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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colcolor=#f3e989> 나치 독일 14대 경제부 장관
나치 독일 11대 식량 농업부 장관 독일 국가인민당 당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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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프레트 후겐베르크
Alfred Hugenberg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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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알프레트 에른스트 크리스티안 알렉산데르 후겐베르크 Alfred Ernst Christian Alexander Hugenberg |
출생 | 1865년 6월 19일 |
독일 제국 하노버 왕국 하노버 | |
사망 | 1951년 3월 12일 (향년 85세) |
서독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 퀴겐브루흐 | |
정당 |
독일 조국당 (1917년 ~ 1918년) (1918년 ~ 1933년) |
국적 | 독일국 → 서독 |
배우자 | 게르트루트 아디키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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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독일의 정치인이자 사업가로 바이마르 공화국시기 독일 정치를 주도했던 인물로 독일 국가 인민당의 당수로 아돌프 히틀러가 정권을 잡는데 결정적 역할을 한다. 이는 아돌프 히틀러를 조종하려는 후겐베르크의 술수였다. 그러나 이는 실패로 돌아가고 수권법이 통과된 후 히틀러가 속해있던 독일 국가인민당도 해산되어 나치 독일 하의 의회에서 객원 의원으로 활동했다.2. 생애
2.1. 젊은 시절
알프레트 후겐베르크는 1865년 6월 19일 하노버 왕실의 관리인이자 프로이센 주 국회의원이었던 칼 후겐베르크와 에르네스테 아다키스의 아들로 태어난다. 알프레트 후겐베르크의 아버지인 칼 후겐베르크는 프로이센 주 국회의원이라서 아들에게 관료가 되라고 강권했다.[1] 그래서 그는 괴팅겐 대학, 하이델베르크 대학, 베를린 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했고 당시 독일 땅이었던 스트라스부르 대학에서 경제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후겐베르크는 자신의 논문 독일 북서부의 내부 식민지화(über das Thema Innere Colonisation im Nordwesten Deutschlands)에서 그는 독일인의 농촌 정착을 장려했으며 당시 중공업의 발달로 노조가 조직화되고 좌파 및 사회주의 세력이 강성해지는 걸 두려워 했다. 그래서 사회주의 세력을 막기위해 황무지를 개간해 독일의 농업을 발전시키고 독일 농부들의 성공을 위해 제국주의 정책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1898년 국가 시험(Staatsexamen)에 합격한 후겐베르크는 베젤의 부지역행정관을 역임했고 다음 해 포젠 정착 위원회[2]의 주요 직책을 맡게 되었다. 그는 폴란드 인구의 전멸을 촉구해 프로이센 정부의 독일화 정책을 비판해, 지금보다 더 빠른 속도로 독일화를 해야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는 상부의 반발을 샀고 그는 실업가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리하르트 머튼이 이끄는 메탈게젤샤프트사에 합류한 후겐베르크는 프랑크푸르트 암 마인 광업은행 지배인으로 취임하였고 이어서 1909년엔 크루프 사의 중역으로 초빙되어 은행업무와 철강계통의 업무를 담당하며 1918년까지 재무, 경리이사장을 지냈다.
크루프 사에 근무하는 동안 후겐베르크는 노동조합과 사회민주당과 끊임없이 싸웠고 어용 노조를 설립해 노동자들이 서로 싸우게 만들었다. 그는 빈곤 문제는 유전적 문제로 가난한 사람은 나쁜 유전자를 물려받아 인생이 실패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후겐베르크는 복지는 필요하지만 이는 노동자들이 사회적, 정치적 요구를 중단 할 정도로 해야한다고 주장했다.
당시 크루프 사는 유럽 최대 기업이자 세계 최대 기업 중 하나였으며, 후겐베르크는 1908년 8%에서 1913년 14%로 연간 배당금을 높이는 데 성공하여 독일 비즈니스 세계에서 많은 찬사를 받았다. 그로 인해 독일 황제 빌헬름 2세는 독일에는 후겐베르크와 같은 사업가가 더 필요하다고 말하면서 크루프 사의 성공에 대해 찬사를 하면서 후겐베르크에게 적수리 훈장을 수여했다. 1912년 선거 에서 사회민주당이 독일 의회 에서 가장 많은 의석을 차지한 후, 후겐베르크는 처음으로 언론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는 중도우파와 우익 정당이 자신들의 견해를 옹호하려면 더 많은 신문이 필요하다고 믿게 되었다.
2.2. 제1차 세계대전
1914년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범독일연맹 의장인 하인리히 클래스, 독일의 여러 사업가와 산업가 연맹, 농민 연맹 대표와 함께 전쟁을 지지했으며 독일이 유럽, 아프리카, 아시아를 합병해 세계 최고의 국가로 거듭나길 원했다. 후겐베르크와 클래스는 독일이 벨기에와 북부 프랑스를 합병하고 영국의 해군력을 종식시키고 러시아를 "표트르 대제 시대의 국경"으로 축소하고 독일은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에 있는 모든 영국, 프랑스, 벨기에 식민지를 합병하고 독일, 프랑스, 오스트리아-헝가리 , 이탈리아, 스칸디나비아 국가, 발칸 국가를 포함하는 "경제 연합"을 구성해야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는 당시 총리였던 테오발트 폰 베트만홀베크의 반대에 부딪혔으며 빌헬름 2세 보고 그를 해임해야 한다고 루르 연합 상공회의소 이름으로 요구했다.테오발트 폰 베트만홀베크 총리를 해임시키기 위해 후겐베르크는 미디어를 이용하기로 한다. 이미 전쟁 시작 전 4개 정도의 소규모 신문사를 인수한 후겐베르크는 전쟁이 격화되던 1916년 독일 각지의 신문사를 인수하기 시작했다. 그 후 몇 년 동안 후겐베르크는 출판사, 뉴스 서비스, 광고 대행사, 통신 서비스, 영화 회사 및 수많은 신문 회사로 구성된 미디어 대기업을 만들었다. 후겐베르크는 1920년대에 1,600개의 독일 신문을 소유했고 후겐베르크의 미디어 그룹은 500명이 넘는 정규 직원과 90명의 편집자를 포함하여 2,000명의 직원을 고용하여 뉴스를 선택하고 작성하고 논평하는 작업을 수행했다.
2.3. 바이마르 공화국 시기
제 1차 세계대전이 독일의 패전으로 끝나자 후겐베르크는 이를 믿지 않았다. 후겐베르크는 배후중상설을 믿었고 그는 11월 혁명을 일으킨 반역자를 처단해야 한다고 생각했다.[3] 그래서 그는 정계에 투신하기로 결정하고 1919년 1월 1일 크루프 사를 그만두고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해 당선되었다. 후겐베르크는 자신이 웅변과 연설 능력이 부족하다는 것을 알아 대중 앞에 거의 나서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이 소유한 언론사와 자신이 소유한 재산을 이용해 정치를 했다. 먼저 후겐베르크는 자신이 반역자라 생각한 휴전 협정을 체결한 마티아스 에르츠베르거를 위시한 사회민주당 정치인들을 매국노로 몰았고 프랑스가 루르 지역을 점령하자 이를 격렬하게 비난했다. 히틀러가 뮌헨 폭동을 일으키자 후겐베르크가 소유한 언론사는 히틀러를 애국자로 묘사했고 그를 칭송했다. 이는 당시 무명에 가까웠던 히틀러가 일약 스타덤에 오르게 만들었다. 당시 나치는 독일 전역에서 발행되던 신문은 하나도 없었는데 후겐베르크가 소유하던 영화사에서 우파 뉴스릴을 통해 나치당 소식을 알렸으며, 또한 후겐베르크가 소유하던 쉐를 출판사 산하의 모든 신문들이 나치의 활동을 지지하였다.1928년 독일 총선에서 독일 국가인민당이 패배하자 쿠노 폰 베스타르프 백작을 설득하여 당수를 포기하게 만든 뒤 자신이 국가인민당 당수 자리에 올랐다. 1928년 10월 20일 후겐베르크는 취임 연설에서 바이마르 공화국에 협력하지 말고 당내와 정치적 방향 모두 민주주의를 벗어나자고 주장했다.“민주적 형식과 공허한 문구에 숨이 막히는 것은 당도 마찬가지고 국민도 마찬가지다. 독일 국민들이 힘을 모아 이 모든 쓰레기를 털어낼 날이 올 것입니다. 하지만 먼저 우리는 정당으로서 오늘날의 시스템이 우리에게 던지고 있는 모든 쓰레기를 털어내야 합니다. 우리는 이러한 위원회, 위원회 시스템, 그리고 연설과 반론에 우리의 모든 에너지를 소비하는 것에서 벗어나야 합니다.”고 주장한 후겐베르크는 바이마르 공화국을 전복하고 권위주의 정부를 수립하기를 원했다.
그래서 후겐베르크는 헤르만 뮐러 내각을 무너트리기 위해 바이마르 헌법을 이용하기로 한다. 바이마르 헌법에서는 충분한 수의 사람이 청원서에 서명하면 국민투표를 실시할 수 있다는 조항을 이용해 헤르만 뮐러 총리가 추진하던 영 플랜[4] 에 대한 국민투표 서명 운동을 주도했다. 후겐베르크와 후겐베르크 소유의 신문들은 영 플랜이 "우리 아이들의 아이들"을 위한 "재정적 노예 제도"의 한 형태로 묘사 했고 이는 독일의 생활 수준을 "아시아적" 빈곤 수준으로 떨어뜨릴 것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는 실패로 돌아갔다. 왜냐하면 독일 국가인민당의 주요 지지층인 기업인들은 경제적 안정을 약속하는 영 플랜을 오히려 선호했기 때문이다.
1929년 발생한 대공황이 독일을 직격하자 나치당의 인기는 급속도로 올라갔다. 그러자 후겐베르크는 나치당과 협력하기로 결정한다. 대공황으로 인해 헤르만 뮐러내각이 무너지고 하인리히 브뤼닝 내각이 파울 폰 힌덴부르크 대통령의 긴급권에 의해 내각을 구성한 상태였다. 우익들은 브뤼닝 내각을 무너트리기 위해 독일 하르츠부르크에 모여 하르츠부르크 전선을 결성한다. 1931년 10월 16일 의회에서 발의된 브뤼닝 총리에 대한 불신임 동의안이 실패로 끝나자 후겐베르크와 히틀러는 향후 노선을 두고 충돌했고 1932년 독일 대통령 선거에서 누구를 지지하냐를 두고 다투기 시작했다. 그래서 각 정당은 후보를 각각 내었고 당시 독일 국가인민당 대통령 후보였던 테어도어 뒤스터베르크가 유대인 혈통을 가지고 있다고 의혹을 제기한 뒤 그들의 사이는 멀어졌다.[5] 하지만 독일 국가인민당 지지층이 히틀러의 나치당을 지지하기 시작하자 후겐베르크는 나치당과 연합하기를 원했다. 하지만 히틀러는 거부했고 1932년 4월 24일 프로이센 주 선거에서 독일 국가인민당은 저번 선거에 비해 득표율이 56% 감소하게 되었다. 그러자 후겐베르크는 독일 인민당과 함께 프란츠 폰 파펜내각에 합류하기로 결정한다. 하지만 파펜 총리는 인기가 없었기 때문에 1932년 7월 31일 독일 총선에서 독일 국가인민당은 36석을 얻었고 득표율은 고작 5.9%었다.[6] 그러자 후겐베르크는 파펜 내각을 불신임하는데 동참을 했고, 파펜 내각은 무너졌다. 파펜 내각이 무너지자 당시 총선이 열렸고 국가인민당은 전 선거에 비해 득표율이 2.4% 올라 총 51석을 얻었지만 196석을 차지한 나치당에 비해 의석수가 모자랐다. 결국 후겐베르크를 위시한 보수파는 히틀러를 끌어들여 대보수연합정부를 구성하려고 계속 시도하지만, 총리자리를 요구하는 히틀러와 히틀러의 총리 부임을 반대하는 대통령의 의견 대립으로 인해 지연되었다. 그래서 힌덴부르크 대통령은 고육지책으로 쿠르트 폰 슐라이허를 총리로 임명하지만 파펜과 마이스너, 대통령의 아들 오스카 폰 힌덴부르크 등이 히틀러를 총리로 임명해야 한다고 설득해 결국 힌덴부르크 대통령은 자신의 뜻을 꺾고 히틀러를 총리에 임명했다.
경제부 장관 겸 식량 농업부 장관으로 히틀러 내각에 합류한 후겐베르크는 자신을 경제 대통령으로 생각했지만 하지만 그에게 권력은 전혀 없었다. 이미 히틀러는 독일 경찰과 군을 꽉잡고 있었고 그를 자신의 꼭두각시로 이용하려던 후겐베르크의 계획은 이미 틀어졌다. 무임소장관 및 신설될 항공교통장관, 프로이센 내무장관 자리에 나치당의 핵심 인사인 헤르만 괴링이 차지했고 국방장관은 친 나치 성향의 군인 베르너 폰 블롬베르크가 임명되었기 때문이다. 헤르만 괴링은 장관에 취임하자 마자 프로이센 경찰에 나치당 돌격대 단원들을 임명해, 프로이센 경찰을 자신의 수족으로 만들어 버렸다. 연방경찰이 없는 바이마르 공화국에서는 당시 프로이센 주가 나라의 60%를 차지했으니, 이는 국가 경찰력이 통째로 나치에 넘어간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히틀러를 조종하겠다고 하니 제대로 될 리가 없었다.
1933년 2월 17일 독일 국회의사당 방화사건이 벌어지고 정국은 공안 정국으로 변한다. 공산주의자가 국회의사당에 불을 질렀다는 히틀러의 주장에 동조한 후겐베르크는 공산주의자에 대한 가혹한 조치와 볼셰비즘이 번성 할 수 있는 온상을 근절해야 한다고 말했다. 후겐베르크는 독일 국회의사당 방화사건이 일어난 후 2월 28일 독일 시민의 자유를 상당수 무효화 하는 '국민과 국가를 수호하는' 포고령을 제안하며 긴급령을 전국으로 확대해야 한다고 주장한 히틀러의 주장에 동조했다. 그리고 그런 삼엄한 분위기 속에서 실시된 총선에서 나치당은 288석을 얻는 등 대승을 거두었지만 독일 국가인민당은 저번 선거와 비슷한 52석 밖에 얻지 못했다. 결국 자신이 이끄는 독일 국가인민당이 히틀러가 이끄는 나치당보다 못하는 걸 인정하고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고 자신이 이끄는 독일 국가인민당의 영향력을 보장받기 위해 히틀러가 추진하던 수권법에 동의하게 된다.
2.4. 말년
하지만 그건 후겐베르크의 망상에 불과했고 수권법이 발효되자 마자 그가 이끄는 독일 국가인민당은 해산되었다. 그 대신 식량 농업부 장관 자리를 보장받았지만 그의 영향력은 점차 감소되었다. 결국 1933년 6월 29일 장관 자리를 사임했고 후겐베르크가 소유한 통신사 Telegraph Union을 강제로 매각당하고 그가 소유한 언론사도 나치당의 소유가 되었다. 그렇게 후겐베르크는 리페의 롭브라켄에 있는 자신의 사유지에서 조용히 살다가 독일이 제2차 세계 대전에서 패배하자 전범으로 분류되어 약 5년 간 영국 수용소에 수용되었다. 하지만 그는 이미 80대의 노령의 나이라 정치적 활동을 기대할 수 없다고 판단한 영국 당국에 의해 무죄 판결을 받고 1951년 자신의 가족 소유지인 퀴겐브루흐에서 조용히 살다가 사망했다.
[1]
하지만 그는 시인이 되고 싶어했고 이로인해 아버지와 다툼이 많았다.
[2]
서프로이센과
포젠의 대부분을 자치하는 폴란드인을 대신해 독일인을 재정착시키는 기관
[3]
후겐베르크는
30년 전쟁후 프로이센이 부상했고, 1806년 나폴레옹이 프로이센을 대패시킨 후 1813년
라이프치히 전투에서 이긴 것처럼 독일이 다시 패배의 치욕을 씻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4]
1929년에 작성되어 1930년에 실행된, 제1차 세계 대전 패전국인 독일의 배상 부채를 조정하기 위한 계획이다. 미국의 영(O. D. Young)을 위원장으로 하는 위원회에서 발표되었다. 배상 총액은 358억 금태환마르크로 경감되고, 59년 동안의 연부 지불이 결정되었다.
[5]
괴벨스는 독일 국가인민당을 자신의 일기에“독일 국가인민당은 모든 반동세력의 조직이며 지금도 그렇다. 우리는 그들과 싸워야 한다.”고 적었다.
[6]
나치당은 37% 득표율에 230석을 차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