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2-12-29 01:08:29

아민타스 3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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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케도니아 국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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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 마케도니아 아르게아스 왕조 19, 21대 국왕
아민타스 3세
Αμύντας|Amyntas
파일:아민타스 3세.jpg
아민타스
Αμύντας
출생 미상
미상
사망 기원전 370년
마케도니아
재위 기간
마케도니아
바실레우스
기원전 393년/기원전 392년 ~ 기원전 370년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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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마케도니아 왕국 아르게아스 왕조의 19, 21대 왕. 아르켈라오스 1세 암살 후 혼란스럽던 정국을 수습하고 경쟁자로 떠오르던 올린토스를 제압했다.

2. 생애

로마 역사가 유스티누스에 따르면, 알렉산드로스 1세의 동생 메넬라오스의 아들이라고 한다. 또 다른 기록에 따르면, 그는 페르디카스 2세의 형제 아르히다이오스의 아들이며, 알렉산드로스 1세의 손자라고 한다. 기원전 399년 아르켈라오스 1세가 암살된 이래, 마케도니아는 왕위를 둘러싼 분쟁으로 혼란에 빠졌다. 플라톤의 기록에 따르면, 크라테로스가 아르켈라오스 1세를 살해한 뒤 왕위를 쟁취했지만 3, 4일 후에 살해되었고 아르켈라오스 1세의 어린 아들 오레스테스가 왕위에 올랐지만, 섭정을 맡던 아에로포스 2세에게 피살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에우세비우스의 기록에는 오레스테스가 전혀 언급되지 않아서, 아르켈라오스 1세 사망 후 그가 언제 왕위에 올랐는지는 불명확하다.

아에로포스 2세는 기원전 394년 질병에 걸려 사망했다. 투키디데스에 따르면, 아에로포스 2세 사후 페르디카스 2세의 동생 필리포스의 아들 아민타스 2세가 왕위를 쟁취했다가 데르다스라는 귀속에게 살해된 뒤 페르디카스 2세의 아들 파우사니아스가 왕위에 올랐다고 한다. 반면 에우세비우스에 따르면, 아르켈라오스 2세가 아에로포스 2세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으나 1년만에 사냥 도중 피살되었고, 파우사니아스가 왕위를 쟁취했다고 한다. 아민타스 3세는 파우사니아스를 축출한 뒤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기원전 393년 바르딜리스 1세가 이끄는 일리리아군이 대대적으로 쳐들어오면서 위기를 맞이했다. 디오도로스 시켈로스에 따르면, 일리리아인들은 마케도니아를 점령하고 아민타스 3세를 축출한 뒤 꼭두각시로 삼고자 아르가이오스 2세를 왕위에 앉혔다고 한다. 아민타스 3세는 올린토스로 피신한 뒤 그들에게 마케도니아 동부의 영토인 미그도니아 또는 안트만트를 50년간 양도하고 중요한 무역 특권을 줄 테니 자신을 도와달라고 청해 동의를 얻어냈다. 기원전 392년, 아민타스 3세는 테살리아와 스파르타의 도움으로 마케도니아를 탈환했다. 이렇게 해서 왕위를 겨우 되찾을 수 있었지만, 당시 상황은 마케도니아에게 매우 불리했다. 동쪽에는 할키다키 연합, 서쪽으로는 일리리아인, 북쪽으로는 트라키아인이 마케도니아와 적대 관계였고, 오직 남쪽의 테살리아 만이 마케도니아와 우호적인 관계를 맺었다. 크세노폰에 따르면, 할키디키 연맹은 마케도니아의 수도 펠라를 포함해 사실상 마케도니아 전역을 점령했고, 아민타스 3세의 영역은 아이기오스 주변의 피에리아 일대로 좁혀졌다고 한다.

아민타스 3세는 이 위급한 상황을 만회하고자 스파르타에 구원을 요청했다. 스파르타 역시 올린토스가 이끄는 할키디키 연맹 중 자신들에게 적대적인 도시 국가가 몇 개 있었기에 그들이 너무 강해지는 걸 원치 않았다. 또한 소아시아로 가는 육로를 확보하려면 마케도니아가 적당한 선에서 세력을 유지하면서 북쪽과 서쪽의 야만인 부족을 막아줘야 한다고 여겼다. 한편 디오도로스 시켈로스에 따르면, 아민타스 3세는 올린토스에게 양도한 땅을 반환해달라고 요청했지만 거절당하자 스파르타와 동맹을 맺고 올린토스를 합동 공격했다고 한다. 기원전 382년 봄, 스파르타 사령관 에우다마네스가 이끄는 마케도니아-스파르타 연합군 전위부대가 할키디키 반도에 도착하여 포티데아를 점령했고, 아게실라오스 2세의 동생 텔레우티아스가 이끄는 스파르타 주요 부대가 테베를 통해 육로로 마케도니아에 들어간 뒤 올린토스를 포위했다.

기원전 381년 텔레우티아스가 포위전 도중 성벽에 무리하게 접근했다가 적의 역습으로 전사하고 군대가 큰 피해를 입자, 국왕 아게시폴리스 1세가 잔여 병력을 수습하여 전투를 이어갔다. 그러나 그마저 기원전 380년 병에 걸려 사망했다. 뒤이어 폴리비아데스가 군대를 이끌었고, 스파르타군은 올린토스를 완전히 포위한 뒤 수개월간 공세를 벌였다. 결국 기원전 379년, 올린토스는 항복했고 할키디키 연합은 해산되었다. 아민타스 3세는 올린토스에게 양도한 영토를 포함한 모든 소유물을 돌려받을 수 있었다.

그런데 스파르타가 지휘관 2명을 잇따라 잃어가면서까지 최선을 다해 도와줬는데도, 아민타스 3세는 스파르타의 적수인 아테네와 우호적인 관계를 맺었다. 이는 아테네가 마케도니아로부터 목재를 공급받아 함대를 건설하길 희망한 데서 비롯되었다. 기원전 375년 또는 373년, 양 국가 사이에 동맹이 체결되었다. 그는 아테네가 집착하는 암피폴리스에 대한 그들의 소유권을 인정했고, 아테네 장군 이피크라테스를 아들로 입양했다. 또한 할키디키 연합이 재결성되어 마케도니아와 50년간 상호 원조와 경제 협력을 하기로 했다. 기원전 370년대, 아민타스 3세는 페레아의 이아손과 동맹을 맺고 자신의 지위를 강화했으며, 테살리아 소국가들의 맹주로 선출되기도 했다.

그는 기원전 390년경 린케스티다 왕 시라스의 딸 에우리디케와 결혼하여 기원전 388년 이전에 장남 알렉산드로스 2세를 낳았으며, 뒤이어 페르디카스 3세, 필리포스 2세, 딸 에우리노이아를 낳았다. 디오도로스 시켈로스에 따르면, 필리포스 2세는 거듭된 침략을 일삼는 일리리아인들을 달래고자 하는 아버지의 뜻에 따라 일리리아에 인질로 보내졌다가 나중에 테베로 이송되어 어린 시절을 그곳에서 보냈다고 한다. 로마 역사가 유스티누스에 따르면, 그는 두번째 아내 기게이아(Gigeia)를 맞이하여 세 아들 아르켈리오스, 아르히데오스, 메넬라오스를 낳았는데, 이들 모두 나중에 필리포스 2세에게 숙청되었다고 한다. 일부 학자들은 기게이아가 아르켈라오스 1세의 딸이라고 주장했지만 확실하지 않다.

에우리디케와 기게이아 중 누가 첫번째 아내였는지는 사실 확실하지 않다. 마케도니아는 일부다처제 사회였기 때문에, 아민타스 3세가 두번째 결혼을 하기 전에 첫번째 부인과 이혼했거나 사별했다고 보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서 두 개의 이야기가 전한다. 하나는 아민타스 3세가 왕이 되기 전에 기게이아의 아들들이 태어났다는 것이며, 두번째는 에우리디케의 아들들이 기게이아의 아들들보다 나이가 많다는 것이다. 유스티누스에 따르면, 에우리디케는 아울로스의 프톨레마이오스와 간통했고, 이 사실이 발각될 걸 두려워하여 남편을 살해하려 했다고 한다. 이 음모는 곧 발각되었지만, 아민타스 3세는 자식들을 고려해 그녀를 처벌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기원전 370년 사망했고, 알렉산드로스 2세가 왕위에 올랐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아버지 니코마코스가 아민타스 3세의 궁정에서 의사로 일했다고 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인연으로 마케도니아 왕실과 밀접한 관계를 맺었고, 훗날 알렉산드로스 3세의 가정교사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