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5-18 20:56:10

손기석

<colcolor=#fff><colbgcolor=#0047a0> 본관 일직 손씨[1]
출생 1893년 10월 25일
경상도 밀양도호부 천화면 원당리
(현 경상남도 밀양시 산내면 원서리)
사망 1925년 5월 23일
경상남도 밀양군 밀양경찰서 유치장
상훈 대통령표창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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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 독립유공자. 2011년 대통령표창을 추서받았다.

2. 생애

손기석은 1893년 10월 25일 경상도 밀양도호부 천화면 원당리(현 경상남도 밀양시 산내면 원서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1919년 4월 4일 단장면 태룡리 용회동 장터에서 열린 만세운동에 참가하였다. 3.1 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 중 한 사람이었던 한용운은 우선 중앙학림 학생 오택언과 지용준(池龍俊)을 통도사로 내려보내 시위 운동을 주도하게 했다.

3월 20일, 통도사 승려 5명이 표충사를 방문하여 단장면 태룡리의 장날인 4월 4일 만세시위운동을 할 것을 결정하였는데, 이날은 사명대사의 춘향일이라 사람들이 더 많이 모일 것이라 예상하였다. 이에 승려들은 독립선언서를 등사하고 태극기를 만들어 시위 준비를 하면서 인근 사찰과 단장면· 산내면· 산외면 등에 시위운동 계획을 비밀리에 알렸으며, 표충사 강사 및 법무계 책임으로 재직하던 이장옥(李章玉)은 법무계 서기 김종석(金鍾碩)에게 ' 민족대표의 최후의 신탁을 배반하지 말아야 한다'는 내용의「선서(宣書)」라고 제목을 붙인 취지문을 수백 장 등사하게 했다.

이때 원서리 사람인 손기석은 표충사 승려로부터 4월 4일 용회동 장터에 원서리 주민들이 많이 모이도록 독려하라는 부탁을 받고 주민들에게 이런 사실을 통보하였다. 장날이 되자 이장옥·오학성·손영식(孫永植)·김성흡(金性洽)·이찰수(李刹修)·구연운·오응석 등 시위를 주도하는 승려들은 민간인의 옷차림으로 변장을 하고 각기 준비물을 감추어 군중들 속에 숨어 장터로 들어왔다. 미리 연락해 두었던 학생 50여 명은 독립선언서와 태극기 등을 배포하였다. 정오 쯤에 5천여 명의 군중이 장터에 모여들자 12시 30분 표충사 승려들이 죽간 끝에 '조선독립만세'라고 크게 쓴 기를 매달아 시장 중앙에 높이 세웠다. 나팔 소리를 신호로 구연운이 깃대 앞에 높이서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일본의 침략 행위를 규탄하였다. 이어 독립만세를 삼창하자 수천 군중이 여기에 호응하여 독립만세를 외쳤다.

장터를 돌던 손기석과 성도일(成道一)·박권하·이상발(李尙發)·장만식(蔣萬植)·장인식 등 시위군중은 헌병주재소로 가서 독립만세를 부르고 주재소를 향해 돌을 던지기 시작했다. 일제 헌병과 경찰이 해산을 강요하자 시위 군중은 헌병주재소를 포위하고 돌을 던져 주재소를 완전히 부숴버리고 문관경찰 경부로서 일본 제국 육군 헌병 군조였던 나와 카이지(名和海次)마저 짓밟아 버렸다. 이즈음 밀양 헌병분견소로부터 헌병이 증파되고 경찰서 순사가 긴급 출동하여 발포를 해 오후 2시 쯤 시위 군중들은 해산되었다.

이날 만세운동으로 364명이 검거되고 71명이 검사국으로 송치되었는데 당시 만세시위에 참여했고 체포된 손기석은 1919년 11월 20일 부산지방법원 마산지청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및 소요·건물훼기·상해 등의 혐의로 태형 90도를 받았다. #

출옥 후에도 그는 일본 경찰로부터 예비검속을 당했으며, 1925년 5월 22일에 부산검사국 밀양분국의 호출을 받고 밀양경찰서 유치장에 구금되었다가, 다음날인 23일 갑자기 별세하였다. 일본 경찰은 그가 폐병으로 사망하였다며, 24일 가족들에게 시신을 인계하였으나 가족들의 증언에 의하면 절대로 폐병을 앓은 사실이 없었으므로 유치장에서 가혹한 구타로 억울하게 목숨을 잃은 것으로 판단된다.

2011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다.

[1] 25세 기(基) 항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