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3-01 03:48:10

시카고 컵스/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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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창단2. 1900년~1920년3. 1920년~1945년4. 염소의 저주가 걸린 뒤의 행보
4.1. 1969년의 가을
5. 통한의 탈락 - 2003 NLCS6. 잠시 얻은 전성기와 다시 리빌딩
6.1. 2007~2009 시즌6.2. 2010 시즌6.3. 2011 시즌
7. 테오 엡스타인 체제와 맞은 전성기, 그리고 108년 만에 차지한 우승8. 다시 찾아온 암흑기
8.1. 2021 시즌8.2. 2022 시즌
9. 윈나우의 기로에서
9.1. 2023 시즌9.2. 2024 시즌

컵스의 117년 역사를 보여주는 다큐멘터리 비디오 (1987)

1. 창단

1870년 시카고 화이트 스타킹스라는 이름으로 창단한 진짜 무지하게 유서깊은 팀이다. 1876년 내셔널리그 합류 후 1889년까지 화이트 스타킹스[1]라는 이름을 쓰다가 1890년부터 1897년까지 시카고 콜츠, 1898년부터 1902년까지는 시카고 오펀스(Orphans, 고아들)라는 이름을 쓰다가 1903년부터 맹수의 새끼라는 뜻의[2] Cubs를 팀명으로 사용하기 시작해 지금까지 컵스라는 이름으로 내려오고 있다.

애틀랜타 브레이브스와 함께 메이저리그에서 가장 오래된 구단이나, 브레이브스의 경우, 보스턴, 밀워키를 거쳐 1966년에 애틀랜타로 왔으나, 컵스는 창단부터 지금까지 뒤에 붙는 이름만 바꿨을 뿐, 계속 시카고였다. 가장 오랫동안 연고지를 옮기지 않고 계속 사용중인 프로구단으로서 기록에 남아있다. 그리고 이 팀이 가진 또 하나의 기록은 가장 오랫동안 우승 없음.[3]

창단 첫 해이자 메이저리그가 내셔널 어소시에이션에서 내셔널리그로 개편된 첫해인 1876년 리그 우승을 차지했고, 1880년부터 1882년까지 리그 3연패를 했으며 1885년 전년도인 1884년 처음 시작된 월드시리즈에 진출해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의 전신인 세인트루이스 브라운스와 하지만 3승 1무 3패로 무승부. 이듬해에는 월드시리즈에서 4승 2패로 패배 후 이름이 컵스로 바뀔때까지 19년동안 월드시리즈와 인연이 없었다. 전설은 이미 19세기에 시작됐다.

19세기 컵스, 아니 화이트 스타킹스&콜츠 최고의 스타라면 캡 앤슨이 있다. 선수생활 초기엔 3루수, 20대 중반 넘어가서는 주로 1루수로 활약했고 포수, 유격수로도 간혹 알바뛰던 이 내야수는 21홈런도 때려보고 두자리수 홈런을 세번이나 기록한 당대 최고의 거포였다. 이게 왜 대단한거냐면, 1920년대 '라이브볼 시대'가 개막하기 이전에는 '데드볼 시대'라고 하여 시대를 따로 규정하는데, 이때는 야구공 자체가 지금이랑은 아주 많이 달랐다.

제대로 때려봤자 날아가지도 않는 그런 공으로 야구를 했던 시절이고 홈런 10개면 리그 홈런왕 먹던 그런 시절이다. 그런 시절에 21홈런을 때렸다는건 지금시대 60홈런 만큼이나 무시무시한 것이다. 물론 앤슨도 무홈런 시즌이 10번이나 있다. 당장 21홈런을 때린 1884년의 바로 이전해인 1883년에도 무홈런…[4]

게다가 앤슨은 선수 겸 감독이었다. 선수 말년 1, 2년 한게 아니다. 27살때부터 선수와 감독직에서 모두 은퇴하는 45살까지 무려 18년 동안 선수 겸 감독이었다. 19세기의 대표적인 스타였던 앤슨은 당연히 명예의 전당에 입성.

그런데...이 분에게는 떨어질 수 없는 딱지가 하나 붙어있다.

원래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의 극 초창기때는 흑인이 뛰는데 아무 문제가 없었다. 그런데 1887년에 구단주 겸 감독 겸 최고 스타였던 그가 선수들을 선동하여 흑인들을 메이저리그에서 내쫓았다. 앤슨의 말을 거스를 수 있는 사람은 없다시피 했기 때문에 결국 흑인 선수들은 완전히 축출되었다. 그리고 1947년 4월 15일 브루클린 다저스에서 한 신인 2루수가 데뷔할 때까지 메이저리그 무대에서 흑인은 찾아볼 수 없었다. 인종주의자라는 낙인은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것이고 지워져서도 안될 것이다. 어쩌면 신이 이에 노하여 우승을 못하게 만든 걸지도

2. 1900년~1920년

아무튼 20세기로 접어들어 컵스로 팀명을 바꾼 초창기 리그 내 손꼽히는 초강팀으로 군림했다. 1906년 컵스가 올린 116승은 95년뒤에나 타이기록이 나올정도의 대기록이다. 게다가 2001년 시애틀은 162경기에서 116승이었지만 1906년 컵스는 155경기에서의 116승이다. 비교가 안된다. 그러나 월드시리즈에서는 2승 4패로 패배한다.

하지만 이듬해인 1907년에 우승에 성공했다. 그리고 그 다음해인 1908년, 유명한 머클의 본헤드 사건이 벌어진다. 당시 컵스는 90승 53패인 상황에서 87승 50패로 공동 선두를 달리고 있었던 뉴욕 자이언츠와 맞붙게 되었는데, 1-1 동점으로 9회말 자이언츠 공격까지 오게 되었다. 아트 데블린과 프레드 머클이 안타를 치며 2사에 주자는 1, 3루. 그리고 거기서 알 버드웰이 안타를 치면서 2-1로 경기가 끝나는가 싶었는데...

1루 주자였던 머클은 모여든 관중을 보고[5] 2루 베이스를 밟지 않은 채 덕아웃으로 돌아갔다. 여기서 수비수가 공을 갖고 2루 베이스를 터치한다면 포스아웃으로 1-1인 채 이닝이 종료되어야 했지만, 보통 끝내기 상황에서는 이런 걸 따지지 않는 게 관례였다. 그런데 당시 2루수였던 자니 에버스이걸 보고는 공을 찾아와서[6] 2루를 터치해버렸다. 심판은 이걸 보고 승패를 확정짓지 않은 채 게임을 종료시켰다.

결국 이 경기는 무효가 되어서 재경기를 하게 되었는데, 컵스가 시즌 정규 경기 끝에 자이언츠와 동률을 이루고 그 재경기에서 이기며 리그를 우승했다. 그리고 이 해의 월드 시리즈를 우승했으니, 단순계산으로 생각했을 때 이 경기가 아니였으면 컵스의 마지막 월드시리즈 우승은 1907년이 될 뻔 한 셈. 본헤드 플레이란 용어는 이때부터 쓰이기 시작한 말. 참조[7][8]

1907년, 1908년 우승 당시의 팀 1,2루수, 유격수는 모두 명예의 전당에 입성했으며( 프랭크 찬스[9], 위의 자니 에버스, 조 팅커), 팀 에이스도 명예의 전당 멤버( 모데카이 브라운)였다. 명예의 전당에 들지는 못했어도 커리어 1500안타가 넘는 타자만 3명이 더 있었다.[10]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 우승 이후로 100년 넘게 우승 못할 줄은.

컵스는 1906년부터 1910년까지 1908년의 99승을 제외하면 모두 104승 이상을 올렸고 5년동안 월드 시리즈에 나가 두번 우승한 초강팀이었다. 이후에도 1918년에 월드시리즈에 진출했지만 보스턴 레드삭스에 패했다.

3. 1920년~1945년

실제로 대부분의 팬들은 1908년 이후에 컵스가 쭉 암흑기였다고 알고 있지만,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실제로 1920년대부터 1940년대까지 암흑기를 겪은 팀은 AL에서는 볼티모어 오리올스의 전신이었던 세인트루이스 브라운스, 베이브 루스를 트레이드한 보스턴 레드삭스였고, NL에서는 필라델피아 필리스였다. 창단 이후 1945년까지의 팀 승률은 5할 6푼에 근접할 정도이다. [11] 즉 이 때까지만 해도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보다도 정규시즌에 강한 팀이었다.

1918년 월드시리즈 패배 후 팀은 약간의 침체기를 가졌으나 팀의 대표격 선수였던 개비 하트넷[12]의 활약으로 1929년부터 정확히 3년 간격으로 10년동안 번의 월드 시리즈를 진출했다. 특히 1935년은 원조 가을의 기적으로 꼽히는 시즌이다. 컵스는 후반기가 시작될 때까지 카디널스, 자이언츠에 밀린 지구 3위였으나, 시즌 최종반 21연승을 하고 정확히 100승[13]을 거두며 철천지 원쑤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를 기적적으로 따돌리고 리그 1위를 차지한다. 현재까지도 21연승은 내셔널리그 역대 최다 연승 기록이다.[14]

하지만 네 번의 월드시리즈에서 다 패했다. 1929년 오클랜드를 상대로 4차전에 한 이닝 10실점 참사를 당했고[15], 1932년 베이브 루스에게 예고 홈런을 얻어맞고 뉴욕 양키스한테 4:0으로 떡실신을 당했다. 1938년에도 양키스를 상대로 또 4:0 스윕패. 이후 1945년 7년만에 월드시리즈에 진출한다. 역시 그때는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앞으로 무슨일이 일어날지.

디트로이트 타이거즈와의 월드 시리즈 4차전이 열리던 날. 컵스의 홈구장인 리글리 필드에서 빌리 시아니스라는 관중이 웬 염소를 한마리 데리고 들어온다. 참고로 그리스 출신이라 이름이 시아니스. 그리스 아르카디아 출신으로 1912년에 미국 이민, 205달러를 들여 시카고 스타디움 맞은편에 그리스식 음식점을 차려 대박을 냈다고 한다. 그 식당은 지금도 장사를 하고 저주 덕분에 초대박. 음식 평도 준수한 편에 속한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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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리 시아니스(Billy Sianis, 1895~1970)와 그의 염소 머피.

지금처럼 관중 통제가 엄격하지 않은 시절이라 애완동물 출입금지 팻말같은 건 존재하지 않았고 시아니스가 가족처럼 여긴 염소 머피의 입장권까지 끊어 들어갈 때도 아무도 제지하지 않았다. 문제는 구단주님 보시기에 좋지 않으셨다는 것. 컵스의 구단주 필립 K 리글리는 악취를 이유로 염소를 내보낼 것을 지시했다. 별안간 퇴출 통보를 받은 시아니스는 계속 난 경기를 봐야겠다고 우기다가 결국 끓어오르는 분노를 이기지 못하고 다음과 같이 저주를 퍼붓는다.
"컵스는 더 이상 우승을 못할 것이야. 리글리필드에 염소를 입장시키지 않는 한 다시는 월드시리즈에서 승리하지 못할 것이라고."
"The Cubs ain't gonna win no more. The Cubs will never win a World Series so long as the goat is not allowed in Wrigley Field."

그때 당시엔 아무도 이 저주가 70년도 넘게 회자되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 사건이 바로 그 유명한 염소의 저주이다. 참고로 이 사건이 벌어진 4차전에선 저주의 시작이었는지 컵스가 졌다. 최종적으로도 컵스 3 : 4 디트로이트로 컵스는 디트로이트에게 패한다. 1945년 당시 사진. 어지간히 화가 났는지 시아니스 눈의 살기가 장난이 아니다. 게다가 구단 관계자와 직원들은 그저 이 상황을 재밌게 웃으며 지켜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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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리의 조카인 샘 시아니스(Sam Sianis, 1935.04.08~)와 시아니스의 염소의 7대손 염소.

이후 1973년 빌리 시아니스의 조카인 샘 시아니스가 빌리 염소의 7대손 염소와 함께 리무진과 붉은 카펫을 동반, "모든 것이 용서됐다. 빌리 고트여, 나로 하여금 컵스를 페넌트레이스에서 우승하게 하소서"라고 해주를 하려고 리글리에 입장하려 했으나 또 다시 저지되고 말았다. 그리고 또 졌다. 저주를 풀어주겠다고 왔는데 문전박대를 했으니 이쯤되면 괘씸죄라고 해도 할 말이 없을 듯 싶다. 여담으로 1973년 컵스의 성적은 77승88패 네셔널리그 동부지구[16] 6개 팀 가운데 5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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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년 10월 2일 내셔널리그 플레이오프 때에야 마침내 출입을 성공했다. 컵스의 새 구단주가 된 트리뷴 컴퍼니에서 초청했는데 막판에 또 졌다(...). 훨씬 자세한 이야기는 여기에.

4. 염소의 저주가 걸린 뒤의 행보

그 이후론 설명이 필요없다. 38년 연속 포스트시즌 진출 실패를 기록하며 38년동안 평균 승률 0.456을 기록했다. [17]

이 시기에 컵스의 투타를 대표하는 선수로는 퍼기 젠킨스 어니 뱅크스가 있다.

항목에 자세히 설명되어 있지만 어니 뱅크스는 컵스에서만 19년을 뛴 선수였지만 그가 뛰던 시기에 팀은 비밀번호급 성적을 찍던 팀이라서 포스트시즌 구경을 해보지도 못했다.[18] 알렉스 로드리게스 이전 최고의 유격수 출신 강타자로 11번의 올스타 출장과 2번의 MVP[19]를 받는등 개인 수상은 충분히 받았으나 팀이 워낙 막장을 달렸던지라 팀 커리어가 별볼일이 없다.

하지만 의외로 꼴찌는 7번밖에 안했다. 아무튼 컵스팬에게는 참 우울하던 시절이었을 것이다. 6668587667을 찍었던 LG 트윈스, 588689967을 찍고 있는 한화 이글스 팬들은 고작 10년 정도 가을야구 못한다고 아우성이지만 여긴 스케일 자체가 다르다.[20] 애가 태어나서 마흔이 다 될때까지 가을야구 한번을 못했다는 소리이다. 다만 각주에 서술되어 있듯이 당시 메이저리그의 제도 자체가 정규시즌에서 우승을 해야만 포스트시즌 진출권을 주는 식이라 지금 롯데처럼 40년동안 정규시즌 우승을 못한 것이지 상위권에도 한 번도 못 든 것이 아니다. 반면 KBO는 전체의 절반 안에만 들면 포스트시즌에 진출하므로 10년동안 연속으로 포스트시즌에 진출하지 못할 확률은 1/2^10=1/1024(...) 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10년 연속 포스트시즌 진출 실패가 그렇게 불명예스러운 기록인 것이다.

1981년에 60년간 팀을 운영하던 리글리 가문이 언론재벌 트리뷴 컴퍼니(현 트리뷴 미디어)[21]에 2,050만 달러를 주고 팀을 팔아버린 뒤 1984년 드디어 근 40년만에 리그 최고승률을 기록하면서 내셔널리그 챔피언쉽 시리즈에 진출, 샌디에이고 파드리스와 맞붙지만 2승 3패로 탈락. 이것도 참 우울한 것이 먼저 2승을 해 놓고도 내리 3연패하면서 탈락했다. 1989년에도 포스트시즌에 진출하지만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에게 1승 4패로 또 탈락했다. 이후 또다시 컵스는 우울한 90년대를 보냈고, 희망이 될 줄 알았던 구단주 트리뷴 컴퍼니는 팀에 별로 투자하지 않았다.

80~90년대의 컵스 최고 스타라면 메이저리그 최고의 대형 2루수 라인 샌드버그가 있다. 1981년 필라델피아에서 데뷔했지만 단 13경기만 뛰고 1982년 컵스에 합류한 샌드버그는 이후 1997년까지 컵스의 2루를 지켰다. 1990년에는 2루수 포지션에서 40홈런을 날리는 등 최고스타로 군림했다. 1984년에는 MVP도 수상했다.

이 시기를 전설의 비밀번호로 풀어 보면 3-6-8-8-7-8-5-7-7-6-8-7-5-5-7-7-9-7-8-8-10-3-3[22]-2-2-3-2-5-6-5-4-4-3-5-6-6-5-5 그 중 팀성적이 오랜동안 특히 더 안 좋았던 1947년부터 1966년만 보면, 68878-57768-75577-9788A 20자리가 완성된다. 20년중 5할승률 이상을 기록한 해도 정확히 5할을 기록한 1952년과 승률 0.506을 기록한 1963년밖에 없다.

중간 중간에 2나 3 같은 숫자들이 보이지만 이 성적을 찍을 당시에는 와일드카드제가 존재하지 않았던[23] 관계로 지구 1위(1968 시즌까지는 내셔널리그 1위)만 진출했던 메이저리그에서 1위를 아예 못하면 가을야구 못 한건 똑같다.그리고 중간에 나온 10 다음에 찍은 3 이나 2는 내셔널리그가 두 지구로 분할되면서 한 지구에 6개 팀으로 줄어들은 다음에 찍은 숫자이다. 다시말하면 3 찍어봐야 중위권이었다는 얘기. 대신 그 전에 찍은 5나 6은 중위권에 해당하는 성적이었지만 10 이후에 찍은 5나 6은 지구에서 꼴찌 아니면 꼴지에서 두번째였다는 소리이다.

4.1. 1969년의 가을

1966년 명장 레오 듀로처가 감독이 된 후 팀은 1967년, 1968년을 모두 10개팀 중 3위로 마치고, 1969년 리그 확장을 맞이한다. 그리고, 정규시즌 시작과 동시에 6할대 승률을 올리며 올스타 브레이크까지 꾸준히 리그 1위를 지켜온다. 8월이 시작할 당시 지구 2위 뉴욕 메츠와의 차이는 무려 8경기. 메츠는 1968년까지 최대 순위가 10개 팀 중 고작 9위였던 팀이었기에 컵스는 무려 24년 만에 포스트시즌 진출의 기회를 잡는다.

그러나 알다시피 어메이징 메츠의 원조가 일어난다. 메츠는 남은 48경기 중 무려 37승을 쓸어담는 동안 컵스는 고작 20경기를 이겨 무려 17경기를 따라잡힌 것. 결과는 8경기 리드에서 8경기 뒤진 상황으로 시즌이 마무리된 것이다.

그리고 메츠는 이후 정규시즌 무려 109승을 기록한 초강자 볼티모어마저 꺾고 월드시리즈 반지를 획득하기에 이른다.

5. 통한의 탈락 - 2003 NLCS

그래도 불꽃은 꺼지란 법은 없는지 1998년, 역대 두번째 한경기 20탈삼진을 기록하며 혜성과도 같이 등장한 광속구 투수 케리 우드, 팀의 1루를 한결같이 지켜왔던 마크 그레이스, 51세이브를 올린 마무리 로드 벡...그리고 마크 맥과이어와 역사에 길이 남을 홈런 레이스를 벌인 새미 소사의 활약으로 실로 오랜만에 포스트시즌에 진출한다[24]. 홈런왕은 맥과이어였지만 소사는 팀의 포스트시즌 진출에 기여한 공로로 MVP를 차지했다. 하지만 디비전 시리즈에서 애틀랜타 브레이브스에게 3패 스윕으로 탈락.

직후 1999년부터 2년연속 지구 꼴찌를 기록하는 등 침체에 빠졌으나 2002년 입단한 초 거물투수 마크 프라이어, 또다른 유망주 카를로스 잠브라노, 기존의 에이스 케리 우드 등 대단한 선발진에 새미 소사와 모이세스 알루가 이끄는 타선이 잘 조화되어 2003년 포스트시즌에 진출한다. 디비전 시리즈에서 애틀랜타 브레이브스를 꺾고 챔피언쉽 시리즈에 진출, 플로리다 말린스와 맞붙게 되며 끈덕지게 남아있던 염소의 저주를 깰 절호의 기회를 맞이한다. 1차전을 접전 끝에 패배했으나 2-3-4차전을 막강한 타선의 화력으로 말린스의 선발투수들을 털어버리며 승리, 월드시리즈 진출에 1승만을 남겨놓게 된다.

그러나 5차전 조시 베켓에게 완봉승을 헌납하며 일단 한번 물러난다. 하지만 아직 3승 2패로 앞서던 6차전. 그해 18승 2.43의 대단한 성적을 올린 마크 프라이어가 마운드에서 버티고 있었고 스코어는 3-0 컵스 리드. 8회와 9회만 넘기면 드디어 그 망할 놈의 염소를 엿먹이고 월드시리즈에 올라가는 그런 상황에서 플로리다 2루수 루이스 카스티요가 친 파울볼이 좌익수 쪽으로 향한다. 모이세스 알루가 관중석으로 넘어가는 공을 잡으려고 점프하는 그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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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쪽 시점에서 찍힌 사진.

해당 영상

실제 영상을 보면, 이 공을 알루가 잡았을 수 있었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공이 펜스 위로 정확하게 떨어졌기 때문. 그럼 뒤쪽에서 찍었다는 저 사진은 뭐냐하면, 이미 바트먼의 손에 맞아 볼이 튕겨나간 상태에서 찍힌 사진이다. 볼과 글러브 사이의 떨어진 거리나 글러브가 왜 닫혀 있는지가 모두 설명되는 셈. 게다가 밑의 사진은 공이 날아온 궤적까지 의도적으로 조작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실제로 공은 저렇게 비스듬하게 날아오지 않았고, 수직으로 펜스 위로 떨어졌다.

스티브 바트먼이라는 청년이 파울볼을 잡으려고 손을 뻗었고 결국 공은 바트먼의 손을 맞고 파울 처리. 모이세스 알루는 바트먼을 찢어죽일 기세로 화를 냈고 리글리 필드에 모인 관중들도 전부 관중에게 야유를 퍼붓는 초유의 광경이 펼쳐진다. 아마추어 시절에 역사상 최고의 대학투수라는 평가를 받으면서 전체 2위로 드래프트 되었고, 풀타임 첫해부터 기대를 벗어나지 않는 괴물급 성적을 올렸지만 아직 젊은 투수이던 프라이어는 이 파울 하나로 멘탈이 나간 나머지 완전히 다른 투수가 되어서 플로리다 타선에게 먼지나게 얻어터지기 시작하게 되었고, 프라이어 강판 후 올라 온 구원투수들마저 패신이 빙의되어 결국 6차전 8-3 플로리다 승리. 컵스는 이어진 7차전에 케리 우드가 털려 나가고 구원등판한 조시 베켓에게 타선이 다시 막히면서 또다시 염소의 저주에 울어야 했다. 문제의 6차전 리뷰 심지어 역대 최고의 재능 소리까지 듣던 프라이어는 이듬해부터 평범한 투수가 되더니 유리몸이 되어 이렇다 할 커리어도 남기지 못하고 은퇴해버리고 만다.

물론 바트먼은 경기가 끝난 이후부터 각종 협박과 테러에 시달렸다. 아니 당장 위의 6차전 리뷰의 후반부에만 봐도 당시 컵스팬들이 경비원의 호위를 받으며 구장을 나가는 바트먼에게 각종 쌍욕과 함께 쓰레기를 투척하는 것을 볼 수 있다.[25] 오죽하면 일리노이 주지사가 증인보호 프로그램을 신청하면 보호해주겠다고 권유했으며, 플로리다 주지사였던 젭 부시[26]도 딱했는지 직접 피난처를 알선시켜주려고 했다.

그 이후에 바트먼은 너무나 미안하다는 공식 사과를 남기고 수많은 스포트라이트를 거부한 채 조용히 일상 생활로 돌아갔다. 플로리다 팬들이 위로겸 조롱으로 보내준 선물들은 다 소아당뇨병 환자들에게 기부했으며, 수많은 인터뷰 및 광고 출연 제의를 다 거부하고 조용히 자숙했다. 그중에는 몇 십만불짜리 출연료를 제의받은 슈퍼 볼 광고 출연도 있었지만 다 거부했다. 그의 가족들은 협박 전화를 피하기 위해 전화번호를 바꿔야 했다.

시카고를 떠났을 만도 하고 소문도 무성했지만, 여전히 그는 시카고에서 활동하였고 2005년 라인 샌드버그가 명전에 입성하며 그를 언급하였다. 정확히는, 바트먼을 만나고 싶고 샌드버그 역시 같은 상황에 같은 행동을 했을 거라고 하며 동정여론을 형성하였다. 사실 컵스도 서럽긴 했겠지만, 6차전 경기가 끝난 뒤에 바로 공식적으로 스티브 바트먼에게 아무런 잘못이 없으며 그냥 야구구장에서 흔히 일어나는 일이라며 바트먼을 변호했다.[27] 참고로 바트먼이 앉았던 자리는 일명 '바트먼 의자(The Bartman seat)'라고 불리며 이후에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오는 성지가 되었다. 바트먼은 여전히 시카고에서 컵스 팬으로 살고 있으며, 재무 컨설팅 회사에서 사원으로 일하며 별 탈 없이 살고 있지만, 그 날 이후 리글리 필드에는 얼씬도 못한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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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트먼 의자.

2003년 내셔널리그 챔피언십 시리즈가 7차전까지 가는 끝에 컵스의 패배로 끝났고, 아메리칸 챔피언십 시리즈도 양키스와 레드삭스간의 7차전 승부에서 양키스가 끝내기 홈런으로 이기면서 월드 시리즈는 말린스와 양키스의 대결이 되었다. 아마 컵스와 레드삭스가 올라갔다면 염소의 저주 vs. 밤비노의 저주로 전미가 들썩거리면서, 가뜩이나 월드 시리즈 시청률 떨어져서 고민중이던 FOX와 메이저리그 사무국은 만세를 불렀을꺼다.

사실 냉정하게 따지고보면 근본적으로 팀이 자초한 일이다. 당시 감독 더스티 베이커의 포스트 시즌 투수 기용 단점이 첫 번째 원인이고,[28] 그 다음으로 바트먼 사건의 직접적 관련자인 모이세스 알루의 오버액션으로 다른 선수들의 멘탈을 흔들리게 만들었다. 사실 당시 유격수 알렉스 곤잘레스가 평범한 병살 타구를 놓치는 실수만 안 했어도 그냥 무난히 끝났을 이닝이다. 한마디로 스스로 만든 참사의 원인을 다른 곳에서 억지로 찾아내 트집을 잡다보니 바트먼이 마녀사냥 표적이 된 것이다.

저주가 깨지고 난 후, 시카고 컵스는 바트먼에게 2016 월드시리즈 우승 반지를 수여했다.

6. 잠시 얻은 전성기와 다시 리빌딩

6.1. 2007~2009 시즌

이후 또다시 침체에 빠진 팀을 구원하기 위해 2007 시즌을 앞두고 명장 루 피넬라가 감독으로 선임된다. 루 피넬라는 그 명성 그대로 팀을 2년 연속 포스트시즌으로 이끈다. 컵스 역사에서 2년 연속 가을야구는 1907년~1908년 이후 없었다. 다시말해 2년 연속 가을야구가 100년만이다. 이게 당연한게 컵스가 전성기였던 1940년까지는 리그 우승팀만 포스트시즌(즉 월드시리즈)에 진출했으니. 하지만 2007년에는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에게, 2008년에는 LA 다저스에게 2년연속 스윕당한다. 특히 2008년은 승률 .602, 97승 64패로 1945년이후로 최고의 시즌을 보냈음에도 스윕패로 허무하게 탈락하여, 수많은 팬들에게 충격을 주었다. 심지어 2008년 다저스의 승수는 고작 84승으로, 승률로만 따지면 NL 전체 8위로 절반 안에도 못 들었다.[29]

2009 시즌에는 2007 시즌 FA로 합류한 알폰소 소리아노 먹튀화 하면서 기대에 못미치고, 3루수 아라미스 라미레즈가 부상으로 시즌 반을 날려먹은데다 그동안 이닝 주야장천 먹어주던 에이스 카를로스 잠브라노도 부상, 시즌 전 돈깨나 주고 영입한 밀튼 브래들리는 완벽한 먹튀인증 한데다가 팀 분위기까지 해치면서 포스트시즌 진출 실패. 2008 시즌 꽤나 돈 좀 쥐어주고 영입한 일본인 선수 후쿠도메 고스케도 봄쿠도메라는 별명만 얻으며 2년 연속 먹튀 인증.[30] 최조 83승으로 성적 자체는 괜찮지만 미래가 그다지 희망차지 않다는 것이 문제였다.

그 사이 팀을 소유하던 트리뷴 컴퍼니는 적자만 계속되어 180억 달러의 부채를 기록했고, 결국 2008년 12월 챕터 11 파산 보호를 신청한 후 2009년 7월에 팀을 8억 4500만 달러로 리케츠 가문에 매각했다.

사실 20세기 이후 팀 이름을 컵스로 변경한 이후 107년동안 가을야구는 단 16번. 뭐 19세기 포함해봤자 18번이다.[31] 어떤 팀은 우승만 27번인데, 그야말로 억하심정이었다. 하지만 의외로 근 반세기를 넘게 삽질을 해왔고 근 60년동안 승률 5할을 넘어본 해가 25%정도 밖에 안되는데도 통산 성적은 5할을 넘는다. 아니 승률 5할에서 500승 정도 더 했다. 앞으로 3년동안 시즌 전패를 해도 통산 승률이 5할을 넘는다. 충격과 공포.

6.2. 2010 시즌

2010 시즌에 앞서 시애틀 매리너스의 카를로스 실바와 브래들리를 트레이드시켰다. 서로가 골칫거리로 안고 있었던 선수들이라 결과가 주목됐는데...컵스의 완승. 실바는 선발 로테이션에 훌륭히 융화되어 좋은 모습을 보였지만[32] 반면에 브래들리는...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알폰소 소리아노와 유격수 스탈린 카스트로와 포수 지오바니 소토 또한 자기 몫을 해줬다.[33] 불펜진의 경우에는 그냥 그런 수준.

다만 선발진이 확실치 않았다는게 문제. 뎀스터와 랜디 웰스는 좋은 모습을 보였지만 고즐라니와 릴리등은 뭔가 부족한 상황. 릴리는 결국 LA 다저스로 트레이드되었다. 페이롤이 다섯 손가락 내에 드는 팀이지만 그에 맞는 성적을 거두지 못하고 있는 문제는 바로 선발진, 그리고 클린업에 책임이 있었다. 아라미스 라미레즈와 데릭 리의 이 시즌 성적을 보면 처참할 수준. 결국 데릭 리는 애틀란타 브레이브스로 트레이드됐지만 거기서도 성적이 신통치 않았다.

게다가 팜에는 브렛 잭슨과 카스트로, 그리고 이학주를 제외하면 이렇다 할 선수도 없었다. 게다가 이학주도 탬파로 트레이드...

6.3. 2011 시즌

2011년에도 어김없이 휴스턴 애스트로스에 이어 밑에서 2위를 했다. 이학주, 크리스 아처 등의 특급 유망주들을 퍼주며 데려온 맷 가르자는 3.32라는 준수한 ERA를 찍고도 10승 10패로 겨우 5할 승률을 맞추며 시즌 내내 승운이 따라주지 않았고, 카를로스 잠브라노 애틀란타 브레이브스 원정에서 바비 콕스 감독 영구결번식 날에 치퍼 존스에게 빈볼을 던지고 퇴장당하며 짐싸서 튀어버리는 등 팀 케미스트리를 매우 뒤집어놓았다.[34] 카를로스 마몰 역시 특급 마무리의 위용은 어디 갔는지 클로저 주제에 4.01이라는 충격적인 ERA를 찍었고, 타자 친화 구장인 리글리 필드를 연고로 하는 팀이 정작 팀 내 규정타석 채운 OPS 8할 타자가 카를로스 페냐[35], 아라미스 라미레즈 둘밖에 없는 작태를 보여줬다.( 스탈린 카스트로는 선구안과 장타력이 떨어져서.) 투수 쪽에서 믿을 선수라고는 맷 가르자 외에는 좌완 셋업맨 션 마셜 정도.

7. 테오 엡스타인 체제와 맞은 전성기, 그리고 108년 만에 차지한 우승

7.1. 2012 시즌

2011년 10월 12일, 기존 단장이었던 짐 헨드리를 해임하고 새 단장으로 보스턴 레드삭스에서 모셔온 테오 엡스타인과 5년 $20M 계약을 맺었다는 뉴스가 올라왔다. 과연 밤비노의 저주를 푼 엡스타인이 염소의 저주마저 풀어낼 수 있을런지 기대를 모았지만 알고보니 엡스타인의 직무는 단장이 아니라 사장이었다. 새 감독으로는 레전드 라인 샌드버그나 같이 보삭스에서 물러난 테리 프랑코나, 마이크 매시니[36] 등이 언급되었으나 최종적으로 밀워키 브루어스의 코치였던 데일 스웨임(Dale Sveum)이 선임되었다.

진짜 단장은 샌디에이고 파드리스에서 단장을 하던 제드 호이어인데, 이는 사실상 엡스타인이 자기가 쉽게 부려먹을 수 있는 부하를 데려온거라 엡스타인이 상왕 노릇을 하는 꼴이란 평이 많다.[37]

그리고 엡스타인은 오자마자 마이애미 말린스 카를로스 잠브라노를 보내버리는데 성공하며 팬들의 환호를 이끌어냈다.



야빠들의 눈물샘을 자극하는 MLB 12 The Show의 광고 였지만 4년 뒤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7월의 시즌 중반 트레이드 데드라인에서는 테오의 역량이 잘 드러나지 않음은 물론 전체적으로 꼬여가는 모양새가 나왔다. 라이언 뎀스터를 컵스 입장에서 랜달 델가도 등이 포함된 패키지로서 좋은 조건으로 애틀랜타 브레이브스로 트레이드하려다가 거부권이 행사될 기세였다. 결국 가자는 잔류하였고 뎀스터는 텍사스 레인저스로 트레이드되었다. 컵스도 대가를 제법 받긴 했지만 브레이브스의 조건이 좋아 이래저래 아쉬운 부분이었다.[38]

2012 시즌은 46년만의 최악의 성적인 61승 101패를 기록하며 시즌을 끝냈다.

전반적으로 타선, 투수진 다 막장이었다. 공격 쪽을 보면 리그 최악의 타선이었다. 홈런을 못 치는데(팀 홈런 12위), 그렇다고 똑딱질을 잘 하는 것도 아니고 눈야구를 하는 것도 아니어서 출루율도 개판.(전부 15위)

선수들을 보면 스탈린 카스트로, 알폰소 소리아노, 브라이언 라헤어뿐이라고 보면 된다. 그 외에는 6월부터 들어와 87경기를 뛰고 타율 .285, 홈런 15개, 타점 48점, 출루율 .342, 장타율 .463의 성적으로 대박 활약을 해준 앤서니 리조 뿐이다. 카스트로는 162경기를 모두 출장했지만 30여개의 에러쇼를 선보이며 팀 수비율을 다 깎아먹었다.[39] 소리아노는 공갈포이긴 해도 30홈런-100타점을 기록했다. 하지만 저 선수 4명을 제외하면 하나같이 다들 폐급이라 타선에 힘을 기댈 수가 없었다. 2008년 내셔널 리그 신인왕이었던 지오바니 소토는 그 이후로는 정신을 못 차리다가 시즌 중반에 텍사스 레인저스로 쫓겨났고, 다윈 바니는 타율 .254, 홈런 7개, 타점 73점, 출루율 .299, 장타율 .354의 저조한 성적을 거두며(물론 GG급 수비가 있긴 하지만) 수비 전용 선수가 되었다.

타선도 못하는데 투수진도 마찬가지였다. 선발 투수 중 규정 이닝을 소화한 선수는 제프 사마자가 유일하며(174.2이닝 9승 13패 평균자책점 3.81), 그나마도 174.2이닝에 그쳐서 컵스에서는 1선발급 투수가 단 1명도 없었다.

그나마 7월에 텍사스로 트레이드된 라이언 뎀스터와 애틀란타로 트레이드된 폴 마홈은 제법 좋은 성적을 거둬주고 갔으나 그 외에는 없었다. 크리스 볼스태드는 정신줄을 놓았고(111.1이닝, 3승 12패, 평균자책점 6.31) 에이스 역할을 하던 맷 가자는 시즌 후반을 말아먹으며 선발진을 붕괴시켰다. 크보 삼성 라이온즈로 유학 갔다온 저스틴 저마노는 짧은 기간 동안 10패를 달성하며 유학 실패를 인증했으며, 트래비스 우드는 신시내티 레즈에서 던졌던 2011 시즌보다는 나아졌지만(156.0 이닝, 6승 13패, 평균자책점 4.27) 어림도 없는 성적.

불펜진은 나아지긴 했는데 2011 시즌에는 개막장이었던 게 2012년에는 그냥 막장이 된 수준이라 씨알도 안 먹힐 수준이고, 매니 코파스와 라파엘 돌시는 기대하지도 않았다지만 너무 못했다. 구멍막기 식으로 투입한 불펜진도 불만 지르니 불펜진도 리그 최악이었다.

7.2. 2013 시즌

결국 불펜부터 뜯어고치기 시작했다. 컵스는 오프시즌이 시작되자마자 카를로스 마몰을 치워버리려 시도하기도 했고[40] 일본프로야구의 두 마무리를 영입했다. 그들은 후지카와 큐지 임창용. 물론 임창용은 토미 존 서저리 때문에 8월에나 던질 수 있지만...

66승 96패 (NL 14위)
타/출/장 : .233(13)/.300(14)/.392(8), 득점 14위, 도루 13위, 홈런 2위
팀 평균자책점 4.00(12위), 선발 9위, 불펜 13위
팀 수비력 3위(팬그래프 팀 필딩 UZR 기준)
팜 유망주 랭킹 30개 팀 중 2위 (2013년 8월 1일 기준)

전반기까지 42승 51패, 지구 1위와 15게임차가 나는 지구 4위를 기록하며 2012 시즌과 별 다를 바없는 행보를 이어갔다. 휴스턴 애스트로스가 아메리칸 리그로 옮겨가면서 자연스럽게 NL 중부지구의 동네북으로 등극했다. 그리고 더욱 암울한 사실은 컵스를 뺀 나머지 팀들이 적어도 와일드 카드 정도는 노릴 수 있는 전력을 갖췄다는 것이다. 그래도 휴스턴 대신 밀워키가 동네북 친구로 합류하면서 외롭지는 않다.

그렇게 우울한 시즌 초반을 보내던 중, 엡스타인과 호이어가 보스턴 레드삭스 시절부터 공들여 키워오고 아드리안 곤잘레스 트레이드로 잃었음에도 기어이 컵스로 데려온 앤서니 리조를 7년 4100만불, 최대 9년 7300만불(클럽 옵션 2년과 각종 보너스 포함)의 장기계약으로 묶었다. 2013년 1월 기준으로 리조는 서비스타임이 1년이 채 되지 않았으므로 커버하는 FA 기간 자체는 1~3년밖에 되지 않지만 컵스에서 .850 전후의 OPS를 기록해줄 수 있는 몇 안되는 타자를 싼 가격에 최대 31세 시즌까지 묶었다는 것은 컵스 프런트가 칭찬받아 마땅하다.

그리고 6월 26일, 카를로스 마몰을 지명할당 처리했다. 2012 시즌과 2013 시즌 들어서 방출당해도 될 정도로 무척 못 하긴 했지만 2006년에 선발로 데뷔한 이래 팀에서 좋든, 나쁘든 활약을 해준 것도 있고 해서 안타까워 하는 팬들도 있었다. 이렇게 폭삭 망한 데에는 팀에서 너무 혹사를 시킨 것도 있으니. 지명할당된 마몰은 LA 다저스에서 클레임을 걸어 맷 게리어와 트레이드되었다. 이어 7월 2일에는 스캇 펠드먼과 스티브 클레벵거를 볼티모어 오리올스로 보내고 제이크 아리에타, 페드로 스트롭을 데려왔다. 그리고 선발투수 매물 중 핫한 선수였던 맷 가자 텍사스 레인저스로 보내고 마이크 올트, 칼 에드워즈 주니어, 저스틴 그림 등을 받아오는 트레이드를 성사시켰다.[41] 그리고 7월 25일에는 알폰소 소리아노를 처분하는데 성공했다. 상대는 뉴욕 양키스.

7월달에는 의도치 않게 고추가루를 내셔널리그 서부지그 팀들에게 뿌려주며 내셔널리그를 더욱 혼돈으로 만들었다. 특히 7월 23일부터 26일까지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와의 경기에서는 애리조나를 상대로 2승 2패를 거둬 다저스에게 쫓기던 애리조나가 결국 지구 2위로 내려오며 꼬이게 만들게 하더니만 7월 27일부터 29일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와의 3연전에서는 샌프를 아예 스윕해버려 더욱 상황이 급한 샌프에게 제대로 고추가루를 투척했다.

그런데 8월 1일부터 4일까지 홈에서 상대한 LA 다저스에게는 4승을 헌납하면서 다저스가 계속 지구 1위를 유지할 수 있게 호구잡혔다. 다저스는 컵스를 스윕하여 원정 14연승으로 팀의 원정 최다연승 기록을 갱신했고, 류현진은 컵스를 상대로 한국인 투수 최초로 데뷔 첫해 메이저리그 두 자리 승수를 달성하였다. 공교롭게도 류현진은 작년 포스팅 시스템 때 컵스가 포스팅을 시도했던 선수라는 걸 생각하면 컵스 입장에서는 씁쓸한 노릇.

한편으로 컵스 언론은 컵스가 임창용이 올라올 자리를 비워둬야 한다고 직접적으로 언급했다. 9월 4일 40인 로스터에 임창용이 등록되었다. 컵스는 9월 들어 여러 마이너 선수들을 시험하면서 투수진을 운용하였고 임창용은 총 5이닝을 던졌다. 경기 내용은 임창용 항목 참조. 참고로 이때 지명할당된 선수가 훗날 두산의 우승에 큰 공을 세운 판타스틱 4의 멤버 마이클 보우덴이었다.

시즌을 정리하면, 의외로 선발진은 그렇게까지 나쁘지 않았다. 평균자책점은 15개 팀 중 10위, 이닝소화는 5위다. 에드윈 잭슨은 별 볼 일 없지만 제프 사마자와 트래비스 우드은 아무튼 로테이션을 지켜주며 큰 힘이 되었고, 맷 가자와 스캇 펠드먼이 전반기에 활약하며 트레이드 대가로 쏠쏠한 선수들을 받았다. 하지만 딱히 돋보이는 선수가 없다는 것은 문제점. 평균자책점이 3.11인 트래비스 우드는 FIP가 3.89이고 이 FIP는 그의 커리어 평균 FIP와 큰 차이가 없다. 즉, 2013년은 운이 좋은 플루크 성적일 가능성이 높다는 이야기다. 그 외 제프 사마자는 ERA 4.34 FIP 3.77 을 찍었다. 우드보다도 좋은 FIP와 ERA 간의 괴리를 보면 알겠지만 운이 없던 시즌이기도 한데, FIP 3.77도 자랑할 만한 성적은 아니다.

반면 불펜은 심각하게 무너졌다. 2% 부족하지만 마무리 자리를 지켜주던 카를로스 마몰이 무너졌고 일본에서 데려온 후지카와 큐지는 한 달간 삽질 끝에 토미 존 서저리 크리. 작년에 잘해주던 숀 캠프까지 7점대 평균자책점을 찍으면서 4월 내내 불을 질렀다. 그러다가 노장 케빈 그렉이 마무리를 맡고 제임스 러셀과 블레이크 파커가 활약하면서 그럭저럭 진정되었지만 여전히 향후 불펜 운용에는 물음표가 붙었다.

제일 큰 문제는 타선이었다. 선발진이 에이스 없이 중간은 찍었다면 타선은 중심타자도 없고 아무것도 없는 수준. 장기계약을 맺은 젊은 선수 앤서니 리조 스탈린 카스트로가 중심을 잡아줘야 하는데, 첫 풀타임 시즌을 치른 앤서니 리조의 활약이 기대에 좀 못 미친 수준이었다면, 스탈린 카스트로는 공수 모두에서 크게 퇴보하면서, 남아 있는 6년 4800만 달러의 계약이 걱정스럽기 시작했다. 그리고 수비로 제 몫을 해 주던 다윈 바니는 공격이 눈 뜨고 못 볼 수준이 되었다. 대신 포수 웰링턴 카스티요는 주전포수로 굳건하게 자리잡았고, 테오 엡스타인이 보스턴에서 하던 것처럼 새로 영입한 중저가 선수들은 대부분 좋은 시즌을 보냈다. 슈어홀츠, 데헤수스, 나바로, 도니 머피, 라이언 스위니, 발부에나 등등. 덕분에 팀 홈런은 내셔널리그 2위를 찍었다.

7.3. 2014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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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 2015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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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오 엡스타인 체제로 전환 한 이래 가장 성공적인 시즌으로 평가되며 97승 65패 .599 의 승률로 호성적을 기록, 단숨에 강팀으로 뛰어올랐다. 포스트 시즌에서 지구 내 라이벌인 피츠버그 파이리츠와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를 모두 격파했으나, 챔피언십 시리즈에서 뉴욕 메츠에게 무릎을 꿇었다.

비록 내셔널리그 챔피언십 시리즈에서 허무하게 탈락했지만 컵스팬들을 충분히 만족시켰던 시즌.

7.5. 2016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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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CHC_2016_WS_FinalOut.jpg

어니 뱅크스와 시카고 컵스 팬들이 염원한, 염소의 저주를 깨부신 108년 만의 우승

7.6. 2017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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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 2018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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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 2019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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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 2020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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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다시 찾아온 암흑기

8.1. 2021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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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 2022 시즌

후반기 기준, 의외로 내셔널 리그 중부지구 3위를 유지하고 있지만 1위인 카디널스와 15게임 넘게 차이가 나서 포스트시즌 승산은 사실상 없는 상황. 몇 안 남은 우승 멤버인 카일 헨드릭스는 부상으로 골골대다 7월을 끝으로 사실상 시즌 아웃됐고 트레이드가 유력했던 윌슨 콘트레라스는 트레이드 되지는 않았지만 OPS가 8할을 넘는 타격 성적을 기록하며 시즌 후 FA로 팀을 떠날 것이 매우 유력하다.

이 외에도 2023년까지 계약이 남은 제이슨 헤이워드를 시즌 후 방출이 미리 예고됐고 롯데 자이언츠에서 활약했던 아드리안 샘슨이 지난해에 이어서 선발 로테이션을 돌고 있다.[42]

9. 윈나우의 기로에서

9.1. 2023 시즌

컵스가 다시 달리기 시작할 것인가? 애틀랜타의 주전 유격수였던 댄스비 스완슨을 7년 $177M에 지르고 사오며 니코 호너와 키스톤 콤비를 이루게 되었고 다저스에서 논텐더로 쫒겨난 코디 벨린저를 사오며 외야 뎁스를 보강했고, 양키스에 있었던 제임슨 타이욘까지 4년 $68M을 던지고 사오면서 선발 뎁스를 보강했다. 그러나 주전 포수 윌슨 콘트레라스가 카디널스로 이적하며 얀 곰스의 역할이 중요해졌지만 그래도 터커 반하트를 데려오면서 포수 문제는 어느정도 해결되었다. 또 밀워키에서 박스버거를 280만 달러에 영입하면서 불펜을 보강했다.

컵스는 오프시즌 8명 FA에 총 3억480만 달러를 투자하며 내셔널리그 중부지구 우승을 향한 의지를 보이고 있다.

한편 팬그래프 닷컴 등에서 예측한 올 시즌 컵스의 성적은 대부분 70승 후반대의 승률을 올릴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일단 스프링캠프 첫 번째 경기에서는 지난 시즌 강력한 지구 컨텐더였던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를 10대 8로 누르며 좋은 출발을 알렸다.

5할 승률 언저리에서 계속 놀면서 윈나우에 애를 먹고 있다. 그래도 DTD로 망해버리며 셀러를 선언한 피츠버그나 세인트루이스에 비하면 그나마 사정이 좀 낫지만 밀워키와 신시내티가 지구 1위 경쟁을 펼치면서 녹록치 않은 현실이다.

8월 7일 기준 지구 1위 경쟁, 와일드카드의 경쟁자인 신시내티 레즈가 최근 10경기에서 3승 7패로 부진하며 게임차를 1로 좁히는데 성공했다.

그렇게 와일드카드를 향해 질주하나 했지만, 9월들어 분위기가 꺾이더니 결국 정규시즌을 1경기 남겨두고 아쉽게 포스트시즌 진출에 실패하였다. 정규 시즌 성적은 83승 79패로 시즌 전 예상보다 좋은 성적을 기록하였고, 3시즌만에 위닝 시즌을 달성했으나 한때 진출확률이 90%가 넘었던 것을 생각하면 2016 시즌 디트로이트 타이거스 DTD라고 해도 무방하다.

9.2. 2024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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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900년 세인트폴 세인츠라는 팀이 시카고로 연고를 옮긴 뒤, 화이트 스타킹스라는 이름을 가져가 버렸다. 이 팀이 현재의 화이트삭스. [2] 팀 로고에는 곰돌이가 들어가는것을 보면 새끼곰을 의도한 듯. 혼다 커브의 그 커브다. [3] 첫번째 우승은 1907년, 두번째 우승은 1908년 그리고 세번째 우승은 무려 108년(!!!)이 걸려서 2016년에 달성했다. [4] 이에는 이유가 있는데, 당시 홈구장이던 레이크 프론트 파크는 우익수 쪽이 매우 안쪽으로 들어온 형태였다. 그렇기 때문에 1883년 이전까지는 우익수 방향 담장을 넘긴 공을 모두 경기장 특성상 2루타 처리를 해버렸다. 그런데 1884년에 담장 넘기면 무조건 홈런이 돼버리면서 갑자기 이 곳이 타자구장이 되었다. 이 해에는 시카고 컵스에서만 무려 4명의 20홈런 타자가 나왔고, 팀홈런 수는 142개였다.(2위 버팔로의 홈런수는 고작 39개였다.) 이 부정구장(?)은 다음해 컵스가 웨스트 사이드 파크로 옮긴뒤 철거되었다. [5] 당시에는 NBA처럼 경기가 끝나면 관중들이 그라운드에 들어올 수 있었다. [6] 자이언츠의 1루수 코치가 공을 던져버린 상황이였는데 이걸 찾은 건지 아니면 다른 공을 갖고 온지는 확실치 않다. [7] 19세였던 프레드 머클은 자이언츠로부터 역적취급을 받았지만, 꿋꿋이 커리어를 이어나가며 1926년에 은퇴. 공교롭게도 컵스에서도 4년간 뛰었다. 그리고 1950년, 머클은 자이언츠의 이벤트 매치에서 나타나 뉴욕 관중들의 박수갈채를 받았다. [8] 여담으로 당시 심판이였던 Hank O'day는 2013년 배테랑 위원회를 통해 명예의 전당에 입성했다. [9] 포수출신 1루수로서 당시 선수 겸 감독을 역임하고 있었다. [10] 데드볼 시대에는 투신타병이 일상적이었고 경기수도 적었기 때문에 충분히 강타자로 볼 수 있다. [11] 이후 70년간 승률을 쭉 깎아먺었는데도 벌어놓은 것 때문에 아직도 팀 승률이 0.513이다. [12] 1938년 황혼의 홈런을 친 포수. [13] 이게 2016년 이전에 가장 마지막으로 100승을 기록한 시즌이다. [14] 26연승을 했던 뉴욕 자이언츠는 중간에 무승부가 껴 있었다. [15] 그마저도 8:0에사 8:10으로 역전당한 것이다 [16] 이때는 동부와 서부 밖에 없었다. 당시 순위대로 메츠, 카디널스, 파이러츠, 엑스포스, 컵스, 필리스의 6개팀이 동부 소속. [17] 참고로 롯데 자이언츠의 통산 승률이 4할 7푼이 넘는다. [18] 역대 최다경기 출장 포스트시즌 출장 경험이 없는 선수가 됐다.무려 2528경기..... 아마 지금과 같이 포스트시즌이 확대되는 시점에서는 영원히 깨지지 않을 불멸의 기록일듯 하다. [19] 이것도 백투백 MVP다. MVP가 팀의 성적에 영향을 받는 수상실적임에 비추어 보면 팀 성적이 좋았으면 MVP를 더 수상 할 수도 있었다. [20] 그런데 후술하겠지만 이 당시에는 포스트시즌 진출을 위해서는 6~10팀 중에 무조건 1등을 해야 했다. 즉 절반 안에만 들면 포스트시즌에 드는 KBO리그와는 확연히 다르다. 이걸 감안하면 롯데나 한화는 딱히 컵스를 놀릴 처지가 못 된다. 롯데는 당시 제도대로라면 따지면 창단 후 지금까지 정규 시즌 우승이 없으므로 포스트시즌 진출이 0회이다. 실제로 오리올스의 전신인 세인트루이스 브라운스가 창단 후 40년동안 리그 우승을 못 한 사례도 있고... 한화도 1992년 마지막 정규시즌 우승 이후로 정규시즌 1위와 정규시즌 2위를 한 적이 없기에 이 시기 메이저리그였으면 10년이 아니라 27년 연속 포스트시즌 진출 실패한 팀이 된다. [21] <시카고 트리뷴> 및 WGN-TV 운영사이다. [22] 여기부터 내셔널리그가 두 지구로 분할됐다. [23] 와일드카드제는 1995년에야 시행되었다. [24] NL 중부 2위를 차지했고, 승패가 89승 73패로 같았던 NL 서부 2위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와의 타이브레이커 경기에서 5-3으로 승리하여 와일드 카드로 진출하였다. [25] 지금도 구글의 검색란에 Steve Bartman을 기입하면 검색어 자동완성으로 Steve Bartman home address가 뜬다. 이뿐이냐? Steve Bartman where is he now 2015까지 뜬다. [26] 前 미국 대통령 조지 H. W. 부시의 아들이자 조지 W. 부시의 동생. 2016년 대선에 출마하려고 경선에 출마했지만 훗날 당선된 도널드 트럼프 등 다른 후보들에 한참 밀리고 발리면서 결국 손을 뗐다. [27] 생각해보자. 저 위의 사진을 봐도 알 수 있지만 그는 파울볼을 잡으려던 수많은 관중 중 하나일 뿐이었다. [28] 실제로 케리 우드 마크 프라이어는 2003 시즌 종료 후 베이커 감독의 혹사로 인한 부상으로 예전 모습을 못 찾는다. 다만 우드의 경우엔 원래 유리몸이었고, 프라이어는 그때는 부상위험 없는 완벽한 투구폼이라고 찬사 받았으나 이제와서 다시보니 부상위험이 매우 높은 위험한 투구폼(그 유명한 inverted-W. 이는 스티븐 스트라스버그 애덤 웨인라이트 등 여러 선수들의 토미존 서저리에서 자주 언급된다.)이라고 하는 등 베이커 탓만 해서는 안된다는 말도 있다. 그렇더라도 그의 투수 혹사 논란은 항상 있어왔다. 이후 신시내티 레즈 감독일 때는 당시 젊은 유망주 에딘슨 볼퀘즈도 시즌아웃이 된 적이 있다. [29] 심지어 접전 끝에 패배한 것도 아니고, 3차전을 제외하면 모두 큰 점수차로 졌다. 3차전도 점수차는 적었지만 경기 내내 1점도 못 내다가 8회에 1점 달랑 내고 졌다. 그렇게 NLCS에 올라간 다저스는 92승 70패의 필라델피아 필리스에게 1승 4패로 힘없이 탈락했다. [30] 2008년 디비전 시리즈 2차전에서 그나마 팀내 외야수 중에서 가장 성적이 좋은 좌타자라는 이유로 두경기 연속 선발로 기용했으나 실망스러운 삽질만 보여준 후쿠도메에 대해서 기자들이 질문을 하자 루 피녤라는 "두번 다시 그 이름은 듣고싶지 않다. 내일 경기에서 선발로 나올 일은 없을 것"이라고 단칼에 잘라버렸다.(여기서 말한 내일 경기는 디비전 시리즈 마지막 경기. 참고로 그 경기 선발로 예정된 상대팀 투수는 우완이며 후쿠도메가 10년 가까이 상대하면서 서로에 대해서 익숙하게 파악하고 있는 구로다 히로키였다.) [31] 물론 전술했듯이 이전에는 가을야구=리그 우승이었다. KBO리그하고 같이 생각하면 안 된다. [32] 도중에 한 달 부상을 당했고 가끔씩 1이닝 강판 당하는 부실한 피칭으로 인해 시즌 성적은 그리 좋지 않지만 그래도 나쁜 편은 아니다. [33] 다만 카스트로의 경우에는 수비가 많이 불안하다. [34] 결국 연봉지급 정지 처분이 내려지는 팀내 징계선수 명단에 등재되었다. [35] 1루 수비도 골드글러브 급이고 공갈포 성향이 있어도 생산력은 매우 좋은 편이지만 컵스 팬들은 2011년 내내 2011년 이후 FA로 풀리는 푸잉여의 컵스 5번 유니폼을 맞춰 입고 다녔다. 심지어 리글리 필드에 왔을때 철천지 원쑤 카즈 선수임에도 환호를 보내기도 했다. [36] 그런데 친정팀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 갔다. [37] 호이어는 레드삭스 시절 테오 엡스타인이 잠시 래리 루치노 사장과 티격태격하다가 빡쳐서 때려친 적이 있을 때 임시 단장을 맡았는데, 그 사이 핸리 라미레즈 아니발 산체스를 내주고 마이크 로웰 조시 베켓을 받아오는 트레이드를 성사시키기도 했다. 과거 커트 실링 트레이드를 성사시키는데 있어 큰 공헌을 하기도 한 인물이다. [38] 그러나 트레이드 당시 내셔널 리그 평균자책점 1위를 차지하던 뎀스터는 텍사스 가서는 Damn을 외치게 만드는 활약을 하며 텍사스에게 타격을 입히고 트레이드 실패를 인증해버렸다. 트레이드 전 5승 5패 2.25, 트레이드 후 7승 3패 5.09. 여기에 카일 헨드릭스가 2014 시즌 말 컵스 선발진에 합류해서 터질 조짐을 보이더니, 2016년 시즌 2.11로 방어율타이틀을 따내며 컵스의 우승에 일조란다. 세상만사 새옹지마, 완벽한 스틸. [39] 다만 세이버메트릭스 수비지표인 UZR가 전년도에 비해 향상되었고 DRS 지표는 +를 찍었음에 위안을 삼을 수 있겠다. 하지만 그래도 수비를 너무 못해서 타격 성적이 낮은 바니한테도 WAR에서 밀렸다. [40] LA 에인절스에서 옵션 실행 여부가 불투명하던 댄 해런과 맞바꿔서 해런을 1년간 쓰려고 했다. [41] 맷 가자의 컵스 성적은 6승 1패 3.17, 텍사스 성적은 4승 5패 4.38. 게다가 내준 유망주도 2012년 뎀스터 때보다 훨씬 좋은 수준으로, 반년 렌탈 치고는 꽤 많았다. LA 다저스 리키 놀라스코를 저렴하게 데려온 것에 비하면 사기 수준. 그리고 2016년 기점으로 저스틴 그림과 칼 에드워즈 주니어가 불펜의 핵심으로 자리를 잡으면서 이 트레이드는 결과적으로 신의 한 수가 되었다. [42] 다만, 우여곡절이 많았는데, 트리플 A인 아이오와 컵스에서 뛰던 중 5월 초에 웨이버 방출 → 시애틀이 영입했지만 5월 말에 지명할당 형식으로 방출 → 6월 1일에 다시 컵스와 계약 → 6월 중순에 콜업 이후 선발 로테이션 안착이라는 2달 사이에 이래저래 고생을 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