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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초자치단체 | 합천군 | ||
행정표준코드 | 5480045 | ||
관할 법정리 | 13리 | ||
하위 행정구역 | 18행정리 25반 | ||
면적 | 23.03㎢ | ||
인구 | 1,207명[1] | ||
인구밀도 | 53.23명/㎢ | ||
정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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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경상남도 합천군의 면, 율곡면, 초계면, 청덕면, 덕곡면, 고령군 쌍림면과 접하고 있다.본 면에는 합천박물관과 옥전 고분군이 있어 당시 대가야문화를 볼 수 있다.
2. 설화 및 지명유래
2.1. 상신리
2.1.1. 박곡마을
- 원촌 : 고을원님이 이 곳을 지나다가 쉰 자리라 하여 원촌이라 불렀으며, 현재까지 정월대보름날 동제를 지내고 있다.
- 박실 : 지금으로부터 500여년 전 박씨들이 못(현재 박곡지)을 경계로 안골, 지풍골, 시지골 등에 살았다하여 못안박실이라 불렀으며, 그 후손은 현재 거주하지 않지만 성묘는 고령에 있는 후손이 하고 있다고 한다. 경남과 경북의 경계로서 도계를 통과하려면 기미제를 통과하는데 3곳의 돌무덤이 있어 통행하는 사람은 반드시 3개의 돌을 던져서 안녕을 빌었다고 하며, 1그루의 느티나무가 있어 여름에 주민들의 피서지로 이용되고 있으며, 식수년도는 170년 전으로 추정된다.
2.1.2. 도방마을
지방도 907호선과 인접하고 있어 대구 등과의 교통이 원활하다. 마을이 생긴 년대는 합천이씨는 550년전에 시거하였다 하고, 탐진안씨는 청덕에서 이주하였다 하며 진양강씨는 195년전에 시거하였다고 한다. 이책초등학교가 생기기전에 이책간이학교를 설립하여 후학들을 지도하였으며 설립자인 이천봉씨의 뜻을 기리기 위하여 매년 제자들이 계모임을 가지고 있다. 농지개량조합에서 상신저수지를 건립하기 이전에는 절골이라는곳에 자연마을이 있었으나 저수지 신설로 인하여 본부락으로 이주하였으며 아무리 가뭄이 계속되더라도 한해 걱정이 없는 마을이다. 대구에 있는 낚시꾼들은 조갑지 못이라하여 휴일에 많은 낚시꾼들이 찾아 오고 있다. 마을어귀 망두굴에는 170년 전에 심어진 정자나무 1그루가 있는데 이것은 본래 2그루가 1그루로 합쳐진 나무라고 하며, 가망두에는 250년 전에 심은 것으로 추정되는 정자나무가 10그루정도 서 있어 여름에는 주민들의 피서지로 각광을 받고 있다
- 도방 : 조선시대에는 초계군의 이책면으로서 적중면의 중방, 말방과 함께 지어진 마을로, 지금은 폐교되었지만 이책초등학교가 생기기 전에 이책간이학교를 설립하여 후학들을 지도하였으며 설립자인 이천봉씨의 뜻을 기리기 위하여 매년 제자들이 계모임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 중마 : 농지개량조합(현.한국농촌공사)에서 상신저수지를 건립하기 이전에는 절골이라는 곳에 자연마을이 있었으나 저수지 신설로 인하여 본 마을로 이주하였으며, 대구에 있는 낚시꾼들은 상신저수지에 휴일을 이용하여 많이 방문하고 있다
2.1.3. 창동마을
주소득원은 미곡위주이며 얼마전까지만 해도 왕골 생산을 통한 돗자리와 엽연초 생산도 증가되고 있으며 엽연초 건조장 시설이 완료 되어있다.
각산(角山)은 마을 뒤편에 있는 산으로서 중국(中國) 이여송이 입국하여 산세(山勢)를 보고 이하(以下)는 인재(人才)가 생(生)한다는 설을 알고 산맥(山脈)을 끊었다고 한다. 상신리 170번지에 고분(古墳) 2基가 있었는데 왜정시(倭政時) 일인(日人)이 발굴(發堀)하여 갔다고 한다.- 동제 : 음력 정월대보름에 마을전체주민이 지내고 있으며 유사가 마을 어귀 등에 황토를 놓아 마을의 안녕을 빌고 있음.
- 독실 : 정확한 마을명의 유래는 알 수 없으나 마을사람들이 많이 살았던 중심지와는 떨어져서 민가가 형성되었다 하여 독실이라 불려졌다고 한다.
- 정촌 : 마을회관 옆 정자나무가 있는 마을이라 하여 정촌이라 불렀다.
- 괴촌(槐村) : 예전에 홰나무(회화나무)가 많이 자생한 곳이라 하여 괴촌이라 불렀다
2.2. 하신리
2.2.1. 월곡마을
- 마을을 에워싸고 있는 동네 까치제의 모양이 마치 반달같이 생겼다고 하여 월곡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반달이 처음 커져서 완전한 달이 되는 것처럼 인물이 나게되고 생활도 차츰 잘 살게 된다는 뜻이 있으며 지금으로부터 510년전부터 정착하여 살고 있는 마을이며 하신리에 속한다.
- 엄방산 : 월곡에서 사양으로 가는 쪽에 있으며, 월곡에서 보아 돌이 많이 보이면 마을에 불이 많이 나므로 이를 방지하기 위하여 참나무를 가식하여 돌을 가리고 있음.
- 소원바위 : 이 바위는 중산 마을 뒤 도랑가에 있는데 아낙네들이 자기아이가 아플 때 쾌유를 이 바위에 가서 빌었고, 또 자식을 낳게해 달라고 빌며 생일날에는 명을 빌었다 한다. 음력 10월 15일 정월 대보름에는 연례행사처럼 이 바위에서 소원성취를 빌고 빌어서 마음의 안정을 갖게 한다고 하며 지금도 변함없이 바위주변을 항상 깨끗이 청소하고 바위를 잘 보존하고 있다
- 동제 : 1991년 까지는 음력 정월 대보름에 제관 2명을 뽑아 동제를 모셨으나 1992년 부터는 주민 전원이 참석하여 동제를 모시고 있으며, 황토를 마을 어귀 등에 뿌려 마을의 안녕을 빌고 있다.
- 월곡 : 마을을 에워싸고 있는 동네 까치제의 모양이 마치 반달같이 생겼다고 하여 월곡이라 부르게 되었으며, 반달이 처음 커져서 완전한 달이 되는 것처럼 인물이 나게 되고 생활도 차츰 잘 살게 된다는 뜻이 있다.
- 중산(중매) : 중산 마을 뒤 소원바위라는 바위가 있는데 아낙네들이 자기아이가 아플 때 쾌유를 이 바위에 가서 빌었고, 또 자식을 낳게 해 달라고 빌며 생일날에는 명을 빌었다고 한다. 또한 음력 10월 15일 정월대보름에는 연례행사처럼 이 바위에서 소원성취를 빌고 빌어서 마음의 안정을 갖게 한다고 하여 지금도 변함없이 바위주변을 항상 깨끗이 청소하고 바위를 잘 보존하고 있다
2.2.2. 신촌마을
- 조선조 초기에는 행정구역상 지명을 초계군 도방리라하여 초계군 중방리, 두방리와 함께 초계고을의 3방 중에 하나다. 다시 행정구역의 개편으로 서기 1893년(고종 30년)까지 초계군 이책면 본신으로 개명하여 상위지역을 상신이라하고 하위지역을 하신리라 하였다. 그 이후 우리나라 연호가 광무라고 칭하면서 모든 행정이 개편됨에 따라 신촌이라고 명명하였으며 자연마을로서 연병정과 새마가 있다. 완산전씨의 집성촌으로서 약 490년 전에 시거하였고 지방도 907호와 1080호가 합쳐지는 곳으로 교통이 원활하며 상가가 형성되어 있다.
- 연병정 : 조선시대 행정노선의 하나의 경상감사가 대구현영에서 경상우도의 각 고을을 행차할 때 초계군에서는 이곳에 정자를 짓고 모든 병사를 동원하여 경상감사를 맞이하였다. 특히 경상도에서는 병마절도사가 3명 있었는데 병사절도사의 연접지이기도 하기 때문에 지금까지 연병정이라고 하며 이책 삼거리에 위치하고 있다.
- 당산 : 1991년 까지는 음력 정월 대보름에 제관 2명을 뽑아 동제를 모셨으나 1992년 부터는 주민 전원이 참석하여 동제를 모시고 있으며, 황토를 마을 어귀등에 뿌려 마을의 안녕을 빌고 있다
- 새마 : 완산전씨의 집성촌으로서 약 490년 전에 시거하였고 뒤편에 완산전씨의 중시조 산소가 있다.
- 연병정 : 조선시대 경상감사가 대구현영에서 경상우도의 각 고을을 행차할 때 초계군에서는 이 곳에 정자를 짓고 모든 병사를 동원하여 경상감사를 맞이하였다. 특히 경상도에서는 병마절도사가 3명 있었는데 병마절도사의 연접지이기도 하여 지금까지 연병정이라고 하며 이책 삼거리에 위치하고 있다. 지방도 907호선과 1034호선이 합쳐지는 곳으로 교통이 원활하며, 지금은 폐교되었지만 (구) 이책초등학교가 있었던 곳이다
2.3. 사양리
2.3.1. 사양마을
- 동명은 서곡수, 내곡수, 불당곡수, 도군국수, 사곡수가 동구에서 합류함으로 “사“자요 한박산, 학산, 은방산, 솔대방산, 당산, 중지봉, 시묘산, 정칠산이 있어 산은 “양“자로 보아 사양이라 한 것 같다.
- 마을 유래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김해김씨가 405년에 시거하였으며 완산전씨는 악300년전에 시거하였으며 합천이씨는 255년전에 시거하였음.
- 지방도 1080호선이 1991년 확포장으로 마을앞에 도로가 있어 대구와의 교통이 원활하며 돗자리가 유명하며 한때는 학자리를 생산하여 박정희 대통령의 표창을 받은 일도 있으며 주민소득을 올렸다.
- 수풍정 : 옛날부터 명천(名泉)으로 가뭄에도 물이 떨어지지 않으며 대장다리와 사양마을 사이에 있음.
- 시묘산 : 본면 상포리 변씨가 부녀 상을 당하여 묘측에 幕을 짓고 년간 시묘하였다하여 시묘산이라 함
- 대장다리 : 옛날에 진주병사가 지날 적에 대장이 도교하였다 하여 대장교라 일컬어지기도 한다.
- 죽전 : 마을 뒤 대나무 밭이 많다하여 죽전이라 불렀다.
- 새터 : 처음 사양마을에 사람이 거주하기 시작했을 때는 골짜기에 터를 잡고 몇 집만이 살았으나, 그 중 일부가 이주한 뒤로는 이 곳을 새터라 부르게 되었다.
2.4. 건태리
2.4.1. 건태마을
- 원래 건태마을 위치는 지금의 건태마을 윗편 음방산 아래쪽인데 뒷산 봉우리 3개가 솟아 있어서 하늘의 삼태와 같다하여 乾자와 台자를 써서 乾台라고 이름이 지어졌다고 하나 지금은 수건 건(巾)자를 사용 巾台라한다.
- 고려때는 여기서 부락을 형성하여 살았다고 전설에 내려오고 있으며 기와장과 집터의 흔적은 있었으나 그의 후손은 누구인지 미상이며 그 후 지금의 건태부락 뒤골짜기 건태리 전326번지에서 驪陽陳氏 陳鳳분이 1432년 그곳에서 태어나서 경남 양산군수를 역임하였다.
- 고손 陳潤珍 重林察訪도 그곳에서 태어났다는 전설이 있으며, 지금도 그곳에는 주춧돌과 담장같은 형태가 있으며, 지금의 위치한 마을은 전설에 의하면 약 300년 전에 생겨서 농사의 편의상 골짜기가 차차 아래로 내려와 부락이 생겼으며. 1940년 이전만 해도 골짜기 몇 집만이 살고 있었으며. 지금은 집터, 담장 형태는 있고 사람은 거주하지 않고 있다.
- 모서리 : 고려때부터 생긴 나루터인데 2-3가구가 살면서 율곡면 일부, 쌍책면 일부 주민들이 초계, 합천, 고령 시장을 왕래하는데 교통의 요충지였다. 1980년 횡보교량과 고령 교통이 원활히 소통됨으로 자연적으로 나루터가 없어짐
- 건태 : 원래 건태마을 위치는 지금의 건태마을 위편 음방산 아래쪽인데 고려 때는 여기서 부락을 형성하여 살았다고 전설에 내려오고 있으며 기와장과 집터의 흔적은 있으나 그의 후손이 누구인지 미상이다. 지금 위치한 부락은 전설에 의하면 약 300년 전에 생겨서 농사 편의상 골짜기가 차차 아래로 내려와 부락이 생겼다고 전해진다.
2.4.2. 매호마을
- 탁계선생님의 자 전문이 410년전에 시거하였으며 매화나무가 많은 곳이라 하여 매호라고 한다. 지방도 907호에서 0.5㎞정도 떨어져 있으며 직행버스 등이 정차하지 않기 때문에 소재지까지 와야하는 불편한 점이 있다.
- 몇 년 전부터 배울골에 축산농가가 많이 생겨 소득을 많이 올리고 있고, 1993년 경지정리된 답에 시설하우스가 증가하고 있다.
- 용방골 : 매호마을 입구의 오른쪽 골짜기에 위치하고 있으며, 용이 거주하다가 승천하였다고 함. 3m정도의 폭포가 있으며 용의 발자국이 있음.
- 화물차 바위 : 매호와 상포사이에 있으며, 바위가 화물차처럼 생겼다고 해서 화물차 바위라고 하며 크고 무겁기 때문에 항상 위쪽의 모래가 유실되어 위쪽으로 이동한다는 전설이 있다.
- 매호 : 탁계(濯溪) 전치원(全致遠)선생의 자(子) 전문이 410년전에 시거하였으며 매화나무가 많은 곳이라 하여 매호라고 한다. 탁계선생의 자 전문의 정각으로서 연곡사(淵谷祠)라는 정각이 있는데 매호마을 아래에 위치하였으며 1677년 신촌에서 이전하였으나 경지정리로 소실되었고 비석은 율곡면 내천마을 입구에 있다.'
2.5. 덕봉리
2.5.1. 덕봉마을
- 창녕조씨의 집성촌으로서 485년 전에 시거하였으며 그전에는 청도김씨가 거주하였다는 설이 있다.
- 마을 앞의 정자나무는 500년전 식수되어 여름에는 주민들의 휴식처로 이용되고 있다. 마을 입구에는 유황성분이 많은 지하수가 있어 인근 주민의 약수터 및 부녀자들의 빨래터로 이용되고 있다.
- 미맥중심이 주소득원이며 새마을사업으로 진입로가 제일 먼저 포장된 곳이기도 하다.
- 덕양제 : 조정화, 조봉곡, 조정곡선생을 모신 곳으로서 서원이었으나 대원군 때 폐쇄이었으며 정곡선생의 필어집 36판이 현재까지 보관되어 있으며 제사는 묘사날인 음력 10월 11일에 거행되고 있음.
2.6. 진정리
2.6.1. 진정마을
초계정씨가 585년에 시거하였고, 초계정씨의 집성촌이며 시조인 정배걸의 묘소가 성산리 옥전에 있으며 매년 음력 3월 1일에 옥전서원에서 제사를 지내고 있다. 마을안에는 약 150년 정도된 느티나무가 5그루, 해나무1그루가 있으며 마을입구에는 약300년된 2그루의 느티나무가 있어 여름에는 주민들의 피서지로서 각광을 받고 있다.
- 황 새 등 : 첨모제 뒷편에 있는 봉우리로 황새처럼 생긴 봉우리
- 불 모 골 : 황새등과 촛대등 사이에 있는 골짜기
- 촛 대 등 : 황새등 옆에 있으며 촛대처럼 솟은 봉우리
- 삼 박 골 : 옛날에 삼을 많이 재배했던 골짜기
- 세톨바위 : 절골에 있으며 밤세톨모양으로 생긴 바위
- 절골 : 옛날에 절이 있었던 곳이라 하여 절골이라 불려지며, 현재 진정 저수지가 위치하고 있는 곳이다
- 햇골 : 옛날 밤에 횃불을 들고 청덕 정산으로 넘어가는 재를 많이 다녔다하여 햇골이라고 불려지며, 현재 햇골 소류지가 있는 곳이다.
- 국성동(國誠洞) : 정확한 유래는 알 수 없으나 나라에 충성하고, 부모에게 효를 다하여 공경하는 마음을 본받고자 국성동이라 부른 것으로 추측된다
2.7. 상포리
2.7.1. 상포마을
- 상포 : 옛날에는 창원황씨가 살다가 고령으로 이주하고 초계변씨는 405년 전에 시거하였으며, 밀양박씨는 315년 전에 시거하였고 현풍곽씨는 165년 전에 시거하였다. 주 소득원은 시설하우스 설치로 딸기, 수박, 호박 등의 생산으로 생활을 영위하고 있으며 우리면에서 가장 소득이 많은 마을이며 농사를 짓는 젊은 청년들이 가장 많은 마을이다.
- 황강중류 이하 지역에 갯가가 3개 지역으로 율곡면 토포, 개포, 쌍책면 상포인데 그중 제일 높다하여 우상(上),개포(浦)자의 첫 자를 따서 웃개라 불렀으며 끝자 2자를 따서 상포라 부르고 있다.
- 상포~성산간 농어촌 도로가 개설되기 전에는 대형버스나 트럭이 통행할 수 없어 농산물 수송에 많은 애로가 있었으나 96년 2차선의 아스팔트 확포장공사로 원활한 수송이 이루어지고 있다.
- 상포제 : 상포로 입산한 翊候 할아버지의 5세손인 諱抱字睡翁 公의 齊室이다. 매년 3월 3일에 춘향제를 모시고 있다
2.7.2. 관수마을
- 관수 : 뒷산은 옥전고분, 앞으로는 황강이 유유히 흐르는 배수임산 지역으로 일찍부터 사람이 살았던 흔적들이 도처에서 발견된다. 현재에도 일명 구전(口傳)으로 관징개라 불리고 있으며 도원이라는 수련장(강당→강답)에 주춧돌과 고송(古松)이 울창한 흔적들은 1980년대 경지정리로 현재 남아 있지 않다. 관수(官樹)라는 지명은 옛 선비들과 유생들의 문무(文武)수련 연마장과 풍유객들이 노닐던 장소가 있었다 하여 생겨났다고 한다. 또한 두 형제의 충과 효가 새겨진 현판이 보존된 쌍효각(雙孝閣)이라는 충효문이 있는 곳이기도 하다.
- 약 390년 전에 초계변씨가 시거하였으며 현재까지 많은 호수가 살고 있으며 1996년 성산-상포간 농어촌 도로가 개설되기 전에는 대형버스나 트럭이 통행할 수 없어 농산물 수송에 많은 애로를 겪었으나 2차선의 농어촌 도로가 개설됨으로서 교통이 원활해졌고 도로를 몇차례 확장하는 등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 황강변을 끼고 있는 마을로서 황강변의 기름진땅을 이용하여 시설채소인 딸기와 수박을 재배하여 많은 농가소득을 올리고 있는 마을이며 단결이 아주 잘되는 마을이다.
- 도원 : 풍유객들이 시조도 읊고 쉬어 갈 수 있었으며 옛날 선비들이 글공부하던 강당으로 관수마을 아래에 있었다고 함.
2.8. 성산리
2.8.1. 내촌마을
- 내촌 : 황강변에 위치하여 자연경관이 수려하며 관수정, 황강정이 있다. 문화류씨 법성선생의 유적비가 있으며 15세기 중엽 법성선생이 심은 느티나무는 아직까지도 주민들의 피서지로 이용되고 있다.
- 1927년 제촌에서 면사무소를 이전하였으며 파출소, 쌍책초등학교, 우체국등이 소재하고 있고 합천이씨가 520년전에 시거하였다고 한다.
- 황강변에 위치하여 자연경관이 수려하며 관수정, 황강정이 있다. 문화유씨 법성선생의 유적비가 있으며 법성선생이 심은 느티나무는 년 전에 심었다고 하며 아직까지 면사무소 앞에 있어 소재지 주민들의 피서지로 이용되고 있다.
- 안마와 말구리가 있는데 현재 안마에만 인가가 있고, 말구리에는 15여년 전에 5-6가구가 살았으나 현재는 사람이 살고 있지 않다.
- 마을 동제 : 옛날부터 내외촌마을 주민들이 당산에 제를 올리는 행사로 음력 정월 초육일에 생계목덕에 의하여 차출된 2명이 지내다가 1980년 부터는 매월 음력 3월 3일날 동제를 지내고 마을 어귀 및 사거리, 삼거리에 황토를 놓아 마을의 안녕을 빌었다.
2.8.2. 외촌마을
옛날 가야시대부터 사람이 살았던 문화 유적지가 많은 곳으로 지명에대한 두가지 설이 있다. 그중 하나는 지형이 누애의 잠자는 형태같다고 하여 누애잠(蠶)자와 잠잘미(尾)자를 써서 잠미라 불리었고, 또 하나는 옛날에 성이 있었다고 해서 잿 성(城)자에 뫼 산(山)잘로 성산이라 불렀다. 성산에 속하며 이조시대에는 초계군 초계면에 속하였으며 문화류씨가 610년전에 시거하였으며 구술밭에는 5-6가구가 1975년까지 살았으나 현재는 집터와 대밭의 흔적이 남아있다. 정자나무는 이중호씨 조부가 120년전에 심었다고하며 주민들의 휴식처로 이용되고 있음.
- 들돌백이 : 진정쪽의 배울개울옆에 1970년대 까지 주막집이 있어 지나가는 객들에게 술과 안주도 팔았으며 쉬어가는 곳이었음.
- 시장 : 1956년경 현재 쌍책농협사무실 위치에 설치되어 초계장 익일날 운영되다가 1964년경 철폐되었음.
- 외촌 : 쌍책면의 소재지로 남쪽으로 흐르는 황강변(黃江邊)에 위치하고 있으며, 옛날 가야시대부터 사람이 살았던 문화 유적지가 많은 곳으로 현재 합천박물관이 소재하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조선시대에는 초계군 초계면에 속하였으며 문화류씨가 610년 전에 시거하였다.
- 밤마 : 밤마라는 지명은 중심지에서 떨어진 바깥마을이라는 뜻에서 예전부터 구전되어 내려오는 듯 하고, 120년 전에 심었다고 전해지는 정자나무는 주민들의 휴식처로 이용되고 있다. 현재 정자나무가 있는 곳에는 설치년도가 정확하지 않으나 1920년대에 생긴 것으로 추정되는 돌 방앗간의 흔적을 찾아 볼 수 있으며, 1953년까지 곡식을 찧었다고 전해진다. 소를 이용하여 2명(가래질1명, 빗자루질1명)이 1가마를 정미하는데 2시간 정도 소요되고 1974년 도로확장으로 인하여 형체의 일부만 남아 있으며 그 위치에 바위가 있어 건들바위 라고도 한다
2.9. 다라리
2.9.1. 중촌마을
이 지역에서 제일 높은 산인 부소산이 있고 화철사에서 동남으로 뻗어 함박산을 거쳐 갈비봉을 이룬다. 이 마을에 제일 먼저 들어온 성씨는 여양진씨로 중촌 저수지 옆 대박골이라는 곳에 살았으며 진씨께서 돌아가시자 청덕면 정산에서 장례를 치렀다고 한다. 다음에는 진양강씨(晉陽姜氏)가 자리잡았는데 중촌마을 앞 두간이라는 곳에 상당히 많은 사람이 살았으며 어느해 질병으로 인해 많은 사람이 죽고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 중 한 집은 쌍책 건태로 이주하여 현재까지 잘 살고 있다고 한다. 그 후 밀양박씨(密陽朴氏)와 안동권씨(安東權氏)가 합천 대양에서 이곳으로 이주해 현재까지 그 명맥이 이어지고 있다. 현재는 밀양박씨의 집성촌을 이루고 있다.
- 평풍바위 : 다라에서 청덕 성태로가는 곳에 위치하고 있으며 적중 죽고에서 보면 확실히 보이며, 폭이 10폭이고 상층, 중층, 하층 3층으로 구성되어 있다. 상층은 스승님께, 중층은 선조에게, 하층은 자녀 결혼에 이용되었다고 함.
- 옥녀바위(선녀바위) : 다라에서 성태로 가는 길의 하단의 황강에 위치하고 있으며 왼손으로 첫 번째 돌을 던져 옥녀바위에 돌이 얹어지면 득남한다고 함.
- 당산 : 계촌마을 뒷편에 위치하고 있으며 음력 6월하순에 제관2명을 복인이 아니고, 임산부가 아니며 복이 있는 사람을 선정하여 음력 7월1일에 당산제를 지내고 있고, 마을어귀 마다 황토를 놓아 마을의 안녕을 빌고 있음.
- 약샘 : 다라에서 성태로가는 곳에 있으며 눈병이 있어 그곳에서 숱가락으로 떠서 치료한 결과 나았다고 하여 약샘이라고 함
- 중촌 : 조선시대에는 초계군 덕진면에 속하였으며 이 지역에서 제일 높은 부소산이 있다. 이 마을에 제일 먼저 들어온 성씨는 여양 진씨로 중촌 저수지 옆 대박골이라는 곳에 살았으며 진씨께서 돌아가시자 청덕면 정산에서 장례를 치렀다고 한다. 다음에는 진양 강씨가 자리 잡았는데 중촌마을 앞 두간이라는 곳에 상당히 많은 사람이 살았으며 어느 해 질병으로 인해 많은 사람이 죽고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 중 한 집은 쌍책 건태로 이주하여 현재까지 잘 살고 있다고 한다. 그 후 밀양 박씨와 안동 권씨가 합천 대양에서 이곳으로 이주해 현재까지 그 명맥이 이어지고 있다. 현재는 밀양박씨의 집성촌을 이루고 있다.
2.9.2. 계촌마을
다라 앞에 구례라는 들이 있는데 이 들을 끼고 흐르는 냇물이 아홉구비라하여 9례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하며 이마을의 재앙을 방지하는 뜻이 있다고 한다. 마을형성 시기는 안동귄씨가 합천 대양에서 495년 전에 시거하였고 약 2/3정도를 차지하였으며 밀양박씨도 495년 전에 시거하여 약1/3정도가 살았다고 한다. 다라의 입구에는 오림목 이라는 정자가 있는데 2그루는 없어지고 3그루만 남아있어 주민들의 휴식처가 되고 있다.
- 칠성바위 : 일곱 개의 바위로 구성되어 노씨선산에 있으며 새마을 사업으로 일부가 파손되어 마을에 재앙이 많아 다시 복구하였다고 한다. 대구광역시에 있는 칠성동에도 칠성바위가 존재하며 마을 수호신으로 지금까지도 모시고 있다고 함.
- 학등 : 중, 계촌사이에 있는 산등성으로 학처럼 생겼다고해서 학등 이라고 함.
- 와우산(반월산) : 계촌 뒷편에 있는 산으로 소가 누워있는 형상이므로 와우산이라 함
- 웃주막 : 옛날 이 지역에 주막이 있었다고 하여 웃주막이라 부르고 있으며, 현재 그 주막의 형체는 남아 있으나 사람은 살지 않는다고 한다.
- 계촌 : 다라 앞에 구례라는 들이 있는데 이 들을 끼고 흐르는 냇물이 아홉구비라 하여 9례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하며, 이 마을의 재앙을 방지하는 뜻이 있다고 한다. 마을형성 시기는 안동 권씨가 합천 대양에서 495년 전에 시거하였고 약 2/3정도를 차지하였으며 밀양박씨도 495년 전에 시거하여 약 1/3정도가 살았다고 한다. 계촌 입구에는 오림목이라는 정자가 있는데 2그루는 없어지고 3그루만 남아 있어 주민들의 휴식처가 되고 있다. 또한 칠성바위(일곱개의 바위)가 노씨선산에 있으며 새마을 사업으로 일부가 파손되어 마을에 재앙이 많아 다시 복구하였다고 한다
2.10. 오서리
2.10.1. 오서마을
이조시대에는 초계군 초책면으로 까마귀가 서쪽으로 날아가는 형상을 본떠 오서라 하였다 한다. 초계로 통하는 도로를 개설하기 위하여 70-80년대까지 주민들이 많이 노력하였으며 차량통행은 2개면을 경유하여 약9㎞ 우회하여야 한다. 현재는 오서교가 완공되어 많은 시간이 절약되고 있다
- 오서 : 조선시대에는 초계군 초계면에 속하였으며, 초계로 통하는 길을 개설하기 위해 1970~80년대까지 주민들이 많이 노력하였으며 오서교 완공으로 인해 주민생활이 훨씬 편리해졌다.
2.10.2. 제촌마을
- 제촌 : 조선시대에는 초계군 초계면에 속하였으며 연못이 있었다고 해서 지금까지도 못골이라고 불려지고 있다. 마을 연대는 알 수 없으나 조씨, 마씨, 우씨가 있었다고 전해지며 현재는 거주하지 않는다. 밀양박씨는 300년 전에 시거하였다 하며, 1927년 쌍책면 소재지가 성산으로 이전하기 전에 면사무소가 소재했던 곳이다.
3. 특징 및 교통
면소재지는 성산리이다. 이 면은 문화유적으로 베티세일동굴, 옥전고분, 옥전서원, 관수정, 법성정 느티나무 등이 있다. 또한 시외버스 대구-초계 노선이 이 면을 지난다. 907번 지방도, 1034번 지방도 등이 지나며 시외버스, 시내버스가 운행중이다.4. 교육
초등학교 - 쌍책초등학교 (공립)5. 출신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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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8월 주민등록인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