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시기인 1704년 7월 2일 현대 리히텐슈타인의 셸렌베르크에서 오스트리아- 잉글랜드- 네덜란드 연합군과 프랑스- 바이에른 동맹군이 맞붙은 전투. 말버러 공작 존 처칠이 이끄는 연합군이 상당한 희생을 치른 끝에 승리를 거뒀다.2. 배경
1704년 초, 오스트리아는 큰 곤경에 처했다. 라인강 유역의 란다우와 켈 요새는 프랑스군에게 점령당했고, 레겐스부르크, 아우크스부르크, 파사우 등 주요 도시들 역시 프랑스-바이에른 동맹군이 점령했다. 프랑스 국왕 루이 14세는 대대적인 공세를 계획했다. 그는 탈라르 공작 카미유 도스튄 휘하의 군대가 라인강을 가로질러 진격하는 동안 클로드 루이 엑토르 드 빌라르 휘하 군대가 플란데런의 연합군을 붙들어두길 희망했다. 여기에 페르디낭 마르생 원수가 이끄는 프랑스군과 막시밀리안 2세 에마누엘이 이끄는 바이에른군이 도나우강에서 오스트리아 방면으로 이동하고, 이탈리아 반도에 있는 프랑스군은 티롤을 공격하게 했다. 루이 14세는 이같은 대대적인 공세를 감행한다면 오스트리아가 더는 버티지 못하고 평화를 요청할 것이라고 확신했다.이러한 루이 14세의 작전에 따라 라인강 유역의 프랑스-바이에른 연합군이 공세를 개시하자, 레오폴트 1세는 플란데런 전선에서 프랑스군을 몰아붙이고 있던 잉글랜드-네덜란드 연합군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말버러 공작 존 처칠은 1704년 4월 네덜란드에 약간의 병력만 남겨두고 남쪽으로 진군하기로 결정했다. 다만 그는 네덜란드 정부가 자신들의 안전을 이유로 병력을 대거 라인강 유역으로 남하시키는 걸 거부할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 네덜란드 정부를 속이기로 했다. 그는 네덜란드 정부에게 적의 눈을 속이기 위해 도나우강으로 가는 척 이동하다가 모젤강 방면으로 진격할 거라고 알린 뒤 5월 5일 헤이그를 떠나 마스트리히트로 갔다. 5월 11일, 그는 40개 보병 대대와 79개 기병 대대로 구성된 네덜란드 부대를 시찰하고 5월 14일 잉글랜드군과 합세한 뒤 다음날 남하를 개시했다.
5월 20일 카르펜에 도착한 말버러 공작은 헤센카셀군, 덴마크군과 합세해 병력을 규합한 뒤 5월 26일 코블렌츠 근처에서 라인강을 도하하고 5월 28일 카스트하임 근처에서 마인 강을 도하했다. 6월 3일, 말버러 공작 휘하 기병대는 라덴부르크에서 네카르 강을 건너 사흘 동안 보병대와 포병대를 기다렸다. 이후 6월 9일 민델스하임에 도착한 뒤 6월 10일 사부아 공자 외젠의 오스트리아군과 조우했다. 두 장군은 휘하 병력을 이끌고 그로스 헤파흐로 진군했고, 거기서 바덴바덴 변경백 루트비히 빌헬름과 합세했다. 이후 세 장군은 다음과 같은 계획을 세웠다.
- 외젠은 3만 병력을 이끌고 라인강 유역을 사수한다.
- 바덴바덴 변경백은 울름 근처에서 바이에른군을 저지한다.
- 말버러 공작은 바덴바덴 변경백과 연계하여 적의 측면을 공략한다.
한편, 프랑스-바이에른 동맹군은 적이 근처까지 쳐들어왔다는 걸 알게 되자 6월 2일 울름으로 진군해 바덴바덴 변경백과 말버러 공작을 저지하려 했다. 당시 프랑스-바이에른 동맹군은 적보다 전력이 열세했지만 도나우강 유역에 설치된 모든 요새와 포대를 바탕으로 도나우강 유역 일대의 모든 건널목을 사수할 수 있다는 전략적 이점을 갖추고 있었다. 그들은 외젠과 바덴바덴 변경백의 연합군이 도나우강을 건너는 걸 무슨 일이 있더라도 저지하기로 했다. 일단 울름과 잉골슈타트와 같은 잘 요새화된 장소들은 적의 공세에 잘 대처할 수 있지만, 도나우뵈르트, 회흐슈테트, 라우잉겐, 딜링겐과 같은 지역은 요새 시설이 부실했다. 이에 프랑스-바이에른 동맹군은 라우잉겐과 딜링겐 주위에 요새화된 숙영지를 세우고 다르코 백작 장 바티스트에게 13,000명의 병력을 파견해 도나우뵈르트의 셸렌베르크 언덕에 요새를 건설하게 했다.
6월 30일, 약 5만 명의 영국-오스트리아 연합군은 지엔겐에서 출발했다. 이때 정찰병들이 바이에른 병사들이 셀롄베르크 요새를 건설하고 있다는 소식을 전했다. 이에 말버러 공작은 적이 건설을 완료하기 전에 승부를 보기로 결심하고 7월 2일에 셸렌베르크 요새를 돌파하고 도나우강을 도하하기로 결정했다. 이리하여 오스트리아-잉글랜드 연합군과 프랑스-바이에른 동맹군의 전투가 임박했다.
3. 양측의 전력
3.1. 오스트리아-잉글랜드-네덜란드 연합군
- 총사령관: 말버러 공작 존 처칠
- 오스트리아군 사령관: 바덴바덴 변경백 루트비히 빌헬름
- 병력: 22,000명
3.2. 프랑스-바이에른 동맹군
- 총사령관: 다르코 백작 장 바티스트
- 병력: 13,000명, 대포 16문
4. 전투 경과
셸렌베르크 요새 건설을 감독할 책임을 맡은 다르코 백작은 적이 아무리 빨리 와도 요새가 건설되기 전까지는 오지 않으리라 여기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요새 건설에 박차를 가하지 않고 공사를 상당히 여유롭게 진행했다. 그런데 7월 2일 적이 도나우강 건너편에 이르렀다는 급보를 접한 다르코 백작은 요새 건설을 서두르게 했다. 하지만 그는 말버러 공작이 곧장 도나우강을 건너지는 않을 것이며 7월 3일 즈음에 공세를 가할 거라고 여겼다. 이에 그는 병사들에게 무기도 소지하지 않고 요새에서 일하게 하고 자신은 점심 식사를 하기 위해 선임 참모들과 함께 도나우뵈르트 마을로 돌아갔다.그런데 정오 경, 바이에른군 전초기지가 적의 압박으로 퇴각하고 있다는 소식이 들어왔다. 다르코 백작은 서둘러 셸렌베르크로 달려와 그의 휘하 병력 대다수를 아우구스투스 요새와 보슈베르크 요새 사이에 배치하고 셸렌베르크 요새와 도나우뵈르트 성벽 사이에 4개 대대를 배치하고, 포대 및 넷탄쿠르트 연대를 요새 전면에 배치시켰다. 한편 말버러 공작은 보병 45개 대대의 각 대대에서 130명씩 선발해 총 6천 명의 부대로 재편하고 모다우트 경의 지휘하에 우익을 형성하게 했으며 오스트리아군 8개 보병 대대로 하여금 이들을 지원하게 했다. 그리고 그의 나머지 군대는 적의 정면으로 진군해 모다우트 경의 군대가 위치를 잡을 때까지 기다렸다.
이후 18시 15분, 연합군의 돌격대가 반 고어 장군의 지휘하에 셸렌베르크 언덕으로 진군했다. 그들은 약 300m 폭의 대열로 행진했고, 한 손에는 소총을 들고 다른 한 손에는 막대기 다발을 들고 갔다. 프랑스-바이에른 동맹군은 즉각 응사를 가했고, 반 고어 장군은 총탄에 맞아 즉사했지만, 돌격대는 아랑곳하지 않고 요새 앞 50m까지 진군했다. 그러나 그들은 도랑에 가로막혀 진격이 정지되었고, 이후 프랑스-바이에른 동맹군이 거센 반격을 가하자 몇 시간 동안 혈전을 벌인 끝에 출발 지점으로 퇴각했다. 말버러 공작은 첫번째 돌격대가 실패하자 두번째 공격을 명령했다. 그러나 두번째 공격 역시 적의 반격으로 좌절되자, 그는 병사들에게 잠시 휴식을 취하게 한 뒤 19시 15분에 모다우트 경이 이끄는 6천 병사들에게 언덕의 우측으로 진군하게 하는 동시에 본대에 세번째 공격을 개시하라는 지령을 하달했다.
다르코 백작은 적이 총공격을 감행해오자 이를 저지하기 위해 후방에 배치되어 있던 예비대 대부분을 셸렌베르크 언덕으로 투입시켰다. 그러나 바덴바덴 변경백이 이끄는 군대가 18시 45분 경에 근방의 구스타프 아돌프 요새를 함락시킨 뒤 프랑스-바이에른 동맹군의 남쪽 요새로 진군했을 때 이를 저지할 병력이 남아있지 않았기 때문에 이는 엄청난 실책이었다. 바덴바덴 변경백의 보병대 및 기병대는 곧 도나우뵈르트 마을을 공격하는 동시에 셸렌베르크 요새의 남쪽에 있는 도나우강 부교로 진격했다. 이 광경을 목격한 다르코 백작과 프랑스-바이에른 동맹군은 퇴로가 완전히 끊기게 생긴 걸 깨닫고 전의를 완전히 상실한 채 셸렌베르크 요새를 버리고 도나우강 쪽으로 허겁지겁 달아나다가 많은 병사들이 적 기병대에게 붙들려 살해되었다. 이후 도나우뵈르트 마을의 수비대 역시 전의를 상실하고 7월 3일에 철수했다. 이리하여 말버러 공작은 도나우뵈르트 일대를 장악하고 도나우강 도하를 완수했다.