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3-02-17 22:01:06

시문용

1. 개요2. 행적

1. 개요

시문용(施文用, 1572년 ~ 1623년)은  명나라 병부시랑을 지낸 시윤제의 아들로,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 행영중군으로 참전했던 무장이다.

2. 행적

그는 전쟁이 끝난 후 부상으로 인해 명나라로 귀국하지 않고 경상도 성주에 정착하였다.[1] 시문용이 조선에 정착하면서 국내 절강 시씨의 중시조가 되었다. 정인홍과 친분이 있었기 때문에 정인홍의 주선으로 사촌 누이인 합천군의 장함의 딸과 혼인하여 자식들을 두었다. 인조반정 이후에 쓰여진 선조수정실록에 따르면 전 의금부 도사 양홍주가 조카를 억지로 외국인에게 시집보냈다고 정인홍을 탄핵하기도 했다. 반면 선조실록에는 정인홍이 강제로 시집을 보낸 것은 황당한 무고라고 반박하면서 그저 정인홍이 절강사람들을 동향인으로 잘 대우한 것일 뿐이며, 장함의 일가붙이가 멀쩡히 살아있는데 강제 결혼이 웬말이냐고 반박하는 의령진사 오여온의 상소가 수록되어 있다.

시문용은 땅을 잘 보는 것으로 천거되어 선조로부터 첨지중추부사에 제수되었다. 풍수지리에 능했기 때문에 광해군이 큰 관심을 보여 성주에 살고 있던 그를 한양으로 자주 불러 의견을 물었다. 이후 광해군의 총애를 받으며 개혁정책에 참여하였으며, 조선의 군사전술에 많은 조언을 하였다. 하지만 광해군 일기에 인조반정 이후에 풍수지리로 백성들을 괴롭힌 죄로 처형당한 것으로 기록되고 있다. 그러나 임진왜란 때 공을 세운 것이 인정되어 영조 때 복권, 병조참판에 추증되었으며 정조 때 그 후손들을 천역에서 면제하도록 하였다.

하지만 후손들은 시문용이 죽지 않고 성주로 돌아와 저술활동을 하여 병학기정, 감여지남, 의복묘결 등을 저술하였고 1654년에 천수를 누리다 생을 마감하였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

시문용의 후손 절강 시씨들은 서학의 후손 절강 서씨들과 함께 성주군 용암면 대명마을에 거주하고 있었으나 절강 시씨들은 경상북도 성주군 수륜면 보월리 맏질마을, 경상북도 고령군 운수면 화암리 꽃질마을로 거주지를 옮겨가면서 현재 대명마을에는 절강 서씨들만 거주하고 있다.[2] 현재 성주군 용암면 대명마을에는 두 장수가 고국 명나라를 기리기 위해 매달 초하루에 사배를 올린 재단인 대명단이 남아 있으며 두 장수를 추모하기 위해 1834년(순조 34) 유림에서 건립한 풍천채도 남아 있다.


[1] 이때 고국으로 돌아가지 않고 함께 조선에 남은 인물이 친구인 서학이다. 서학 역시 성주에 정착하여 국내 절강 서씨의 중시조가 되었다. [2] 대명(大明)이라는 마을 이름이 이들의 고향인 명나라를 뜻하는 이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