綏東事變 |
Suiyuan Incident |
수동사변 전개도 |
1. 개요
1936년 8월~12월, 관동군이 데므치그돈로브와 손을 잡고 수원성을 침탈하려다가 수원성 주석 겸 35군 군장 푸쭤이의 반격으로 오히려 크게 패한 사건이다. 중국에서는 수원항전이라 부르며 수원 사건( 쑤이위안 사건), 바이링먀오 전투( 백령묘 전투)라고도 한다.2. 배경
데므치그돈로브와 이수신 |
1931년 만주사변 발생 이후 정부의 명령도 씹고 날뛴 이시와라 간지를 비롯한 장교들이 처벌은 커녕 승진하는 것을 본 일본군 내부에서는 한바탕 공을 세워 출세해보자 하는 야심에 물든 장교들이 넘쳐나고 있었다. 때마침 일본 제국은 수원과 차하얼 등 중화민국의 화북지역을 탐내고 있었는데 제1차 상하이 사변을 배후조종했던 관동군 정보과장 다나카 류키치 중좌를 비롯한 관동군 고급장교들은 내몽골 분리주의자 데므치그돈로브를 포섭하여 몽골 왕공들을 규합해 이들을 무장시켜 내몽골군을 조직했다. 이들로 하여금 소요를 일으켜 내몽골의 분리독립을 꾀하려는 것이 이들의 목표였다. 물론 분리독립된 내몽골은 일본 제국의 괴뢰국으로 삼는 것이 최종목표였다.
1933년 8월, 관동군은 홍군 출신의 몽골인 이수신에게 그의 부대를 열하에서 차하얼으로 침입시켜 찰동특별자치구를 조직, 이수신을 행정장관 겸 군장으로 삼았고 10월에 백령묘에서 내몽자치정부를 발족시켰다. 한편 내몽골에서 가장 영향력있던 왕공이었던 데므치그돈로브는 1932년부터 장제스와의 동맹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국민정부로부터 내몽골의 고도의 자치를 약속받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1933년 7월, 덕왕은 1차 자치회의를 백령묘에서 개최했으며 이때 일본은 덕왕에게 돕겠다는 의사를 타진했다. 일본과 내몽골을 두고 경쟁하게 생긴 국민정부는 한발 물러나 차하얼과 수원에 몽골인들이 자치구를 만드는 것에 동의하고 1934년 4월 24일 허잉친을 지도장관으로, 조대문을 부장관으로 삼아 운왕, 데므치그돈로브 등 24인을 정무위원으로 하는 몽고지방자치정무위원회, 약칭 몽정회를 발족시켰다. 덕왕은 몽정회의 유지를 위해 장제스에게 자금 지원을 요청하였으나 국민정부도 살림이 빠듯한지라 장제스는 돈을 보내주긴 했는데 보내주는 양이 시원찮았다.
설상가상으로 1934년 8월, 덕왕의 측근 한풍림이 베이핑에서 한간으로 몰려 처형당하는 사건이 발생했고 이 와중에 일본은 덕왕의 휘하의 청년의 일본 유학을 주선하고 덕왕에게 뇌물과 무기를 전달하는 등 덕왕의 환심을 사기 위해 열심이었다. 덕왕이 국민정부에 기대를 저버렸다는 것을 알게 된 관동군 참모부장 이타가키 세이시로와 다나카는 1935년 10월 데므치그돈로브를 몽정회에서 탈퇴시키고 12월에 이수신에게 차하얼성 보창을 습격하게 하고 고원, 장북, 상도 등 6개 현을 점령하게 했다. 이에 국민정부는 1936년 3월 수원성에 지방자치 정무위원회를 발족시켜 몽골왕족들을 결속시키고자 했다. 일본은 5월 2일, 데므치그돈로브를 주석으로, 이수신을 부주석으로 하는 내몽골정부를 화덕에 설치하였고 산하에 흥아연합군단 2만명을 두었다. 다나카 류키치는 내몽골 특무기관장에 임명되어 수원성에서 소요를 일으킬 준비를 하였다.
3. 전개
3.1. 기습한 몽골군의 패주
그러던 중 1936년 8월, 내몽골군이 백령묘에 집결하여 대량의 물자를 들인다는 첩보가 들어오자 국민정부는 수원성 정부주석 겸 35군장 푸쭤이에게 전보를 방비 강화를 지시했다.- 1. 장북현 일대에는 잡군이 5천명 정도 있고, 또한 이수신이 수동에 진격할 준비를 갖추고 있다. 그 전략은 먼저 편의대 및 지방의 불량배로 조직된 폭력대로 하여금 각지 관청을 점거시키고, 주둔군을 습격하는 것이다. 그 결과를 관망하여 다시 정식부대를 진격시킬 것을 계획하고 있다.
- 2. 북덕위 군정부는 북덕성 동남의 비행장을 확대하여 비행기 200대를 받아들일 준비를 하도록 발령했다.
- 3. 데므치그돈로브, 이수신, 탁세해 등은 7월 13일 장춘으로 가 몽골군과 몽골기병 3천명을 편제, 그 편제비는 관동군이 지급할 것을 결정했다. 비용은 수령 즉시 각지에 사람을 파견, 말 5천두를 사들이도록 하고 있다.
과연 11월 14일, 이수신, 왕영 등이 지휘하는 기병과 보병을 합쳐 2천명의 내몽골군이 스스로를 대한의군(大漢義軍)이라 칭하고 국민정부의 타도를 선언, 비행기 8대, 산포, 야포 10여문을 이끌고 도림과 홍격이도를 공격했다. 중국군을 얕보고 있던 일본 측은 중국군이 금방 패퇴할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11월 15일 밤, 폭설이 쏟아지는 혹한 속에서 푸쭤이는 즉각 1개 사단을 출동시켜 몽골군에게 결연히 맞섰다. 관동군이 비행기를 동원해 지원했음에도 몽골군은 순식간에 패퇴해 11월 18일에는 모두 백령묘로 도주했다. 이에 중국 전체가 오랜만의 승리에 흥분하여 열광하였고 각 언론은 몽골군 격퇴에 대해서 보도를 쏟아내었다. 11월 17일 국민정부는 담화를 발표하여 '중일교섭이 진전하느냐 마느냐는 일본 측의 태도에 달려있다'고 발표했고 장제스가 직접 뤄양에서 타이위안을 방문, 옌시산과 회담하여 화북 통제를 강화했다. 11월 18일, 외교부 아주사장 고종무는 주중 일본대사 가와고에 시게루에게 수원성에 대한 일본 측의 공작이 계속되는 동안은 중일교섭이 이루어질 수 없다고 항의하며 방공에 대한 중일교섭을 연기하겠다고 통보했다. 11월 19일에 장제스는 제남에서 한푸쥐와 회담했다.
11월 21일 일본 외상 아리타는 수동사변과 일본이 관련없다는 외무성 담화를 발표했다.
"수동의 전투는 단순한 중국 국내의 사건으로 일본과는 관련이 없다. 임시로 일본인이 내몽골군에 강비해 있다 하더라도 이는 개인적인 행위로 보아야 마땅하며, 일본 정부 및 일본군과는 조금도 관계가 없다."
3.2. 백령묘 점령
항일에 소극적이라는 비난을 듣고 있던 장제스 정부는 수동사변을 선전에 내세우기 위해 즉각 통제에 들어갔다. 장제스는 푸쭤이를 수원성 동부 전선지휘로 삼고 옌시산으로 하여금 타이위안에 서북변방군사위원회를 설치, 천청에게 총지휘를 맡겼다. 또한 탕언보를 비롯한 중앙군 20만을 동원, 뤄양에 집결시켜 푸쭤이의 후방 지원부대로 동원했는데 장쉐량의 동북군은 배제되어 동북군은 이에 큰 불만을 품었다고 한다.11월 20일~11월 24일에 걸쳐 몽골군은 300명의 전사자와 300명의 포로를 내면서 패주했다. 11월 23일 심야, 푸쭤이 산하의 산서군이 장갑차를 앞세우고 백령묘를 공격했다. 몽골군은 저항도 하지 않고 도주했고 일본군 특무기관원들도 달아났다. 24일에 백령묘가 함락되었고 중국군은 대포, 소총 등 몽골군이 버린 많은 물자를 노획했다. 하지만 푸쭤이는 진토 협정을 어기는 수준의 진군은 삼갔다.
이에 중국 전체에서는 곧 중국군이 진격해 차하얼과 열하를 탈환할 것이라는 소문이 돌았고 전국 각계에서 수원을 원조하자는 의연금 모집 운동이 벌어졌다. 고무된 국민정부 중앙정치회의와 행정원 내부에서도 중일교섭은 자연스럽게 소멸된 것이라는 대일 강경론이 득세했다. 게다가 11월 21일 수동사변과 일본의 연관성을 부인한 외무성 담화와 달리 11월 24일 뉴욕 타임스는 일본 육군무관 기타 세이치로부터 관동군이 내몽골군을 원조하고 있다는 언질을 받아내어 대대적으로 보도하면서 일본은 더욱 망신을 당했다.
이러한 승리는 전 국민을 기쁨과 흥분 속에 몰아넣었다. 전력을 다해 국가에 헌납하자는 헌금운동이 각지에서 일어났다. 우리 군의 백령묘 수복에 의해 관동군이 음모하고 있던 대원제국 또한 실패로 돌아갔다. 그들이 이 조직에 투입한 금액은 5천여만원이 넘었으며, 이토록 힘을 쏟은 것은 백령묘를 수복 유일의 군사, 교통의 근거지로 삼기 위해서였다. 이를 위해 계속 베이핑, 톈진에서 대량의 석탄과 밀가루를 사들여 백령묘까지 날랐다. 모든 연료와 식량도 백령묘 수복에 의해 모두 우리 손에 들어왔다. |
1936년 11월 뤄양 군관학교에서의 보고 |
3.3. 관동군의 반격과 패주
다나카 류키치는 근성 있게도 12월 3일, 금갑산이 지휘하는 4천명의 내몽골군을 동원해 백령묘 탈환을 시도했으나 추위 속에서 사기가 떨어져 있던 몽골군은 수원 기병대의 반격에 패주했고 패잔병들은 일본군 고문 고하마 대좌를 살해한 후 중국군에 투항했다. 일련의 전투에서 총 7천명의 몽골군이 사상하였으며 몽골군은 수원성에서 완전히 축출되었다. 이에 마오쩌둥과 주더도 '항일하여 거듭 승리를 이룩한 것을 축하함'이라는 성원 전보를 보냈다.한편 이시와라 간지 소장은 관동군의 폭주를 저지하기 위해 급히 파견되어 관동군을 만류하려 했으나 무토 아키라 대좌는 "우리는 각하께서 하신 일을 따라할 뿐입니다."라고 말했고 주변의 장교들은 모두 폭소하며 이시와라를 비웃었다. 이를 두고 이마무라 히토시는 "인과는 돌아가는 물레방아와 같다"로 평가했다.
4. 결과
오랜만의 승리로 중국인들은 크게 고무되었고 일본군은 중국의 실력이 생각보다 강력함을 인지하고 긴장하게 되었다. 이 사건으로 국민정부는 어느 정도 신뢰를 회복하였으나 좋게만 돌아간 것은 아니라서 국민정부로 하여금 선안내 후양외 정책을 포기하고 일치항일에 나설 것을 요구하는 여론이 비등해지는 효과 역시 낳은 것이다.결국 11월 23일 수동사변을 내전 정지, 일치 항일을 주장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겠다는 장제스의 의도에 따라 선쥔루, 장나이치, 쩌우타오펀, 왕자오스, 리궁푸, 샤첸리, 스량 등이 위해민국 긴급치죄법에 의거, 비합법단체를 조직하여 적비와 결탁, 파업, 동맹휴교, 불매 동맹을 선동한 혐의로 체포되는 7군자 체포 사건이 벌어졌으며 이는 항일여론에 기름을 부어 12월 12일 서안 사건이 발생하게 된다.
5. 참고문헌
- 가토 요코, 일본 근현대사 시리즈 5권: 만주사변에서 중일전쟁으로(서울: 어문학사, 2012).
- 권성욱, 중일 전쟁 : 용, 사무라이를 꺾다 1928~1945(서울: 미지북스, 2015).
- 나가노 히로무, 서안사변(서울: 일월서각, 1982).
- 서문당 편집실, 다큐멘터리 중국 현대사 3권(고양: 서문당, 2014).
- 신승하, 중화민국과 공산혁명(서울: 대명출판사, 2004).
- 이시카와 요시히로, 중국 근현대사 3권 혁명과 내셔널리즘 1925~1945(서울: 삼천리, 2013).
- 중국공산당중앙당사연구실, 중국 공산당 역사 1권 상(서울: 서교출판사, 2016).
- 김선호, 「1930년대 내몽골 "德王"(Demchukdonggrub)의 初期自治運動과 외교전략 分析」, 『國際問題論叢』 15(2004).
6. 관련문서
- 제1차 초공작전(1930.12.19~1931.1.3)
- 탕산 사건(1931.2.28)
- 제2차 초공작전(1931.4.1~1931.5.31)
- 1차 양광사변(1931.5.27~1932.1.1)
- 나카무라 사건(1931.6.27)
- 만보산 사건(1931.7.1)
- 제3차 초공작전(1931.7.1~1931.9.20)
- 류탸오후 사건(1931.9.18)
- 만주사변(1931.9.18~1932.3.1)
- 3차 장왕합작(1932.1)
- 마옥산 사건(1932.1.18)
- 제1차 상하이 사변(1932.1.28~1932.5.5)
- 송호정전협정(1932.5.5)
- 제4차 초공작전(1932~1933)
- 열하사변(1933)
- 당고정전협정(1933.5.31)
- 폐량개원(1933.4.5)
- 제5차 초공작전(1933.10.16~1934.11.10)
- 복건사변(1933.11.20)
- 대장정(1934~1935)
- 하북 사건(1935.5.2~1935.5.24)
- 장북 사건(1935.6.5)
- 하매 협정(1935.6.10)
- 돈목방교령(1935.6.10)
- 진토 협정(1935.6.27)
- 타다 성명(1935.9.24)
- 히로타 3원칙(1935.10.4)
- 왕징웨이 저격 사건(1935.11.1)
- 법폐개혁(1935.11.4)
- 중미은협정(1935.11.13)
- 기동사변(1935.11.25)
- 12.9 운동(1935.12.9)
- 동정항일(1936)
- 2차 양광사변(1936.6.1)
- 7군자 체포 사건(1936.11.23)
- 서안 사건(1936.12.12)
- 루거우차오 사건(1937.7.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