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9-07 07:22:15

소고 카즈마사

十河一存(そごう かずまさ)
1532(?) ~ 1561년

1. 소개2. 소고 가문3. 사누키 평정과 키나이 진출4. 요절5. 일화6. 기타7. 대중 매체에서
7.1. 노부나가의 야망 시리즈7.2. 100만인의 전국무쌍7.3. 전극희

1. 소개

사카이 막부의 창시자 미요시 모토나가의 넷째 아들이자 아와의 천하인 미요시 나가요시의 셋째 동생. 그리고 사누키의 호족 소고 카게시게(十河景滋)[1]의 양자. 아들로 소고 시게마사, 마츠라 마고하치로(松浦孫八郎) 등이 있고 양자로 소고 마사야스가 있다. 용맹하여 오니 소고(鬼十河)라는 별명을 얻었다.

미요시 가문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당시 센고쿠 시대 다이묘 주변 지역의 호족이나 약소 세력의 다이묘들에게 자신의 아들을 내어주어 해당 가문의 가독을 잇게 했는데 미요시 가문 또한 이러한 외교 정책을 펼쳤고, 카즈마사는 아들이 요절하여 후계자가 없는 사누키의 호족, 소고 가문을 잇게 되었다. 소고 가문에 들어가고 둘째 형인 미요시 짓큐를 따라 사누키를 전전했으며 그 무용을 전국에 알렸다. 첫째 형 미요시 나가요시 키나이로 진출하여 호소카와 가문과 전쟁을 시작하자 카즈마사도 군대를 이끌고 키나이에 상륙하여 키나이 미요시 정권의 일각을 담당하였다. 하지만 병에 걸리게 되며 결국 30세의 나이로 이즈미에서 요절하였다.

2. 소고 가문

소고 가문은 사누키 중앙에 세력을 잡았던 호족 가문으로 고대 황족의 후예인 우에다(植田)씨의 지류라고 한다. 당시의 율령국들은 대부분 호족들이 난립하여 군웅할거와 비슷한 양상을 보였는데, 사누키 또한 가마쿠라 막부 시대에 벌어진 죠큐의 난(承久の乱)에서 막부 측의 군공으로써 사누키의 영토를 하사받은 무사와 무로마치 막부 시대 호소카와 가문의 내분으로 벌어진 전쟁에서 군공으로 사누키의 영토를 받은 무사들이 대대로 성장하여 호소카와 가문에 소속하는 호족들의 형태로 난립하게 되었다.[2][3] 이후 특별이 대두되는 호족이 등장하지 못했고 사누키에서는 무로마치 중기 ~ 후기가 되기까지 사누키를 통일, 혹은 지배하려는 다이묘조차 나타나지 않았다.

소고 가문은 이런 사누키의 정세 속에 야마다 군(山田郡) 소고 성(十河城)을 근거로 주변 지역을 장악하고 있었다. 동 사누키의 선적지(船籍地)인 아지(庵治)를 관리하고 있었으며 이것으로 호소카와 사천왕이라고 불리는 카가와(香川) 가문, 야스토미(安富) 가문과 동등한 이익을 뽑아내고 있었다. 위치 또한 사누키의 동쪽에 있어 아와지 및 혼슈와의 교통성도 높았다. 하지만 당시의 당주 소고 카게시게는 아들 소고 카네미츠(十河金光)가 요절해버려 후사 문제가 발생하였고, 이에 미요시 가문은 소고 가문의 수익과 아와지가 본거인 삼남 아타기 후유야스와의 연계성을 고려한 결과 사남 카즈마사를 카게시게의 양자로 보내게 된다.[4]

3. 사누키 평정과 키나이 진출

카즈마사가 언제, 몇 세에 소고 가문으로 들어가게 되었는지 알수없으나 소고 카즈마사로 이름을 고친 뒤로 미요시 가문의 본거지인 아와와 또다른 호소카와의 영지인 사누키를 관리하는 둘째 형 미요시 짓큐와 협력하여 사누키의 호족들을 포섭하기위해 전쟁을 일으킨다. 동 사누키의 전쟁은 순조롭게 진행되었으며 동 사누키를 대표하는 호족인 산가와(寒川) 가문, 야스토미 가문를 굴복시키고, 중앙부의 코자이(香西) 가문마저 포섭하는 것에 성공함에 따라 사누키는 아와와 마찬가지로 미요시 가문의 강역 아래로 들어가게 되었다.[5]

1549년 이 일족의 원수 미요시 소산을 토벌한다는 명목으로 소산을 지지하는 주군 호소카와 하루모토와 대립하며 전쟁을 일으켰다. 이 전쟁에 카즈마사도 군대를 이끌고 참전했으며 나가요시와 함께 소산을 급습하여 패퇴시킴으로써 군공을 세우게 되었다. 이후 나가요시는 하루모토를 쫓아내고 미요시 정권을 확립해 쇼군 가문과 본격적인 대립을 시작했고 카즈마사도 나가요시를 따라 쿄토로 침공해오는 하루모토의 군대를 막는 등의 활약을 보이며 이즈미의 키시와다 성(岸和田城)주로 임명되어 키나이에서도 세력을 뻗치게 되었다.

1553년 짓큐는 당시 아와의 국주 호소카와 모치타카(細川持隆)의 불온한 움직임을 포착하였고 카즈마사와 모의해 모치타카를 켄쇼지(見性寺)에서 살해하였다. 모치타카 살해 이후에도 카즈마사는 키나이에서의 전쟁에 활약하였고, 아들 마츠라 마고하치로를 후견하기 위해 키시와다 성에 머무르게 되었다.

당시 키나이로의 연착륙에 성공한 소고 가문은 소금과 관련된 무역의 징수권을 확보했기에 미요시 가문 내에서도 탄탄한 경제 기반을 마련할 수 있었고, 미요시 정권의 유력 호족으로 떠오르게 되었다. 하지만 이런 소고 가문의 영광은 오래가지 못하였다.

4. 요절

1561년 소고 카즈마사는 이즈미에서 병으로 급사하였다. 추정나이 약 30세로, 1년 전에도 전쟁에서 군공을 올렸기에 그의 죽음은 미요시 정권 내에서도 상당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그의 후사는 아들이었던 소고 시게마사가 잇게될 예정이었으나 미요시 요시오키 사후 시게마사가 미요시 가문의 후계자로 선택됨에 따라 미요시 짓큐 차남을 카즈마사의 양자로 보내 소고 가문을 잇게 하였다.

5. 일화

약 30세의 나이에 요절하였음에도 개성적인 일화를 많이 남기게 되어 미요시 5형제 중의 인지도는 나가요시 다음이거나 나가요시와 대등하게 겨룰 수 있을 정도다.

카즈마사는 산가와 가문의 성 이케노우치 성(池内城)을 공격 중이었다. 당시 가신 중에 카베 겐지(鴨部源次)라는 자가 있었는데 겐지의 형제가 산가와 가문에서 싸우고 있다는 사실을 안 카즈마사는 "형제끼리는 칼을 맞대고 싸우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하며 겐지를 산가와 가문 쪽으로 보내주었다. 이에 감동한 겐지는 "카즈마사 님의 보은에 감사드리나 카즈마사 님에게 상처를 입히는 것은 반드시 저희가 될 것입니다."라고 말하며 산가와 진영으로 건너갔다. 며칠 후 카베 형제는 진짜로 카즈마사의 본대로 돌격해왔고 카즈마사의 왼팔을 창으로 찔러 상처를 입히는데 성공하였다. 하지만 카베 형제는 카즈마사 본대에 고립되어 카즈마사를 찌른 겐지의 형제는 카즈마사의 반격으로 죽게 되었고 겐지는 무용을 뽐내며 10명에 가까운 사상자를 내고 카즈마사의 병사들의 손에 죽게 되었다.

산가와 공략 중 왼팔에 큰 상처를 입은 카즈마사였지만 이에 동요하지 않고 자신이 큰 부상을 당했다는 사실을 알리지 않기 위해 상처에 소금을 때려 붓고, 등나무로 상처를 묶어 지혈하고 창을 꼬나쥐어 직접 무용을 뽐내었다. 전투가 끝나고 치료를 위해 옷을 벗는데 가신들은 상처를 보고 아연실색하며 카즈마사의 담력과 위용에 경악하였다. 이 사건 이후로 카즈마사의 이름은 널리 퍼지게 되어 오니 소고(鬼十河)라는 별명이 생기게 되었다.

카즈마사는 피부가 약하여 무구를 입었을 때 발생하는 습기 문제에 대해 고민하고 있었는데, 이에 카즈마사는 아예 앞머리를 전부 밀어버리고 사카야키[6]를 더 넓게 밀어 버리는 식으로 머리 모양을 바꾸었다. 후에 카즈마사가 용맹을 떨치자 카즈마사의 머리는 소고의 이마(十河額)라고 불리게 되었으며 소고 가문 가신들 사이에서 유행하였다고 전해진다.

반대로 카즈마사 입장에선 좀 눈물나는 이야기도 전해 내려오는데 미요시 짓큐가 아와의 국주가 되어 통치하고 있을 시절, 짓큐와 카즈마사를 필두로한 많은 가신이 신토류(神当流)를 기반으로 한 무술을 배우고 있었다. 하지만 시노하라 나가후사만은 "신토류는 실전에서 전혀 쓸모가 없는 검술이다."라 말하며 신토류를 익히지 않고 다른 무사사범 밑에서 검술을 연마하고 있었다. 이 이야기를 들은 짓큐는 나가후사의 말이 사실인지 확인하기 위해 나가후사와 카즈마사를 대련시켰는데 나가후사가 간단히 승리하여 짓큐에게 인정받게 되었고 이에 카즈마사는 크나큰 분함을 느끼게 되었다. 나가후사와의 대련이 끝나고 며칠 후, 나가후사의 사범이 카즈마사가 있던 절에 왔는데 카즈마사는 이를 보고 가신에게 "뭐라도 좀 해봐라."라고 말했으나 이 가신은 이 말을 "저 사범 나부랭이를 죽여라."라고 알아들었고 나가후사의 무술사범은 불의의 습격을 받아 사망하게 되었다. 시기적으로 누가봐도 카즈마사의 범행이 명확하기에 나가후사는 카즈마사 타도를 외치며 군사를 모으는 사태까지 가게 되었고 짓큐는 "카즈마사는 죄에 상응하는 처분을 내릴테니 이번 한번만 참아달라"고 부탁하였고 나가후사는 이 조건을 수락하여 카즈마사는 직위가 조정되는 레벨에서의 처벌로 끝나게 되었다. 사범 살해사건 이후에는 나가후사의 아래로 가신들이 몰려들었고 결국 짓큐는 가신의 반을 나가후사 밑에서 수학하게 해주었다.[7]

카즈마사는 마츠나가 히사히데를 못마땅하게 여겨 이 두명은 서로를 혐오하게 되었는데, 카즈마사가 병에 걸려 온천 치료를 위해 말을 타고 떠나자 히사히데는 이 틈을 노려 카즈마사를 낙마시켜 죽음에 몰아넣었다고 한다. 물론 실제 사실이었을 가능성은 낮다.

6. 기타

이제 막 쇼군 가와 화친하고 영토 확장을 실시하려던 미요시 가문에게 키나이 군세의 일각을 담당하였던 카즈마사의 죽음은 굉장히 좋지 않은 일이었다.

사누키의 호족인 소고 가문을 이었기에 그가 사누키를 지배하고 소고 성에 거주했다는 인식이 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사누키는 짓큐의 침공 이후에도 자신들의 독자적인 세력을 계속해서 굴렸으며 서부의 카가와 노부카게(香川之景)는 아예 계속해서 미요시에게 반발하였다. 카즈마사 또한 사누키에서 그들을 관리한 게 아니라 키나이로 진출하여 소고 가문만의 독자적인 세력을 굴렸다. 오히려 미요시 쪽에서 사누키에 영향력을 행사한 쪽은 모치타카와 짓큐로 대표되는 아와 호소카와, 미요시 가문의 사람들이었다. 노부나가의 야망 시리즈 같은 코에이 사의 게임이 이런 오류를 가장 잘 반영하고 있다. 가장 최근 작품인 전국입지전에서도 카즈마사는 항상 소고 성에서 스타트를 끊으며 자신이 관리했던 이즈미 형님이 차지하고 있는 실정.

소고 가문은 카게시게가 당주가 된 다음부터 요절 징크스가 나타났다. 카즈마사가 약 30세, 요시츠구가 약 25세, 마사야스가 약 33세, 센마츠마루가 14세에 죽었다.[8] 이 중 카즈마사-요시츠구 마사야스-센마츠마루는 부자 관계로 이들의 이른 죽음은 소고 가문을 혼란에 빠뜨리고 결과적으로 멸망하는 것에 큰 영향을 주게 된다.

남겨진 일화를 보면 당시 무가 문화와 멀리 떨어져있는 저돌적인 맹장으로 생각되지만, 다도회 등의 문화 활동에 참가한 기록이 남아있어 일화에 나오는 맹장의 이미지만 가지고 있다고는 단정할 수 없다.

카즈마사와 소고 가문의 본거지였던 소고 성은 개간 작업으로 인해 유적이 거의 남지 않아있다. 주곽은 쇼넨지(称念寺)라는 절이 세워져있고 성터 북쪽에는 카즈마사와 마사야스 센마츠마루의 작은 묘소가 세워져 있다.

7. 대중 매체에서

코에이가 미요시 가문에서 미요시 나가요시 마츠나가 히사히데 다음으로 밀어주고 있는 무장이다.

7.1. 노부나가의 야망 시리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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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부나가의 야망 출진

원래는 농촌 무사같은 일러스트를 사용하였으나 노부나가의 야망 창조 PK부터 일신된 일러스트를 사용하기 시작하였다.[9]

능력치는 창조 기준으로 통솔 81 무용 87 지력 61 정치 36. 전국전으로 사망 당시의 이야기가 준비되어있는데, 카즈마사가 나가요시에게 히사히데의 위험성을 알리는 이벤트가 나온후 히사히데를 쫓아내지 않으면 얼마안가 카즈마사가 사망하는 전국전이다.

7.2. 100만인의 전국무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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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에이의 소셜게임 100만인의 전국무쌍에도 나가요시, 히사히데와 함께 등장하였다. 형을 상대로 한 특수 대사가 있으며 쵸소카베 모토치카를 의식하는 특수 대사도 준비되어 있었던 듯하다.

7.3. 전극희

전극희2부터 등장. 미요시가의 중신으로 등장하는데... 분명 미요시 나가요시의 동생인데 중년 아저씨로 등장해 미소녀로 나온 나가요시와 엄청난 괴리를 느끼게 만든다. 3부터는 미청년으로 나오지만 현실은 사망전대.


[1] 소고 마사하루(十河存春)라고도 불렸다 한다. [2] 이를 잘 나타내주는 호칭이 호소카와 사천왕으로 오닌의 난 당시 호소카와 측에서 군공을 올린 사누키의 호족들을 지칭하는 말이다. [3] 지금이야 사누키의 후신인 카가와현을 포함한 시코쿠 전체가 깡촌 취급이지만 옛날에는 야마토, 야마시로의 영역과 상당히 가까웠기 때문에 수도권과 비슷하게 인식되었고 권력을 둘러싼 전쟁이 시코쿠 동부에서 일어나기도 하였다. [4] 이때의 자세한 정황은 불명으로 소고 측에서 먼저 관계를 맺을 것을 요청했는지, 미요시 측이 먼저 관계를 제안했는지 조차 불확실하다. 시기 또한 불명이며 아버지 모토나가는 1532년에 이미 사망한 상태였기 때문에, 1522년 생이자 10대의 나이에 교섭의 대표자로 이름이 표기될 정도로 영향력이 있던 장남 나가요시의 결정이라고 추측된다. [5] 이때 소고 가문은 근처의 미타니(三谷)씨, 오카(岡)씨 등의 호족을 끌어들여들였고, 이는 소고 가문 키나이 진출의 기반이 된다. [6] 月代, 반월 모양으로 앞머리부터 머리 중앙까지 밀어버리는 머리 모양. [7] 이 이야기의 출처는 무카시아와모노가타리(昔阿波物語)로 알려져 있는데, 이 사료는 그 미요시 짓큐를 "상당한 맹장이나 문화 활동과는 거리가 먼 인물"로 평가하는 등 인물묘사에 대해선 역사적 사실과 상반되는 이야기들이 기재되어 있다. [8] 카네미츠는 생몰년 불명이지만 요절했다는 기록이 남아있고, 마고하치로는 생년 불명에 1575년을 몰년으로 추정하고 있으므로 요시츠구의 나이에서 그렇게 차이가 나지 않을 것이라 추측된다. [9] 히사히데가 노부나가의 야망 창조에서 새로운 일러스트를 받은 반면 미요시 5형제는 PK에 와서야 미요시 나가요시와 카즈마사만이 새로운 일러스트를 받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