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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 수학한 고향 엘구엔타의 모히에딘 자위야 (수피 성원)

1808년 9월 6일 마스카라 근처 엘구엔타의 성직자 가문에서 출생하였다. 부친 무히에딘 알-하사니는 이드리스 왕조를 통해 무함마드 혈통을 이어받은 샤리프로, 카디리야 수피 종단의 무캇담 (성직자)이었다. 그의 자위야는 19세기 초엽 들어 와디 엘함맘 강변의 인기 있는 공동체가 되어 있었다. 어린 시절 압델카데르는 그곳에서 또래 학생들과 신학, 법학, 어문학 등 보편적이고 전통적인 교육 이수하며 5살에 글을 깨우치고 14세에 쿠란을 암송하여 호칭을 얻는 등 출중함을 드러내었다.

15살에는 고등 교육을 위해 대도시인 오랑으로 이주하여 달변가로서 동료들과 시와 종교적 논쟁을 통해 토론 학습을 주도하는 등 재능을 펼쳤고, 졸업 무렵에는 근대 사회에서의 이슬람법 적용에 대한 여러 논문을 저술하였다. 그리고 17세이던 1825년, 부친과 함께 메카 순례 (핫지)를 떠나 메카에서 (후일 러시아에 맞서 캅카스 이맘국의 이맘이 되는) 이맘 샤밀과 다양한 주제로 오랜기간 담화를 나눈다. 이후 다마스쿠스와 바그다드로 떠나 이븐 아라비, (알제리에서 알-질랄리라 불린 카디리야 종파의 창시자) 압둘카디르 길라니 등 무슬림 유명인들의 무덤을 방문하였다. 이러한 경험을 통해 종교적 열정을 강화하였고, 알제리로 돌아오던 중 이집트에서 메흐메드 알리의 개혁에 감탄하였다.

2.1. 대프랑스 항쟁

그가 알제리로 돌아오고 불과 몇 달 후 프랑스 7월 왕정의 침공이 개시되었다. 1831년 1월, 프랑스 군이 오랑에 접근하자 주민들은 무히에딘을 저항의 지도자로 추대하였다. 무히에딘은 지하드를 선포한 후 압델카데르와 함께 성밖으로 나가 싸웠다. 비록 오랑은 함락되었으나 이후 1832년 가을, 서부 부족들의 모임에서 무히에딘은 재차 아미르 알-무미닌 (에미르의 정식 칭호)으로 추대되었다.

2.1.1. 독립 국가 건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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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37년경 압델카데르 휘하 마스카라 토후국의 영토 30대 초엽의 압델카데르 초상화

이때 무히에딘이 고령을 이유로 거절하자 함께 활약하던 압델카데르가 부친을 대신하여 에미르에 올랐고, 5일 후 마스카라 대사원에서 즉위식을 거행하였다. 이로써 탄생한 마스카라 토후국은 압델카데르가 주도한 보복 원정과 외교를 통해 알제리 서부의 주요 부족들을 통합하고 안정을 회복하며 세력을 키워나갔다. 마스카라 토후국은 점차 알제리 현지인들의 구심점이 되었고, 프랑스 장군 드미셸은 1834년 휴전을 체결하며 압델카데르를 저항 측의 협상 대상으로 보았다. 이때의 ‘드미셸 협정’으로 프랑스는 압델카데르에 서부 내륙을 넘겨주고, 그가 그곳에 치중하는 동안 알제 일대에 대한 통제력을 강화하고자 하였다. 다만 압델카데르가 츨레프, 밀리아나, 메데아 등 내륙 지역들의 부족들을 복속시키며 프랑스의 예상보다 더 활발히 세력을 확장하자, 드미셸 장군은 해임되고 새로 부임한 트레젤 장군은 곧바로 전쟁을 재개하였다.

알제리 인들을 얕잡아보던 프랑스 군은 1834년 6월의 마크타 전투에서 불의의 패배를 겪었다. 1만 5천의 병력을 거느린 압델카데르는 모스타가넴 서쪽, 마크타 강 하구의 습지를 지나던 2천 5백의 프랑스 군을 기습하여 대파하였다. 프랑스 군은 황급히 아르제우 항으로 도주하였고, 알제리 인들은 전사한 프랑스 군의 수급으로 경고용 피라미드를 쌓았다. 이 승리로 26살의 압델카데르는 알제리 인들의 영웅으로 떠올랐고, 충격에 휩쌓인 프랑스 당국은 재차 장군을 교체하며 보복에 나섰다. 프랑스 군은 1835년 마스카라 점령과 1836년 시카크 전투 등 몇차례 승리를 거두며 명예 회복은 성공했지만 압델카데르를 궁지로 몰아 넣을 수는 없었고, 본국의 부담과 반전 기류가 더해지며 1837년 결국 재차 그와 휴전 협상에 나섰다. 같은 해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휴전을 체결하라는’ 지시와 함께 알제에 부임한 뷔죠 장군과 협상을 지속한 끝에 5월 타프나 조약을 맺었다.

2.1.2. 근대 국가 건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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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스카라, 메데아와 함께 중심 거점이던 밀리아나의 병기창 전경

이로써 압델카데르는 알제 해안에 대한 프랑스의 지배권을 인정하는 대가로 사실상 내륙 전역에 대한 지배권을 얻었고, 프랑스에게서 주권을 인정받았기에 더욱 세력을 확장하였다. 휴전 이후 압델카데르는 (마스카라에서 천도한) 타그뎀트를 중심으로 내륙의 부족들을 규합하여 근대 국가 수립에 힘썼다. 다만 수피 출신이었던 그는 정치적인 성향이 짙은 술탄 칭호를 계속 거절하며 영적인 권위를 유지하는데 용이한 에미르 칭호에 머물렀고, 종교학자 출신들을 중용하였다. 통화마저 무함마디야라 명명되었을 정도로 사실상 신정 국가였던 그의 토후국은 전적으로 개인의 카리스마에 의해 유지되었다. 다만 종교를 기치로 삼았음에도 압델카데르는 기독교도나 유대인들도 등용하는 등 능력만 있다면 국적과 종교를 가리지 않는 관용과 실용주의적 태도를 견지하였다. 그 중에는 심지어 프랑스인 레옹 로슈도 있었다.

군사적 측면에 있어 압델카데르는 2천의 상비군을 두었고, 전쟁이 터지면 여러 부족에서 모여든 자원병들로 크게 불어났다. 각 도시들에는 무기 창고 및 공방이 세워져 전쟁을 준비하였고, 프랑스의 앙숙 영국에게서 무기를 수입하기도 하였다. 따라서 그의 토후국은 신정 체제이면서도 근대 국가로도 평가된다. 한편 근대화를 추진하면서도 (다른 중동의 군주들과 다르게) 압델카데르는 여전히 텐트에 사는 등 검소함을 중요한 미덕으로 여겼고, 민중들에게 민족 의식 및 독립 정신과 함께 솔선수범의 태도로 검소함을 설파하였다. 압델카데르는 남쪽 라구아트 인근의 수피 조직인 티자니야의 토벌에 나서 그 수도인 아인 마흐디를 포위하였고, 1838년 함락하였다. 그동안 동북부의 콩스탕틴 방면으로도 세력 확장을 시도했으나 그 베이가 저항하여 실패하였고, 결국 일대는 프랑스 령으로 넘어갔다.

2.1.3. 궁지에 몰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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압델카데르와 프랑스 군의 전투도

1839년, 프랑스의 오를레앙 공은 성장해가던 토후국의 싹을 자르기 위해 콩스탕틴 인근의 토지 분쟁을 트집 삼아 전쟁을 재개하였다. 압델카데르는 프랑스측 장군 뷔죠와 재차 협상에 나서려 했으나, 그는 이전과 돌변하여 초토화 작전으로 일관했다. 이로써 압델카데르의 경기병을 중심으로 한 게릴라 전술은 그 바탕인 농촌 마을들이 사라지며 점차 효과를 잃어갔고, 압델카데르는 인품과 연설로 사람들을 다독이며 저항을 이어갔지만 죽음과 항복의 선택지에 놓인 농민들은 대부분 후자를 택했다. 프랑스 군의 잔혹함에도 포로들을 먹일 식량이 충분하지 않자, 전부 석방하는 등의 기사도를 발휘하던 압델카데르는 1841년부터 점차 궁지에 몰렸다.

그럼에도 이웃한 모로코의 지원을 받으며 버티던 그는, 1842년 틀렘센이 함락되며 모로코와의 왕래도 어려워지자 결국 알제리를 떠나 모로코로 망명하였다. 프랑스는 모로코에 압델카데르의 신병을 요구하였고, 술탄 압델라흐만이 거부하자 모로코를 침공하였다. (1844년) 프랑스 군은 이슬리 전투에서 모로코 군을 격파하였고, 결국 탕헤르 조약으로 모로코는 프랑스의 알제리 지배를 인정하게 되었다. 압델카데르는 재차 알제리 서부로 돌아와 시디벨아베스 인근의 시디 브라힘 전투에서 5백에 프랑스 군을 전멸시키고 마을을 점령했으나, 이미 카빌리 베르베르 인들을 제외한 대부분의 부족들이 협조를 거부한 상황이라 압델카데르는 재차 모로코로 향하였다.

2.1.4. 모로코와의 대립과 항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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압델카데르의 항복을 묘사 삽화

탕헤르 조약에 의거하여 압델카데르를 쫓아내야 했던 술탄 압델라흐만은 프랑스의 보복이 두려워 서두르기로 하였다. 후자는 우선 비밀리에 별동대를 보내어 압델카데르의 보급선을 끊도록 하였는데, 6개월 만에 발각되어 격퇴되었다. 이후 압델라흐만은 자객을 보내었고, 압델카데르는 독서 도중 단검을 들고 있는 거구의 자객과 조우하였다. 하지만 자객은 마치 선지자의 후광이 드리운 것 같다며 물러나 암살은 실패하였다. 이에 압델라흐만은 조카 물라이 하솀과 리프 총독 엘 하므라를 보내어 무력으로 압델카데르를 축출하려 했으나, 와디 아슬라프 전투에서 압델카데르는 4천의 병력으로 5만의 모로코 군을 격파하는 기적을 선사하며 승리하였다.

이때 리프 총독 엘 하므라가 전사하였고, 물라이 하솀은 겨우 목숨을 건져 도주했다 한다. (1847년 7월) 그해 12월, 압델라흐만의 두 아들 모하메드와 솔리만이 재차 5만 대군을 이끌고 출정했으나 이번에는 2천에 불과했던 압델카데르는 또다시 승리하였다. 이로써 모로코 내부에서 알라위 왕조를 폐하고 압델카데르를 술탄으로 추대하려는 움직임까지 일었으나, 한계에 봉착했다 여긴 압델카데르는 모로코를 떠나 알제리로 돌아가며 프랑스와의 협상에 나섰다. 며칠 간의 협상 끝에 1847년 12월 23일, 압델카데르는 알렉산드리아 혹은 아크레로 망명한다는 조건으로 프랑스 장군 루이 주슈 드 라모르시에에 항복하였다. 이틀 후 그의 항복은 프랑스령 알제리의 총독 앙리 드 오를레앙에 의해 공표되었다.[1]

2.2. 프랑스 유배 생활 (1847-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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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8-52년 압델카데르와 그 일행이 머문 루아르 강변 앙부아즈 성. 인근에 압델카데르의 동상도 있다.

하지만 프랑스 당국은 약속을 깨고 압델카데르를 체포하여 프랑스로 압송하였고, 그의 일가는 (나폴레옹의 초창기 부관 주베르 장군이 묻힌) 툴룽의 라 마그 요새와 포 (프랑스 남서부, 피레네 산맥 기슭의 도시)를 거쳐 1848년 11월 앙부아즈 성에 유폐되었다. 성의 눅눅한 환경은 에미르 일가의 건강 악화를 초래하였고, 이에 대해 프랑스 내에서도 논란이 일었다. 대문호 빅토르 위고와 에밀 드 지라르댕 등이 상황 규명을 요구했고, 미래의 총리 에밀 올리비에는 대중의 경각심을 일깨워 여론의 관심을 이끌어내었다.

영국의 정치인 런던데리 후작 조지 베인템페스트 역시 당시 프랑스 대통령이던 루이 나폴레옹 (미래의 나폴레옹 3세)에게 후자가 영국 망명 당시에 쌓은 친분을 바탕으로 (구 부르봉 왕가에 의해 부당 대우를 받은) 압델카데르의 석방을 청하였다. 1848년의 혁명으로 집권하여 구 체제에서 거리를 두고 싶었던 루이 나폴레옹은 혁신의 일환으로 그에 동의하였고, 따라서 1852년 10월 16일 압델카데르는 다시는 알제리에 개입하지 않는다는 조건 하에 10만 프랑의 연금과 함께 석방되었다.

2.3. 시리아에서의 말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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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리아 시절의 압델카데르. 우측은 하얀 외투를 벗은 평상복 차림이다.

5년만에 자유를 되찾은 압델카데르는 오스만 제국으로 향하여 부르사에 머물다가 1855년 다마스쿠스의 아마라 구역 (구도심 북서부)으로 이주하였다. 다마스쿠스에서 그는 신학과 철학 탐구에 몰두하였고, 그가 쓴 철학 저술들은 불어로 번역되어 (이미 명사로 유명해진) 프랑스에서 출판되었다.[2] 그외에 아랍 종마에 대한 책도 저술했다 한다. 시리아에 머무는 동안 압델카데르는 프리메이슨에 가입, 프랑스의 프리메이슨 본부인 그랑 오리엔트 관할의 피라미드 롯지에서 적극적으로 활동하며 프랑스의 지성인들과 교류했다고 한다. 또한 유럽 사교계를 주름잡다 시리아에 정착한 제인 딕비[3]와 영국의 탐험가 리처드 버튼 등과 친분을 쌓았다. 압델카데르의 수피 신학에 대한 조예와 뛰어난 언어 능력은 서구 학자들에 있어 매력적이었고, ‘젠틀맨이자 술탄’으로 평가받았다.

2.3.1. 기독교도들을 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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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도 주민들을 구하는 압델카데르 기록화

19세기 중반 레바논 토후국이 멸망한 후 드루즈 인들과 마론파 기독교도들은 주도권을 두고 다투었고, 1860년 들어 이는 내전으로 번졌다. 두 집단 간의 유혈 충돌은 인근 다마스쿠스에도 퍼져 그해 7월, 현지 드루즈 교도들이 기독교 구역을 공격해 3천여명을 학살하였다. 일전에 프랑스 공관과 다마스쿠스 시의회에 폭력 사태가 임박했다고 경고했던 압델카데르는 유럽 공사들 및 수도사 등 기독교도들을 자신의 집에 숨겨주며 보호하였다. 또한 아들들을 포함한 40여 알제리 인들을 거리로 보내어 위험에 처한 기독교도들을 데려오게 하였고, 직접 말에 올라 구조에 나서기도 하였다.

2.3.2. '프랑스의 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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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마스쿠스에서 각국으로부터 받은 훈장들을 달고 찍은 사진
다마스쿠스에 이어 압델카데르는 베이루트로 향하여 파견된 프랑스 군과 현지 당국을 조율하였다. 이에 대한 감사와 존중의 뜻으로 프랑스 정부는 그에 지급하는 연금을 15만 프랑으로 인상하였고,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수여하였다. 동시에 그리스에서 구세주 대십자가 훈장, 오스만 제국에서 1급 메지디예 훈장[4], 바티칸에서 비오 9세 대십자 훈장을 받아 유럽 각지에서 기사 작위를 얻었고 당대의 미국 대통령 에이브러햄 링컨과 영국에게서도 각각 고급 권총과 샷건을 선물받았다. 1865년 압델카데르는 나폴레옹 3세의 초청으로 파리를 방문하여 국빈 급의 의전과 환영을 받았다. 프랑스 인들은 19세기 전반 국가의 적이었던 자가 당대에 들어 기독교도들의 보호를 통해 ‘프랑스의 친구’가 되어 돌아온 것에 놀라움과 관심을 보였다.

2.4. 죽음 및 사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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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5년, 압델카데르의 유해 봉환식

1871년 알제리에 남았던 그의 아들들 중 하나가 콩스탕틴 일대의 부족들을 모아 반프랑스 봉기를 일으켰다가 살해되는 아픔을 겪었다. 이후로 더욱 은둔하게 된 압델카데르는 1883년 5월 26일, 다마스쿠스에서 향년 75세로 사망하였다. 사후 그의 유해는 생전의 유언대로 다마스쿠스 북서쪽, 종교성이 짙은 앗-살리히예 구역의 (생전 그가 존경하던) 수피 성인 모히에딘 이븐 아라비의 영묘에 안장되었다. 사후에도 압델카데르는 알제리 인들에게 독립의 상징으로 남았고, 마침내 알제리가 독립한 후 1965년 그의 시신은 다마스쿠스에서 알제 동남쪽 외곽의 엘알리아 묘원으로 이장되었다. 이로써 압델카데르는 1847년 이후 약 한세기 만에 고국 땅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5]

3.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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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제리의 수도 알제의 대로 한복판에 위치한 압델카데르 기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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압델카데르의 사진을 들고 시위하는 알제리 인들

마그레브 4개국 중 이웃한 모로코, 튀니지에 비해 역사가 짧은 편이고 정체성이 확고하지 않은 알제리에 있어 압델카데르는 지역주의와 인종주의를 극복하고 국가를 통합할 수 있는 몇 안되는 구심점 중 하나이다. 따라서 그에 대한 존경과 기념은 (비슷한 상황인) 리비아의 오마르 모크타르 이상으로 큰 편이다. 현재도 압델카데르는 알제리에서 인기 있는 이름이다. 대표적으로 2019년 대통령 권한대행을 지낸 압델카데르 벤살라가 있다. 단순한 독립 운동가, 근대 국가 설립자, 국가 정체성의 상징이라는 면모를 제외하더라도 압델카데르는 그 인품에 있어서도 문화권을 가리지 않고 존경을 받는다. 개인적으로 경견하고 이슬람 신정주의를 지향하면서도 종교와 인종이 다른 사람들을 등용했던 것과 자국민에게 잔혹했던 적들이 포로가 되어도 인격적으로 대하던 모습은 '근대의 살라딘'이라는 별명이 잘 어울린다.

4.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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압델카데르의 궁전이었던 메데아의 다르 엘 에미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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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스카라의 압델카데르 모스크 (대사원)

근대에 반외세 투쟁을 벌이며 스스로 국가까지 세운, 몇 안되는 인물 중 하나이다. 비슷한 사례로는 마흐디 운동의 무함마드 아흐마드가 있다.

프랑스에 항복하며 ‘내 손으로 해낸 것을 하나님께서 가져가시니’ 라는 어록을 남겼다고도 하나, 출처가 불명확하다.

프랑스에서의 유배 동안 압델카데르는 자신의 일행 중 부인 중 하나, 동생 중 하나, 두 자녀를 포함한 25명이 사망하는 아픔을 겪었다.

압델카데르의 장군으로 활약했던 동생 에미르 무스타파는 석방 후 시리아 대신 모로코로 향하여 여생을 마쳤다. (1863년)

미국 아이오와 주에는 1846년 마을 창건 당시에 압델카데르의 독립 투쟁에 감명을 받아 지어진 엘카데르 마을이 있다. 인구는 약 1천 2백명.

링컨이 선물한 권총은 알제 국립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최초의 아랍 출신 프리메이슨 회원 중 하나이다.

외투로는 거의 항상 흰 옷만을 입었다 한다.


[1] 이때 압델카데르는 항복의 표식으로 자신의 애마를 내어주었다. [2] 1858년의 초판은 Rappel à l'intelligent, avis à l'indifférent (지성인에게 되새김을, 무관심한 자에게 알림을)이었고 1977년 Lettre aux Français (프랑스 인들에게 보내는 편지)로 재차 번역되었다 [3] 트라팔가르 해전의 함장 중 하나였던 헨리 버튼의 딸로, 무려 8개국어를 구사했다 한다. 독일, 그리스 등 여러 국가의 유력자들과 염문을 뿌리다 시리아로 이주하여 1853년 현지 부족장 셰이크 메줄 엘메스렙과 결혼하고 1881년 74세의 나이로 죽을 때까지 정착하였다. 그녀의 동생의 증손녀가 바로 20세기 중반 서구권의 사교계의 유명 인사 파멜라 해리먼이다 [4] 술탄 압뒬메지트가 1851년 크림전쟁에 원군으로 참전한 영국과 프랑스 군대를 기리기 위해 제정한 중동 최초의 서구식 훈장 [5] 다만 그의 이장 문제는 알제리 내에서도 논란이 꽤 있었다. 압델카데르는 수피 대선배인 이븐 아라비와 함께 묻히기를 유언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알제리 정부는 상대적으로 주체적인 역사가 부족한 알제리의 정체성 확보를 위해 이장을 강행하였다. 현재 기준, 시리아 내전 등의 정세로 볼 때에 이장은 국제 사회에 있어 압델카데르의 참배를 용이하게 한 결정이 되었다. 한편 압델카데르가 중년에 친구로 사귄 불과 1살 차이의 동년배 명사 제인 딕비는 그보다 2년 앞선 1881년에 사망하였고, 지금까지도 다마스쿠스에 잠들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