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4-07 21:05:13

송응창


<colbgcolor=#F0C420><colcolor=#ffffff> 송응창
宋應昌
이름 송응창(宋應昌)
사문(思文)
동강(桐崗)
출생 1536년
대명 절강성 항주부 인화현
사망 1606년 (향년 70세)
대명 절강성 항주부 인화현
국적 파일:명나라 보.svg 대명

1. 개요2. 생애3. 여담4. 대중매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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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중국 명나라 말기의 관리.

2. 생애

인화(항주, 항저우) 출신으로 1565년 명나라 과거 최종시험에 합격한 진사 출신으로 등용되었으며, 강주지주(絳州知州)에 임몀되었다. 형부원외랑(刑部員外郎)에서 호과급사중(戶科給事中), 형과우급사중(刑科右給事中), 예과좌급사중(禮科左給事中)까지 2년간 탄탄대로를 걸었으나, 모종의 이유로 파직되었다 3년만에 다시 예과좌급사중에 복직한다.

이 이후론, 지방직을 돌며 산동(山東) 제남부지부(濟南府知府)에서 산서부사(山西副使), 하남부사(河南副使), 하남좌참정(河南左參政)에서 산동안찰사(山東按察使), 강서포정사(江西布政司) 우포정사(右布政使)로 승진되었다. 이후 복건포정사(福建布政司) 좌포정사(左布政使)에서 도찰원우부도어사(都察院右副都御史) 산동순무(山東巡撫)로 올라갔다. 이 지역들은 명나라에게 중요한 지역이었던 만큼 한직이라 볼 수 없다.

산동순무를 맡은지 3년만에, 대리시경(大理寺卿)으로 임명되며 다시 중앙정계에 진출했다. 공부우시랑(工部右侍郎)으로 또 승진했고, 병부우시랑이란 관직을 수행하게 된다. 여러 고위직을 두루 거치며 관리로서의 수완을 인정받았고, 지방직에서도 행정 처리를 잘한다는 평을 받았다.

2.1. 임진왜란

1592년에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정 3품 병부우시랑[1]겸 경략비왜군무(兵部右侍郎經略備倭軍務)로 임명되어 사실상 조선 파병 명군의 최고 사령관이 되었으며, 조선을 도우라는 명령을 받는다. 그리고 사실상 임진왜란 초기 조선 내 최고 실력자로 군림한다.

그는 1592년 12월 내내 조선에 파견될 명군과 보급 및 물자를 점검하였으며, 이여송이 이끄는 요동군을 주축으로 한 42,000명의 명군을 조직하여 조선에 파견한다. 임진왜란 직전 터진 영하 반란으로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단기간에 대병력을 편성하여 신속하게 전개한 데엔 송응창의 관리 수완이 한 몫 했으며, 결과적으로 조명 연합군이 반격의 발판을 마련하는데 큰 도움을 주었다. 특히 명군 병사들이 조선인들에게 행패를 부리자 이를 항의하는 조선의 관리들과 장수들에게 사과하고 명나라 장수들에게 조선인들을 대상으로 대민약탈, 부녀자 강간, 조선인 살해를 저지르는 병사들을 참수형에 처하라고 지시할 정도로 군의 기강을 바로잡는데 애를 썼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명나라에 사은사로 온 정철이 삼도를 수복했다는 문서만 올리게 하였고, 조선이 아직 위급하다는 문서를 올리는 것을 저지하여 들여보내지 않으면서 일본군이 조선에 없다며 거짓을 꾸며냈다가 진실이 들통나자 정철에게 자신의 죄를 뒤짚어 씌웠고 조선 조정이 일본과의 강화 협상을 반대하기 위해 황진을 명나라로 사신을 보내는 것을 방해하기도 하였다.https://sillok.history.go.kr/id/kna_12701020_002

명의 심유경과 일본의 고니시 유키나가가 평화 협상을 시작하자 이에 미온적인 반응을 보이다 그의 정적이었던 병부 상서 석성에게 탄핵되었고 일본군이 아직 조선에 철수하지 않았는데 거짓 보고를 했다는 사실이 들통나 이여송과 함께 파직되어, 본국으로 소환된다.[2] 그래도 그동안의 공적을 인정받아 정 2품 도찰원우도어사(都察院右都御史)로 임명되었으나 나중에는 낙향했고 죽을 때까지 인화에서 지냈다.

3. 여담

  • 저서로 경략복국요편(經略復國要編)을 편찬하였으며, 이는 임진왜란에 참전한 명군의 1차 사료로서, 임진왜란을 명군의 입장으로 관찰할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조명 연합군이 펼쳤던 여러 작전 및 조선 장수들에게 내리는 지령 등이 있으며 읽어보면 당시 송응창이 한반도의 매서운 겨울 한파와 열악한 도로 사정으로 인해 파견된 명군이 겪은 고통과 보급 문제로 얼마나 고민했는지 알 수 있다. 그는 나름 전세를 객관적으로 판단하는 능력이 있었고 일본의 음모와 조선 분할에 대한 명의 논쟁을 조선에 알리고 일본의 터무니 없는 요구 조건을 일축하였다. 다만 송응창 역시 당시 중국인들이 가진 중화사상에 바탕하여 한편으로는 조선도 순한 오랑캐요 일본은 말 안듣는 사나운 오랑캐로 취급하고 무시하는 기록이 곳곳에 보이고 조선 조정의 의도를 무시하고 제멋대로 일본과 강화를 추진하였고 조선이 강화를 반대하는 사신을 명 조정에 보내는 것을 방해하는 행적을 보였다.
  • 임진왜란 당시 명의 최고 지위였음에도 직접 병력을 이끈 이여송과 협상 및 조작으로 유명해진 심유경에 비해 이름이 덜 알려져 있다. 그래도 후에 경략으로 온 사람보단 높은 편이다.
  • 양명학에 가까운것으로 보인다. # 주자의 성리학에 깊게 빠진 조선에 대해 부정적으로 바라보며 직접 왕세자( 광해군)의 교육에 대해 개입하려 할 정도였다. 조선과 달리 명나라의 과거는 주자의 학설이 아니더라도 조리에 맞고 문장이 훌륭하면 합격할 수 있었다.[3]
  • 송응창의 수하 일선 사단장급 이여송과 조선 파병에 찬성한 병부상서 석성은 조선에서 생사당(生祠堂)을 차려줄 정도로 고마워했으나, 송응창은 양명학에 기울어 조선조정을 훈계한데다가 일본과의 강화에 관망했기 때문에 조선 조정에서 불만이 많았다. 송응창이 교체되자 조선 조정에서 반겼으나 정작 후임 경략 '고양겸'은 강화를 추진 하면서도 명나라군은 주둔해야 한다며 화전양면 전술을 주장하던 송응창과 달리 요동에 짱박혀서 조선에 입국조차 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강화에만 적극적으로 나서다가[4] 4개월 해임되었다. 그리고 그 후임 경략 '손광'은 조선에 정동행성을 설치하고 순무를 파견해서 조세 등 물자를 모두 관장하게 해야 하며 명나라 병사로 둔전을 해야 한다고 주장해 조선을 크게 놀라게 한다. 즉 송응창 이후로 줄줄이 더 상태 안좋은 후임들만 온 것이다.

4. 대중매체

광복 70주년 특별기획 대하드라마 징비록에서는 최일화가 맡았다. 드라마에서 왜곡이 있다면, 실제 역사에서 송응창은 심유경의 강화라는 이름의 국제 사기극에 반대했고[5], 엘리트 진사 출신 답게 막돼먹은 일부 명군 장수들이 조선군과 조선 조정을 무시하고 백성들에게 민폐를 끼쳤는데 반대로 이를 단속하며 그나마 예를 갖춰 존중하는 편이었다. 다만 일본군이 전부 철수했다는 거짓정보를 올렸다가 사실이 드러나자 정철에게 자신의 죄를 뒤짚어 씌웠고 강화를 반대하는 조선을 못마땅하게 여겼기에 선조의 뜻에 따라 명나라로 떠나는 황진의 사은길을 방해하는 짓을 했으며 명조정에 일본군이 퇴각했다는 거짓 정보를 올린 사실이 들통나 대외정책을 망쳤다는 이유로 이여송과 함께 탄핵을 받아 물러났기 때문에 악질적으로 묘사한 것 같다.

임진록 2에서는 확장팩 조선의 반격에서 명군의 핵심 영웅으로 나오며, 일본에 파병된 명군의 총사령관으로 등장한다. 원거리 공격 및 포박술을 사용하며, 무기가 무려 리볼버다.[스포일러]

천하제일상 거상의 대만 1차 장수인 손유창의 모티브로 보인다.
[1] 조선으로 치면 병조 참판 명나라에선 조선의 판서 급인 상서(정 2품) 밑에 정 3품 좌, 우시랑이 있고 남경에 비록 한직이지만 정부를 남겨놔서 남경 상서와 시랑직이 명예직으로 존치 했다. [2] 선조실록 48권, 선조 27년 2월 21일 경오 4번째기사 1594년https://sillok.history.go.kr/id/kna_12702021_004 [3] 정규 과거 시험 외에도 잦은 추가 시험으로 합격자가 과도하게 많아 상위 1~3명을 제외하고 임용되지 못하여 대부분이 급제에 머물었던 조선과 , 중국의 경우 3년에 한번 3~400여명만 진사로 선발했다. 그래서 진사출신이 아닌 하위 시험 합격자도 벼슬 임용이 상당했다. [4] 송응창은 왜에게 조공을 허용시키는 조건으로 강화 협장을 했는데, 고양겸은 한술 더 떠 책봉도 허용하자고 했고 명조정에 말빨이 안먹히자 선조를 만나서 말하길, 조선이 명나라에게 왜를 책봉하라는 진주사를 올리라고 하는 바람에 조선 조정이 또 뒤집혔다. [5] 히데요시와 일본의 요구 조건이 명에서 보기엔 터무니 없이 무례하기에 애초에 받아질리가 없었으며 결국 심유경은 처형당했다. [스포일러] 단, 명군이 일본의 동군을 지원하므로 조선에게 의도치 않은 배신을 저지른 인물로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