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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경수(1876)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신경수
申敬守[1]로 표기하기도 하였다.]
<colcolor=#fff><colbgcolor=#0047a0> 출생 1876년[2]
전라도 장성도호부 북이면 용산리
(현 전라남도 장성군 북이면 백암리 용산마을)[3]
사망 1909년 11월 28일 (향년 32~33세)
경상북도 대구군 대구감옥
본관 고령 신씨[4]
영집(泳執)
묘소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1묘역-298호
상훈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 추서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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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 독립유공자.

2. 생애

1876년 전라도 장성도호부 북이면 용산리(현 전라남도 장성군 북이면 백암리 용산마을)에서 아버지 신양호(申養浩, 1857. ~ ?)[5]와 어머니 고흥 류씨(? ~ ?.9.13.)[6] 사이에서 2형제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이후 농업에 종사하였다.

1908년 10월 3일 김영백(金永伯) 의병장 부대에 입대한 뒤 부대에서 심부름꾼으로 일하였다. 1908년 11월 말 부대원 3명과 함께 군자금 모금을 위하여 화승총을 휴대하고 전라북도 흥덕군 이남면 반룡리[7] 김 아무개 집에 들어가 의병이라 칭하고 금 40냥과 짚신 두 켤레를 모집했다. 12월 23일에는 부대원 2명과 함께 장성군 북상면 송산리[8] 유용경(劉用景)[9]의 집에 찾아가 엽전 50냥을 모금하였다. 이후 위와 같은 행적이 발각되면서 일본 제국 경찰에 체포되었다.

1909년 5월 24일 광주지방재판소 전주지부에서 이른바 강도 혐의로 교수형을 선고받았다.[10] 이에 공소를 제기하여 6월 24일 대구공소원에서 이른바 강도 혐의에 대해 원심 판결이 취소되고 징역 10년을 선고받았다.[11] 이에 상고를 제기하였으나 1909년 7월 20일 대심원 형사부에서 이른바 강도 혐의에 대해 상고가 기각되어[12] 형이 확정되었다. 이후 광주감옥, 전주감옥을 거쳐 대구감옥으로 이감되었다가 1909년 11월 28일 대구감옥에서 옥사, 순국했다.

1983년 8월 31일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받아 건국포장이 추서되었고, 이어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유해는 당초 장성군 북이면 죽청리에 안장되었으나 1991년 9월 12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1묘역에 이장되었다.

[1] 고령신씨대동보 권13 163쪽에는 일명으로 고령 신씨 27세 항렬자인 수(秀)를 써서 申 [2] 고령신씨대동보 권13 163쪽에는 1877년생으로 기재되어 있다. [3] 고령 신씨 집성촌이다. 1801년에 고령 신씨가 이 마을에 입향해 왔다고 한다. [4] 귀래정공파(歸來亭公派)-진사공(進士公) 성준(成準)파 27세 수(秀) 항렬. 족보명은 신영수(申英秀). 참고로 신경수는 1624년( 인조 2) 식년 진사시에 2등 10위로 입격한 취만(翠晩) 신성준(申成準, 1592. ~ 1647.)의 13대 주손(胄孫)이다. [5] 자는 문보(文甫). [6] 류경선(柳景善)의 딸이다. [7] 전북특별자치도 고창군 신림면 반룡리 [8] 장성군 북이면 오월리 송산마을 [9] 유주경(劉周景 또는 兪主京)이라고도 한다. [10] 1909년 5월 24일 광주지방재판소 전주지부 판결문 [11] 1909년 6월 24일 대구공소원 판결문. DB에는 공소 기각이라고 적혀 있으나, '번역문보기'를 통해 번역문을 보면 원심 판결이 취소되고 징역 10년형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12] 1909년 7월 20일 대심원 형사부 판결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